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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 눈을 심어라 - 눈멂의 역사에 관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탐구
M. 리오나 고댕 지음, 오숙은 옮김 / 반비 / 2022년 12월
평점 :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는 없어요.
당연한 소리라고 여기겠지만 그 의미를 정확하게 안다고 말할 순 없겠네요.
왜냐하면 '눈'으로 보는 행위만이 아니라 편견과 무지로 인해 볼 수 없는 모든 것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요즘 시력이 많이 떨어져서 가끔 뿌옇게 시야가 흐려질 때가 있어요. 그럴 때마다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우리는 누구나 살면서 다치거나 아프고, 그 후유증으로 장애를 겪을 수 있어요. 아무도 예외일 순 없어요. 그런데도 장애인 평등권을 외치는 사람들의 지하철 출근길 시위를 향해 민폐라며 무관용 원칙을 떠들어대는 시장을 방관하고 있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나누고, 선을 긋는 행위를 통해 인간 존엄성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봐야 해요. 그래야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수 있어요.
《거기 눈을 심어라》 는 M. 리오나 고댕의 책이에요.
부제는 '눈멂의 역사에 관한 개인적이고 문화적인 탐구'라고 해요. 처음엔 '눈멂'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졌는데, 이 책을 통해 '시각 중심주의'가 만들어낸 '눈멂'의 본질을 제대로 알게 되었어요. 저자는 열 살 무렵, 교실 뒷자리에서 칠판의 글씨가 갑자기 보이지 않았고, 수많은 안과를 순례한 끝에 망막이영양증으로 인한 시각장애를 알리는 변색 부분을 발견했대요. 당시 의사들은 그 상태를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진단했고, 서서히 시력을 잃기 시작하여 열여섯 살 즈음에는 보통 크기의 글자도 읽을 수 없다가 거의 40년이 지난 지금은 앞을 보지 못한대요. 그러나 완전한 실명은 아니고 시야 맨 가장자리에 나타나는 아주 밝은 조명등의 불빛, 강렬한 태양이 보내는 햇살은 얼핏 보인대요.
비시각장애인들이 시각장애인에게 갖는 흔한 오해는 '눈멂' 상태를 어둠이나 암흑일 거라는 여긴다는 거예요. 사실상 시각장애인 중에서 날 때부터 완전히 보지 못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해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자전적 에세이 「눈멂 (Blindness)」 에서 "완전한 어둠 속에서 잠자는 데 익숙한 나로서는 이 안개의 세계에서 자야 한다는 게 오랫동안 괴로웠다. 파르라니 희미하게 빛나는, 또는 푸르스름한 안갯속 세계, 이것이 맹인의 세계이다." (20p)라고 설명했어요. 어둠이나 암흑을 느끼려면 그 반대의 경험이 있어야 하는데, 선천적 시각장애인의 경우는 겪어보지 못한 일을 강요당하는 꼴이에요.
저자는 뉴욕대학교 대학원에서 17세기와 18세기 영문학을 공부하던 즈음 헬렌 켈러의 길고 역동적인 성인기에 흠뻑 빠졌다고 해요. 그래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고, 종신 교수직에 안착하는 대신 켈러에 대한 희곡 한 편 「행복의 별 (The Star of Happiness」을 써서 무대에 올렸대요.
한 여성과 두 목소리가 등장하는 3막극으로, 켈러의 어린 시절에 설리번이 켈러의 손바닥에 W-A-T-E-R 이라고 쓰는 물 펌프 장면을 보여준 뒤 종이 울리며 1막 "끝"이라는 문장이 스크린에 투사되고... 그때 무대 밖의 사악한 목소리가 "정말 아름다운 이야기야."라고 말하면, '나'는 무대로 나가서 활짝 웃으며,"그리고 그건 시작일 뿐이야." 말해요. 사악한 목소리는 "아니, 그게 영화의 끝이야." 대답해요. '나'는 풀이 죽어,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 켈러의 나이는 겨우 일곱 살인걸. 켈러는 여든일곱 살까지 살아."라고 말하면, 사악한 목소리는 "켈러는 귀머거리에 벙어리, 장님인데 말을 전달하는 법을 배웠잖아. 더 이상 뭘 원해?"라며 최후의 일격을 가해요. 스포트라이트가 좁혀오고, '나'는 『내가 사는 세계』에 나오는 인용구를 읊어요. "나는 나에게 허락된 한 가지 작은 주제를 가지고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19p)
저자는 켈러가 20대에 쓴 자서전은 '영감 포르노 (inspiration porn)', 즉 비장애인에게 자신이 가진 것에 감사하고, 장애물을 극복하는 씩씩한 개인의 힘을 믿게 만드는 식의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이야기의 완벽한 예 (17p)라는 것, 성인기의 켈러는 훨씬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거예요. 시각장애인 작가로서 살아온 저자는 예술과 문학,철학, 과학에서 눈멂에 관한 사례를 소개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눈멂 속에 갇혀 있었는지를 알려주고 있어요. 우리 문화 속에 뿌리 깊은 시각 중심적 편견을 발견하면서 충격요법을 통한 가르침을 받은 것 같아요.
이 책은 우리를 편견과 차별이라는 '눈멂' 상태에서 '봄'(sight)로 이끌어주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