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통영이에요, 지금 - 산양유셔벗 & 벚꽃
구효서 지음 / 해냄 / 2023년 3월
평점 :
한때 손편지 좀 써봤던, 하늘에서 별을 따다 만든 오란씨를 기억하는 세대라면 공감할 만한 이야기.
누군가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경험이 있다면 뭉클해질 이야기.
어쩌면 슴슴할 수도 있는 이야기.
간절히 기억될 이야기.
"얄궂네."
이로씨는 웃었다.
그래, 이곳은 매사가 이런 식이지.
울음의 빛 때문에 더 그럴싸해지는 풍경이라니.
이순신이 왜적을 물리친 곳인데도 사쿠라가 이토록 못내 눈부시다니.
봄날의 그런 오후가 가고 있었다. (239p)
《통영이에요, 지금》은 구효서 작가님의 신작 장편소설이에요.
벚꽃 피는 계절이 왔어요. 화사한 봄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벚꽃은 사쿠라, 일본이 떠올라서 좀 그래요.
다들 벚꽃 흩날리는 거리를 거닐며 즐거워하는데, 꽃이 무슨 잘못이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영 거북한 기분은 어쩔 수가 없네요.
엄혹한 시절, 과거 70~80년대를 살았던 이들 중에는 '감쪽같이' 사라진 경우가 있었다고 해요. 도대체 어떤 시절이기에, 그런 궁금증이 생길 거예요. 물론 이 소설에서는 시시콜콜 그때 그 시절을 설명하고 있진 않지만 대략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있어요.
소설은 통영에 쉬러 온 소설가 이로 씨의 편지로 시작되고 있어요. 이로 씨는 형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카페 Tolo 와 카페 주인인 그녀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어요. 그녀에게 반했냐고요? 첫눈에 반할 나이는 아니고, 이로 씨와 비슷한 연배의 그녀에게서 혈육의 정 같은 애틋함을 느꼈다는 거예요. "같은 시절을 살아와서 그럴까. 함께 겪은 시절이 우리들 어딘가에 냄새처럼 배어 있다가 같은 계절을 지나온 사람에게 문득 맡아지는 것." (13-14p)라고 했는데, 그 냄새라는 표현이 확 와닿더라고요. 이로 씨가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김재원, 원래 동갑내기인데 첫 만남부터 서로를 "형"이라고 불렀고, 자연스럽게 그 호칭이 굳어져버렸대요. 성 씨에 형을 붙여서, 이 형 혹은 김 형 이라고 부르는 게 맞지만 그냥 "형"이라고 부르는 친구라서 더 특별하게 느끼는 것 같아요. 암튼 소설가인 이로 씨는 작품 활동을 쉬기 위해서 통영에 왔으면서 직업병인지 자신의 일상을 편지로 적고 있어요. 일기를 쓰듯이 차곡차곡, 다 쓴 편지는 주소가 적힌 봉투에 넣어두고 말이죠. 아참, 편지 속에는 원고 이야기를 언급하고 있어요. 바로 그 원고 내용이 소설의 중요한 맥락을 끌어가고 있어요. 뭔가 신기하게 끌리는 카페 주인과 원고 그리고 이로 씨의 편지까지, 세 갈래로 나눈 뒤 하나의 매듭을 엮어가듯 전개되고 있어요. 약간은 슴슴했던 맛이 점점 깊은 감칠맛으로 변해가는 느낌이랄까요.
저자는 소설가 이로 씨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어요. 꽃처럼 피었던 청춘, 뜨거운 사랑에 관하여... 솔직히 봄을 위한 꽃이 벚꽃 말고 다른 꽃이었다면 좋았겠지만 일본이 남긴 사쿠라, 그 흔적마저도 우리의 아픈 역사로 기억하라는 의미인 것 같아요. 벚꽃이 참 좋다는데, 마음은 헛헛하고 슬퍼지네요. 전부 이로 씨 탓이에요.
"무얼 감당하든, 감당한다는 그 말을 생각하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 생각도 하지 않게 되었고요.
감당할 수 있다거나 없다거나 그걸 따지는 내가 알량해 보였죠.
알량했지만 실은 거만한 거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내가 뭔데 하니 마니 겁나느니 도망치느니 했을까.
내 속에는 여전히 나라는 속물이 웅크리고 앉아 요망을 떨고 있었던 거죠." (144p)
Tolo의 그녀 원고를 읽다가 이로 씨는 어째서 김재원의 영월을 떠올렸던가.
아무래도 자기 자신보다 스승의 전각 작품을 우선하는 김재원의 말과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녀의 원고에 등장하는 김상헌과 주은후도 박희린에 대해 그러하지 않았던가.
박희린을 슬프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상헌과 은후.
자신들의 불행이 희린의 불행으로 이어지므로
불행할 자격조차 없다고 말하는 두 남자.
희린을 위해 상대를 존중하겠다고 고백하는 장면. (145-146p)
형에게
오늘도 형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면서 부치지는 못하고 있네요.
이곳에는 꽤 유명한 우체국이 있어요.
유치환이 이영도에게 수백 통의 사연을 보냈다는 곳이요.
그 둘이 어떤 사이였는지는 형도 잘 알겠죠.
빨간 우체통 옆 화강암에 청마의 시가 새겨져 있어요.
'오늘도 나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우리 나이라면 모를 사람이 없는 시행이죠.
형에게 쓰는 편지가 이렇게 한 장 한 장 쌓이기만 하고
부치지 못하고 있지만 벚꽃이 피면 다 보낼게요.
에메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에서요.
이곳 벚꽃이 참 좋다네요. (148p)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