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자는 존재 자체로 낙인이었어
오현세 지음 / 달콤한책 / 2022년 12월
평점 :
품절
시대가 바뀌었다는 말,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변했다는 것이 늘 좋은 측면만 있는 건 아니라서, 무엇이 어떻게 바뀐 건지 구체적으로 살펴봐야 알 수 있어요.
한국 사회의 성평등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요. 과거에 비해 성평등 인식이 약간 개선된 부분은 있지만 여전히 여성에게 불평등하다는 인식이 높은 편이에요. 특히 여성에 대한 각종 폭력 문제가 빈번하게 일어나면서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어요. 이미 세상은 평등하다고 여긴다면 그건 환상이고, 착각이에요. 젠더 기반 폭력과 성차별은 뿌리 깊은 차별의 결과라고 볼 수 있어요. 여성차별의 역사는 고대 문명의 시작에서부터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공고하게 뿌리 내리고 진화해 왔어요. 3200년 전 갑골문에도 성차별의 증거가 기록되어 있다고 하네요. 은(상)나라 중흥군주인 무정이 거느린 왕비가 64명인데 법정 배우자는 3명이었고, 부호는 두번째 왕비였어요. 부호의 출산이 임박하자 조정은 점(占)을 쳐서 태어날 아기가 아들인지 딸인지를 물었대요.
(가) 부호(왕비)가 아이를 낳으려 합니다. 아들일까요?
(나) 정(丁)일에 낳으면 길(吉)하니 아들일 것이다.
(다) (하지만) 갑인일에 아이를 낳았다. 길하지 않았다. 딸이었다.
(가),(나),(다)는 점을 친 결과를 적은 갑골문의 내용이라고 해요. 아들을 낳으면 길(吉)하고 기쁘지만, 딸은 불길(不吉)하고 기쁘지 않다고 했으니, 무정왕은 아들을 원했으나 출산 날짜를 맞추지 못해 딸을 낳은 것을 몹시 실망했음을 알 수 있어요. 상 말기엔 아들이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아들을 낳아야만 왕비로서의 자격을 얻었대요. 부호는 늙은 무왕을 대신해 군대를 이끌고 주변국을 토벌한 동이족 최초의 여장군이자 역사상 최초의 실존여성이라고 해요. 그런 부호가 요절한 맏아들을 대신할 아들을 낳기 위해 출산을 거듭하다 서른셋의 나이로 사망했으니, 슈퍼우먼의 비극인 거죠.
《여자는 존재 자체로 낙인이었어》는 오현세님의 책이에요.
저자는 10여 년간 갑골문을 연구하면서 갑골문을 만든 남자들이 모든 나쁜 개념에 여(女) 자를 낙인으로 사용했음을 알게 되었다고 해요.
이 책은 고대사회에서 여자는 존재 자체가 낙인이었음을 확인시켜주는, 여(女)가 들어간 천여 개의 한자 중 낙인의 증거로 볼 수 있는 백여 개를 추려 각 한자가 지닌 의미를 풀어내고 있어요. 한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인물 창힐에 관한 전설이 기록된 《회남자》를 보면 여자 귀신들이 몰려와 왜 나쁜 뜻의 글자에 여자를 사용한 것이 그리 많으냐고 항의하자 창힐이 사과하며 여자가 들어간 좋은 글자를 만들겠노라 약속했다는 내용이 나온대요. 그렇게 만들어진 글자가 편안할 타(妥), 묘할 묘(妙), 아리따울 교(嬌), 예쁠 주(姝), 예쁠 요(姚) 등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전혀 좋은 뜻이 아니라고 해요. 아름답고 예쁘다는 것은 좋은 의미가 맞지만 여기에 여(女) 자를 붙이면 부정적인 뜻으로 둔갑해버려요.아리따운 여자는 남자를 유혹해 파탄으로 이끄는 사악한 존재이며, 여자의 본성은 질투가 많고 교활하며 간사하다고 온갖 나쁜 것들로 표현했어요. 애초부터 남자들의 머릿속에는 여자를 동등한 인간으로 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더욱 끔찍한 건 남자들이 원하는 미의 기준대로 여자를 세뇌시켰다는 점이에요. 예쁜 여자란 작고 약해야 하고, 허리가 가늘고 단정하며 가꿔야 한다는 것. 그릇할 람(㜮)이라는 한자는 여자 여(女) 옆에 볼 감(監)이 붙어 있어요. 여인이 그릇에 담긴 물에 비친 자기 얼굴을 비쳐보는 그림인데, 여기서 거울이라는 뜻이 생겼대요. 거울을 볼 때마다 몸가짐을 조심하고 예의 있게 분수에 맞는 행동을 하라는 남자의 행동 강령을 넌지시 여자에게 강요하고 있어요. 거울을 안 보는 여자는 없으니, 남자들은 거울에도 낙인을 새긴 거예요.
그릇할 람(㜮)
1. 그릇하다, 잘못하다 / 2. 탐하다 (어떤 것을 가지거나 차지하고 싶어 지나치게 욕심을 내) / 3. 실례하다(말이나 행동이 예의에 벗어나다) / 4.외람하다(하는 행동이나 생각이 분수에 지나치다) / 5. 즐기다 / 6. 희롱하다 (말이나 행동으로 실없이 놀리다) (271p)
갑골문을 통해 한자를 풀이하다 보면 남자들이 얼마나 지독하게 여자의 존재를 부정해왔는가를 확인할 수 있어요. 고대문명부터 현재까지 전쟁은 무차별적인 여성 성착취와 성폭행을 자행하는 악순환의 고리였어요. 야만적인 힘의 논리로 남성은 여성을 도구화했던 거예요. 저자가 이책을 쓴 이유는 오래된 남녀 갈등의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예요. 여자의 존재 자체가 낙인이었던 과거의 잘못된 인식으로 빚어낸 문자들을 통해 어리석음을 깨우치자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여자와 남자라는 이분법이 아닌 한 몸으로 봐야 한다는 것. 세상에 그 누구도 여자의 뱃속에서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던 가요. 어머니, 우리는 모두 그 어머니의 자녀라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