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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위의 낱말들
황경신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7월
평점 :
"어느 적막하고 쓸쓸한 밤,
당신이 그리워 올려다본 하늘에 희고 둥근 달이 영차 하고 떠올랐다.
달이 무슨 말을 전하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5p)
《달 위의 낱말들》 은 황경신 작가님의 이야기 노트예요.
단어가 씨앗이 되어 싹을 틔우고 무럭무럭 이야기꽃을 피워내고 있어요. 그 이야기 속 '너'는 누군가를 한때 사랑했고, 떠났으며 추억하고 있어요.
내리다, 찾다, 터지다, 쫓다, 지키다, 오르다, 이르다, 버티다, 닿다, 쓰다, 고치다... 이전에도 수없이 썼던 그 말들이 낯선 이야기가 되었다가 왠지 알 것 같은 감정이 되어 다가온 느낌이었어요. 뜨거운 것을 만지면 "앗, 뜨거워!"라고 말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하듯이, "너의 가지런한 세계는 네가 사랑에 빠진 순간 무너졌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향한 하나의 마음이 질서를 무너뜨렸다. 그리하여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백여 년 전의 어느 위대한 작가가 그러했듯, 비밀을 지키고 침묵을 지킴으로써 그 은밀한 사랑을 지키는 것밖에 없었다. 모든 규칙을 파괴한 사랑이 스스로 새로운 원칙을 만들 때까지." (38p)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가슴 한 켠에서 찌릿한 통증을 느꼈어요.
가끔 말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에 쌓여서 꽉 막힌 것처럼 답답할 때가 있어요. 왜 말하지 못했냐고, 말해보라고 다그쳐도 말할 수 없는 이유는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어떻게 변할지 모르기 때문에 저어하는 거예요. 내뱉는 순간의 통쾌함은 잠깐이지만 수습할 수 없는 절망감은 지속된다는 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말보다는 글이 낫지만 글로 적는 건 너무 어려워요. 쓰고 싶지만 쓸 수 없으니 괴로울 뿐이에요. 진심이라고 털어놓았다가 괜한 오해만 생기고, 너랑은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서 이도저도 못하는 바보가 된 것 같아요. 그런데 가만히 '달 위의 낱말들'을 바라보다가, 난 진짜 바보였구나 싶었어요. 마음에 쌓인 말들을 풀어내는 건 결국 마음인 것을, 네 마음이 아닌 그 사람의 마음을 보았더라면, 다정하게 어루만져 주었더라면... 문득 지금의 깨달음을 온전히 간직한 채 어린 나로 돌아간다면 어떨까라는 부질 없는 상상을 하다가 피식 웃음이 났어요. 먼 훗날에도 이럴까 싶어서, 그건 아니라고, 얼른 정신을 차렸네요. 먹구름이 걷히면 맑고 푸른 하늘이 보이는데, 그럴 때 살맛이 나더라고요. 슬픔, 아픔, 그리움, 후회, 미련, 두려움, 집착, 분노, 증오, 사랑 등등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하기에 나라는 인간으로 살 수 있고, 반짝반짝 빛나는 날을 꿈꿀 수도 있는 것이겠지요.
선택 가릴 선(選) 가릴 택(擇)
3년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함께 지내온 연인이 이별을 통보한다면 남은 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엇일까? 한 인간의 자유의지는 어디까지 허용될까? '외부의 제약이나 구속을 받지 아니하고 어떤 목적을 스스로 세우고 실행할 수 있는 의지'라는 철학적 해석은 어디까지 적용될까?
세퀘이아 국립공원에서 네가 처음 들은 주의사항은 곰에 관한 것이었다. 먹을 것을 지니고 다니지 말라, 곰이 달려든다, 먹을 것을 차에 넣어두지 말라 곰이 차를 부순다, 먹을 것을 흘리지 말라, 곰이 추적한다, 기타 등등 기타 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의 부주의로 인해 혹은 곰의 알 수 없는 충동이나 변덕으로 인해 공격을 받을 경우, 도망가거나 기절하지 말고 온 힘을 다해 싸워달라는 것이 안내원의 충고이자 부탁이었다.
"그럴 경우 목숨을 부지할 가능성이 있나요?"
곰과 싸우느니 차라리 그냥 죽는 게 깔끔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너는 물었다. 안내원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꽤나 성가시고 귀찮다는 걸 곰한테 학습시키는 효과가 있지요."
... 어느 쪽을 선택하든 나무가 쓰러졌다는 사실, 곰을 만났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 달라지지 않음에 대해 너는 좌절할까 혹은 그래도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고 기뻐할까? 탄생과 죽음 사이에 놓인 선택이라는 신의 선물은, 삶을 행복하게 하기에 미흡하고 죽음을 막기에 옹졸하다. 하지만 삶을 바꾸는 것은 어쩌면 저 마지막 질문에 달려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너는 생각한다. 무엇을 받아들일지는 선택할 수 없어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선택할 수 있다. 그 선택으로 인해 삶의 미세한 결이 달라진다. 그 결이 물결치며 소란함과 고요함을 만든다. 그러므로 너는, 네게 허락된 삶의 좁은 통로를 걷는 내내, 마음을 다해 가늠하고 구별하고 뽑아야 한다. 달라지지 않은 것들 안에서 홀로 달라질 수 있도록.
(75-79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