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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비딕 (무삭제 완역본) ㅣ 현대지성 클래식 44
허먼 멜빌 지음, 레이먼드 비숍 그림,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9월
평점 :
굉장히 유명한 소설, 이른바 불후의 고전으로 불리는 작품들 중에는 읽지 않은 책들이 꽤 많은 것 같아요.
작가와 책 제목만 알고 있을 뿐, 정작 그 책을 읽지 않았다면 알아도 아는 게 아니겠죠.
최근 현대지성 클래식 시리즈로 새롭게 완역된 고전을 만날 수 있게 되었어요.
《모비 딕》 은 허먼 멜빌의 장편소설이에요. 세 권 분량의 대작, 우와, 정말 엄청난 스케일의 대서사였네요.
이번 책은 1851년 출간된 《모비 딕》 완역본이자 국내 최초로 레이먼드 비숍의 목판화 일러스트 29점이 수록되었다는 점에서 특별하네요.
선명한 사진보다 목판화 일러스트가 확실히 당시 포경선 선원들과 향유고래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 같아요.
소설은 "나를 이슈메일이라 불러다오." (37p)라는 문장으로 시작해요. 화자인 이슈메일이 곧 멜빌 자신인 거죠. 이슈마엘은 메사추세츠 뉴베드퍼드로 와서 포경선 피쿼드호를 타게 되었어요. 선장 에이해브는 난폭한 흰 고래 모비 딕을 잡고야 말겠다는 결심을 다지는데, 그는 과거에 모비 딕을 잡으려다 한쪽 다리가 잘리면서 깊은 원한이 생겼어요. 선원들과 일등항해사 스타벅은 선장에게 자극을 받아 모험을 하게 된 거예요.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모비딕이 나타났는데, 나침반은 고장나고 선원 하나가 빠져죽고 흑인 하인은 미쳐 버리고, 그 다음 날 우여곡절을 겪은 뒤 작살로 모비 딕을 찌르는 데 성공하지만 에이해브느 작살줄에 몸이 감겨 고래와 함께 바닷속으로 잠겨 버리고 말았어요. 배는 파손되어 가라앉기 시작하고, 선원 하나가 위험을 알리러 돛대에 깃발을 달지만 구조하러 오는 배는 없었어요. 모두 바다에 휩쓸려가고 이슈메일만 바다에 표류하다가 구조되어 살아남았어요.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실종된 아들을 찾으러 다니다가 또 다른 고아인 나를 발견한 것이다." (691p)로 끝을 맺는데, 여기서 고아는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뜻이며, 첫 문장과 함께 중요한 암시를 담고 있어요. 왜 이 소설은 출간 당시에는 주목받지 못하다가 허먼 멜빌 탄생 100주년이 되는 1919년에 부활했을까요. 시대를 앞서 간 작품인 동시에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차분하게 완독하는 것 자체가 도전이며, 끝까지 다 읽고 나서도 한참 여운을 느껴야 할 작품이에요. 고전 번역가 이종인 선생님의 해제를 읽으면서 작품에 담긴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네요. 인생은 머나먼 항해, 당신은 어떤 역할을 하고 싶나요.
희망봉, 사람들이 너를 그렇게 부른다지? 차라리 옛날처럼 '고통의 곶'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았을 텐데.
우리 앞에 나타난 기만적인 침묵에 한참이나 홀려서 따라오다가 마침내 그 고통의 바다에 들어서서 그런지,
이곳에서는 바닷새나 물고기로 변신한 죄 많은 존재들이 안식처 없이 영원히 헤엄치거나 지평선도 보이지 않는
저 검은 하늘에서 계속 날개치는 형벌을 받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평온하고, 눈처럼 하얗고 변함없는,
여전히 하늘로 뿜어 올리는 깃털 같은, 여전히 눈앞에서 우리를 부르는 고독한 물줄기를 이따금씩 볼 수 있었다.
... 밤이 되어도 바다의 울부짖음 앞에서 사람들의 침묵은 계속되었다. 난간 밧줄에 의지한 선원들도 흔들리는 가운데 말이 없었고,
에이해브도 돌풍에 맞서면서 여전히 말이 없었다. 체력이 떨어져 휴식이 필요한 것처럼 보일 때도 그는 그물 침대로 가서 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밤 스타벅은 기압계를 보려고 선실에 내려갔다가 선장의 모습을 보고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에이해브는 나사못으로 바닥에 고정시킨 의자에 꼿꼬이 앉아서 눈을 감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폭풍우 속에 있었는지 빗방울과 반쯤 녹은 진눈깨비가 여전히 쓰고 있는 모자와 외투에서 뚝뚝 덜어지고 있었다. 옆에 놓인 탁자에는 앞에서 말했던 해도가 펼쳐져 있었다. 움켜쥔 선장의 손에는 등불이 매달려 흔들리고 있었다. 몸은 꼿꼿하게 세웠으나 고개가 뒤로 젖혀겨 감긴 눈꺼풀 뒤편의 눈동자가 천장 대들보에 매달린 '밀고자' (선장실에 있는 나침반)의 바늘을 향하고 있었다.
무서운 노인네! 스타벅은 몸서리치며 생각했다. 이 돌풍 속에서 잠자면서도 오매불망 목표물만 바라보고 있구나. (306-308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