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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 시대의 지성 이어령과 ‘인터스텔라’ 김지수의 ‘라스트 인터뷰’
김지수 지음, 이어령 / 열림원 / 2021년 10월
평점 :
제목을 보고 좀 놀랐어요. '마지막'이라는 단어 때문에.
올해 이어령 교수님의 인터뷰 책을 읽었던 터라 건강하게 잘 지내시는 줄 알았는데, 이미 2년 전 암 투병을 하며「죽음을 기다리며 나는 탄생의 신비를 배웠네」라는 인터뷰에서 마음 준비를 하셨나봐요. 인터뷰어 김지수에게 선생님은 다시, 라스트 인터뷰에 응하며 이제부터 들려주는 이야기는 마지막 수업이 될 테니, 가장 귀한 것을 주고 싶다고 했어요. 그것은 죽음과 죽기 살기로 팔씨름을 하며 깨달은 것들이라고 했어요.
"내 것인 줄 알았으나 받은 모든 것이 선물이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삶의 무엇인지 알게 된다."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17p)
"내년 삼월이면 나는 없을 거야. 그때 이 책을 내게." (19p)
스승 이어령의 이야기는 은유와 비유가 가득한 유언인 동시에 귀한 지혜이기에 저자는 하루라도 빨리 전하고픈 마음으로 이 책을 출간했다고 해요.
"인간은 암 앞에서 결국 죽게 된다네. 이길 수 없어. 다만 나는 죽을 때까지 글을 쓰고 말을 하겠다는 거지.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나가면 그게 암을 이기는 거 아니겠나. 방사능 치료 받고 머리털 빠지며 이삼 년 더 산다 해도 정신이 다 헤쳐지면 무슨 소용인가.
그 뒤에 더 산 건 '그냥' 산 거야. 죽음을 피해 산 거지. 세 사람 중 한 명은 걸려서 죽는다는 그 위력적인 암 앞에서 '누군가는 저렇게도 죽을 수 있구나'하는
그 모습을 남은 시간 동안 보여주려 하네." (29p)
우리 시대의 스승인 이어령 선생님이 결국 마지막까지 우리 모두의 '죽음의 스승'이 되어주겠노라는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했어요.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자신의 죽음만큼은 예외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시한부 인생을 순순히 받아들이며 살기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선생님은 자신의 죽음마저도 우리에게 삶의 지혜가 되라고 마지막 수업을 해주시네요. 근래 어느 정치인의 죽음은 애도의 감정이 아닌 분노를 자아냈어요. 생전에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반성하기는커녕 뻔뻔한 태도를 보였던 그는 끝까지 사과하지 않은 채 떠났어요. 어쩌면 그는 자신이 죽을 거라는 생각을 전혀 안했던 게 아닐까 싶어요.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죄인이기에 오만하게 죽음도 피할 거라고 여겼는지도 모르죠. 반성하지 않는 삶이 남긴 건 인간의 추악함뿐이네요.
"왜 매번 눈물 한 방울입니까?"
"늙으면 한 방울 이상의 눈물을 흘릴 수 없다네. 노인은 점점 가벼워져서 많은 것을 담을 수 없어.
눈물도 한 방울이고, 분노도 성냥불 휙 긋듯 한 번이야. 그게 늙은이의 슬픔이고 늙은이의 분노야.
엉엉 소리 내 울고 피눈물을 흘리는 것도 행복이라네. 늙은이는 기막힌 비극 앞에서도 딱 눈물 한 방울이야."
"그러나 80년을 살아야 나올 수 있는, 한 방울이죠."
...
"자네는 나에게 '진리'를 원하고 '정수'를 원하지. 그러나 역사는 많이 알려진 것만 기억한다네.
진실보다 거짓이 생존할 때가 많아. 진실은 묻히고 덮이기 쉬워. 하이데거가 그랬지. 일상적인 존재는 묻혀 있는 존재라고.
내가 여러 번 얘기하지 않았나. 덮어놓고 살지 말라고. 왜냐면 우리 모두 덮어놓고 살거든.
덮어놓은 것을 들추는 게 철학이고 진리고 예술이야. 그런데 지금 우리 시대가 가장 감쪽같이 덮어놓고 있는 게 무엇일 것 같나?" (67p)
책을 읽다가 자꾸만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가슴에 새겨두고 싶은 문장들이 너무 많아서 그때마다 밑줄을 그었거든요.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들은 특정 주제를 정하지 않고 일상 이야기부터 짧은 유머와 철학까지 다양해서 좋은 것 같아요. 선생님은 라스트 인터뷰를 유언의 기법으로 마음속 이야기를 털어놓는다고 하셨는데, 유언을 읽듯이 있는 그대로의 정직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어요. 듣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얘기했으니 그 유언의 신비를 잘 풀어보라고 말이죠.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싶겠지만 책을 읽어보면 이해할 수 있어요. 이 책은 눈물 한 방울, 그 놀라운 의미를 담고 있어요. 마지막 수업은 우리에게 전하는 마지막 선물이었네요.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것.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68p)
"진실의 반대말이 뭔 줄 아나?"
"진실의 반대말은 망각이라고 그러셨지요. 잊지 않고 있습니다."
"맞아. 우리가 잊고 있던 것 속에 진실이 있어. 경계할 것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네요.
덮어버리고 잊어버리는 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어. 은폐가 곧 거짓이야." (70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