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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 - 제18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고요한 지음 / 나무옆의자 / 2022년 5월
평점 :
올 봄에 벚꽃을 제대로 봤던가.
꽃구경이라 함은 나무가 즐비한 거리 사이를 거닐며 벚꽃 휘날리는 광경을 봐야 하는 것인데, 그냥 벚꽃이 핀 것만 봤네요.
분명 눈으로는 봤지만 즐기지는 못했던 것 같아요. "벚꽃 봤니?"라는 질문 속에는 "봄을 즐겼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어요.
아무리 바빠도 계절이 바뀌는 걸 느낄 여유는 있어야 하는데, 그게 마음 같지 않더라고요.
《우리의 밤이 시작되는 곳》은 고요한 작가님의 장편소설이에요.
새벽 두 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잠들었을 그 시각.
벚꽃이 피는 장례식장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두 젊은이, '나'(재호)와 마리는 일을 끝냈어요. 마리는 동인천으로 가는 첫 전철을 타야 해서, 그때까지 맥도날드에서 기다려요. 오늘 재호는 장례식장 건너편의 집으로 올라가지 않고 아래쪽으로 내려갔어요. 마리와 함께 맥도날드에 들러 콜라 한 잔에 빨대 두 개를 꽂아 나눠 마신 뒤 밖으로 나왔어요. 졸음을 쫓을 겸 마리에게 다음 맥도날드가 나올 때까지 걷자고 했어요. 광화문 방향으로 내려가니 빌딩 사이에 거인처럼 우뚝 선 '해머링 맨'이 보였어요. 음, 작가님의 묘사가 현실과 가상을 넘나들어서 흥미롭네요.
마리는 다음 맥도날드 가게 안으로 들어가 창가에 앉더니,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 속에 들어온 것 같아." (22p)라고 말했어요.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라는 그림, 어쩐지 이 소설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줘요. 저도 예전에 야간 근무를 한 적이 있어서 뭔가 그때의 묘한 감성이 뭔지 알 것 같아요. 몽롱한 정신에 젖은 휴지처럼 늘어지는 몸, 약간 둥둥 떠 있는 느낌인데 이성보다는 감성의 지배를 받는다고 할까나. 만약 주인공처럼 그 시각 그 거리에 있었다면, 자꾸 상상하게 되네요.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신기하게도 이야기들이 흘러나오더라고요. 어딘가에 숨어 있었나봐요.
늦은 밤 시내의 한 식당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듯, 우리는 두 사람의 일상을 지켜보게 되네요. 어쩌다 그들은 장례식장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는지부터 각자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요. 처음엔 그 밤에 함께 걷다가, 다음엔 오토바이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그렇게 두 사람은 그들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거예요. 힘겨운 청춘들의 이야기가 모두 잠든 밤에 시작되었다는 게 색다른 의미로 다가오네요. 새벽은 어둠 뒤에 온다잖아요. 어둡고 푸른 밤, 눈부시게 하얀 벚꽃잎, 그 모든 풍경들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한 편의 청춘 영화를 본 것 같아요. 이제는 멀어진 듯한 청춘, 왠지 가까운 듯 느껴지는 죽음 사이에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네요.
"이 회사에 합격하면 오토바이 탈 시간이 없잖아."
나는 피식 웃었다.
"우리에겐 밤이 있잖아."
"아, 맞아. 우리의 밤이 있지. 우리가 이제껏 만들어온 그 푸른 밤이......"
우리의 밤은 죽은 자들이 있는 장례식장에서 시작되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장례식장에서 보았던 창밖 풍경.
... 일이 끝나 장례식장을 나서면 진짜 우리의 밤이 시작되었다. (217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