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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 스톡홀름신드롬의 이면을 추적하는 세 여성의 이야기
롤라 라퐁 지음, 이재형 옮김 / 문예출판사 / 2021년 2월
평점 :
절판
<17일>은 2017년 프랑스에서 발표된 롤라 라퐁의 작품이에요.
이 작품은 도전 정신을 불러일으키네요. 본론은 숨긴 채, 흐트러진 퍼즐 조각처럼 조금씩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끝까지 집중할 수밖에 없도록.
이야기의 구성은 1975년 10월로 시작해 1일째부터 17일째 밤으로 끝나지만, 실제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점과 들려주는 시점 사이에는 시간적 간극이 있어요.
처음에는 '당신'이 누구인지, 당신을 언급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인지가 헷갈렸어요.
왜 그토록 애매하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건지 답답했는데,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깨닫고 많이 놀랐어요. 그걸 의도한 설정이었다면 대성공이에요.
중요한 건 '당신'의 정체가 아니라 당신들이 들려준 이야기에 관한 '생각'이니까요.
1974년 2월 4일, 재벌가 허스트가의 상속자이자 스무 살의 대학생 퍼트리샤 허스트가 좌파 무장단체 SLA에 납치되었고, 두 달 뒤에 '타니아'로 개명한 퍼트리샤는 SLA의 일원이 되어 은행강도사건을 벌였어요. 퍼트리샤의 전향은 세뇌 당한 것일까요, 아니면 자발적 선택일까요.
퍼트리샤의 변호인단은 그녀가 무장단체에게 세뇌되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를 찾기 위한 보고서 작성을 진 네베바에게 맡겼어요.
진 네베바는 프랑스 소도시에 있는 학교에서 영어 강사로 머물고 있는 중인데, 자신의 일을 도와줄 조수로 학생 비올렌을 구했고, 그들이 함께 보고서를 작성해가는 과정이 바로 '17일'의 이야기인 거예요.
단 17일 만에 판결을 뒤집을 수 있을까요.
이 한 권의 책이 생각을 바꿔 놓을 수 있을까요.
"자, 이게 보고서예요." 당신은 제 손을 잡더니 꼭 감싸 쥐며 덧붙였어요.
"단순한 이야기를 섣불리 믿으면 안 돼요."
진 네베바가 퍼트리샤 허스트와 비올렌 이야기를 한 것인지, 아니면 제 이야기를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330p)
진 네베바 선생님과 조수 역할을 했던 학생 비올렌이 작성했던 보고서, 퍼트리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는 비올렌 선생님의 학생이었어요.
비올렌 선생님은 열여섯 살이 된 '나'에게 과외로 영어를 가르쳐줬고, 십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토론 모임을 이끌었으며, '나'를 조수로 일하게 해줬어요. 또한 1975년, 퍼트리샤에 관한 보고서 작성을 했을 때의 노트를 '나'에게 맡겼어요. 퍼트리샤에 관한 진실은 법정 다툼과는 무관하게 세월을 넘어 '나'에게 영향을 미쳤던 거예요. 그래서 '나'는 진 네베바 선생님을 직접 만나러 갔고, 그 어떤 것도 필적하지 못할 그림을 좋아하듯 퍼트리샤를 좋아했다고 수줍게 고백했어요.
"저는 몇 년 동안 아무것도 선택하지 못했습니다.
우리를 황폐하게 만드는 것에 맞서 이기려면 무엇을 해야만 했을까요?
어떤 SLA의 어떤 깃발을 흔들어야 했을까요?
만약에 완전히 타니아 편이 아니라면 어떤 깃발 아래, 어떤 쪽에 서야만 했을까요?" (329p)
퍼트리샤 허스트는 실존 인물이며, 그녀가 겪은 납치 사건과 은행강도 사건은 실화예요.
그러나 <17일>의 주인공은 퍼트리샤도 아니고, 타니아도 아니예요. 퍼트리샤의 전향 이면에 숨은 진실을 파헤쳐가는 당신들이라고 볼 수 있어요.
비올렌 선생님은 토론 모임에서 퍼트리샤의 이야기를 들려줬고, 상황을 단순화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했어요. 왜냐하면 상황은 거기에 속한 사람들로 인해 완전히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에요. 어떤 일이 벌어지고 나면, 절대로 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타니아와 퍼트리샤 중에서 누가 진짜인지 찾고 있었다면, 또 하나의 가능성을 놓치고 있는 거예요. 어쩌면 둘 중 아무도 진짜가 아니라는 것.
세뇌라는 건 특별한 경험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보편적 경험이라는 데에 동의해요. 이미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과 학교, 미디어, 종교, 그리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영향을 받아왔으니까요. 그걸 세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토론이 필요한 주제일 것 같네요. 그보다 먼저 스스로 자신의 생각을 점검해보면 어떨까요.
<17일>은 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그 혼돈이 핵심이라고 생각했어요. 온전히 내 생각을 찾기 위한 과정이니까요.
"방황하는 것은 용감한 일이에요!
의심해보는 것이 하나의 의무가 되어야 하듯
방황하는 것도 하나의 의무가 되어야 합니다!" (204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