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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피부 - 나의 푸른 그림에 대하여
이현아 지음 / 푸른숲 / 2022년 7월
평점 :
품절
널 기다리다 혼자 생각했어 떠나간 넌 지금 너무 아파
다시 내게로 돌아올 길 위에 울고 있다고
널 바라보다 문득 생각했어 어느날 하늘이 밝아지면
마치 떠났던 날처럼 가만히 너는 내게 오겠지...
패닉의 <기다리다>를 들으며 이 책을 읽었어요. 오랜만에 듣는 노래의 가사는 가슴을 콕콕 찌르고, 책의 문장들은 깊이 더 깊이 나를 끌고 내려갔어요. 아주 천천히 다른 깊이의 푸름이 스며들 수 있도록, 어쩌면 이미 내 안에 물든 푸름을 발견할 수 있도록.
《여름의 피부》 는 이현아 작가님의 첫 예술 산문집이에요.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라는 첫 문장부터 마음이 이상해졌어요. 제대로 표현한 적 없었던 내면에 억눌린 뭔가가 불쑥 튀어나온 느낌이었어요.
저자는 널찍하고 두툼한 노트 한 권을 사서 그림을 골라 왼쪽 페이지에 붙이고, 오른쪽 페이지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두서없이 적었는데, 그 노트가 반절쯤 채워졌을 때 그림 속에서 공통의 색이 보였대요. 푸른 기운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채워진 노트, 그리하여 '나의 푸른 그림에 관하여'라는 이야기는 한 권의 책이 되었어요.
이 그림일기 속에는 새파랗게 어렸던 유년과 모든 것이 푸르게 물들던 여름, 몸이 파랗게 변하는 순간 죽음, 병, 멍, 그리고 우울, 고독이 담겨 있어요. 발튀스, 루시안 프로이드, 제임스 설터, 호아킨 소로야 이 바스티다, 던컨 한나,루치타 우르타도, 피에르 보나르, 조지아 오키프, 피에르 본콩팽, 파울라 모도존베커 ... 처음 들어보는 화가와 소설가, 예술가의 생애를 이야기하고 그들의 작품을 소개하는 저자를 바라보았어요. 스스로를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저자를 나 역시 바라보며,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에 익숙했던 과거와 마주했어요. 낯선 작품들이 어느새 나의 과거와 조우하는 느낌이랄까. 그 가운데 파울라 모더존베커의 <노란 꽃을 꽂은 유리잔을 든 소녀> (1902)가 인상적이었어요. 두 손으로 유리잔을 들어올린 소녀는 진지한 표정으로 노란 꽃을 바라보고 있어요. 아름다운 꽃을 보면 대개 환한 미소를 짓기 마련인데, 소녀는 왜 굳게 다문 입술로 꽃을 응시하고 있는 걸까요. 줄기가 잘려진 꽃... 파울라는 자신의 딸을 낳은 지 18일 만에 색전증으로 숨을 거뒀어요. 서른한 살의 화가는 750여 점의 유화와 천여 점이 넘는 드로잉, 그리고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어요. 아래로 더 아래로, 바닥까지 내려가야 다시 올라갈 수 있듯이, 파울라의 말이 바닥을 힘껏 차고 오르는 힘이 된 것 같아요.
내가 아는데, 나는 아주 오래 살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슬픈가?
축제가 길다고 더 아름다운가?
내 삶은 하나의 축제, 짧지만 강렬한 축제이다. (중략)
그러니 내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내 안에서 사랑이 한 번 피어나고
좋은 그림 세 점을 그릴 수 있다면
나는 손에 꽃을 들고 머리에 꽃을 꽂고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나겠다. (192p)
《짧지만 화려한 축제》 , 라이너 슈탐 지음, 안미란 옮김, 솔, 101쪽, 2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