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의 시대 (양장) 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4
이디스 워튼 지음, 신승미 옮김 / 앤의서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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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순수함으로 포장된 위선과 가식의 시대를 보여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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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양장) 앤의서재 여성작가 클래식 4
이디스 워튼 지음, 신승미 옮김 / 앤의서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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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읽게 됐어요. 꼭 읽어봐야지, 찜해 둔 작품이었어요.

이디스 워튼 작가님의 《순수의 시대》는 1920년에 발표된 소설로, 이듬해인 1921년 소설 부문 퓰리처상 수상작이에요.

여성 최초로 풀리처상을 수상하면서 미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위대한 소설가로 꼽히고 있어요.

어떤 작품인가, 제 느낌을 말하자면 '나쁜 건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거예요.

여성과 남성의 지위, 보수적이고 엄격한 관습, 거짓 가면들... 표면적인 모습들은 변했을지 몰라도 위선과 가식은 놀라우리만치 그대로라는 것.

우연히 보게 된 드라마 <브리저튼>의 여운 때문인지 소설을 읽는 내내 장면들이 겹쳐져서 떠올랐어요. '브리저튼'은 180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브리저튼 자작 가문의 8남매를 주인공으로 다룬 로맨스 드라마인데, 종전 시대극과는 달리 여왕 샬롯과 몇몇 귀족이 흑인으로 묘사된 점은 이색적이지만 상류층 여성들이 오직 결혼과 출산에만 매달리고, 온갖 소문으로 가문의 명성이 좌지우지되는 폐쇄된 사회를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고구마 백 개를 먹은 느낌이에요. 사교계에 데뷔한 여성은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는 예쁜 드레스를 맞추고 인형마냥 미소 짓는 일뿐이고, 책을 읽는 것도 남자들의 취향에 맞추기 위한 수단에 머물고 있어요. 흑인 여왕이 통치하는 철저한 계급 사회 속에 제일 아래칸은 여성이라니, 굉장히 아이러니한 거죠. 진정한 사랑을 만난 여주인공의 서사는 본인의 용기라기보다는 우연한 행운에 가깝다는 점에서 완전 판타지였어요.

《순수의 시대》는 1870년대 초 뉴욕 사교계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요.

이 소설은 남편을 떠나 유럽에서 귀국한 엘런이 뉴욕 오페라 하우스 박스석에 나타나면서 시작되고 있어요. 엘런의 등장은 뉴욕 사교계에 커다란 파문과 갈등을 일으키는데... 젊고 매력적인 변호사인 뉴랜드 아처는 엘런의 사촌인 메이 웰렌드와 약혼한 사이여서 그녀를 돕게 되고, 그녀의 거침없는 솔직함과 자유분방함, 신비하고 이국적인 면들에 매료되고 말아요. 뉴랜드는 앨런을 만나면서 결혼을 약속한 메이가 관습에 길들여진, 아니 강요된 순수의 결정체임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관습의 굴레에 매여 있음을 자각하게 돼요. 메이의 순수함이란 상상하지 못하게 정신을 밀봉하고 경험하지 못하게 마음을 밀폐하는, 지독한 족쇄로 만들어낸 순종과 같은 의미였던 거죠. 아무것도 모르는 메이 웰랜드는 아처에게 '앨런에게 친절하게 대해달라'는 부탁을 하죠. 앨런 올렌스카, 마담 올렌스카는 누가 봐도 외롭고 불행한 상황이니까, 메이의 입장에서는 사촌 언니를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 여긴 거예요. 근데 아름다운 마담 올렌스카에게 관심을 둔 남자가 아처 말고도 더 있을 줄이야.

그동안 자신이 속한 세상의 일부로서 안락함을 누리던 뉴랜드 아처에게 닥친 변화는 그를 거세게 흔들어놓지만 현실을 뒤집을 만큼은 아니라는 것, 그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 핵심인 것 같아요. 아참, 간과해서는 안 될 두 사람이 있네요. 메이와 앨런.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아무도 행복할 수 없는 상황이 안타까워요. 그들을 바라보며, 앨런이 아처에게 했던 말을 해주고 싶어요. "부디... 불행하지 말아요." (337p)

우리는 이미 알고 있어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뉴랜드 아처가 놓쳐버린 삶의 꽃은 그저 향기로 기억될 뿐이라고요. 그러나 아처는 아들 댈러스를 보며 새로운 새대에 속했다고 생각해요. 다를까요? 지금이라면?




"세련이라니! 여기선 모두 그걸 아주 중요하게 여기나봐요?

자기 방식대로 세련되면 안 되나요? 하지만 내가 너무 독립적으로 살아왔네 보네요.

어쨌든 나도 여기 사람들이 하는 대로 다 하고 싶어요. 보살핌을 받으며 안전하다고 느끼고 싶어요."

그는 전날 밤에 그녀가 가르침이 필요하다고 말했을 때처럼 감동을 받았다.

"당신 친구들도 당신이 그렇게 느끼기를 바랍니다. 뉴욕은 지독히 안전한 곳이에요."

그가 슬쩍 비꼬는 투로 덧붙였다.

"네, 그렇죠? 느껴져요." 그녀가 조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외쳤다.

"여기 있는 건... 뭐랄까... 착하게 굴고 숙제도 다 끝낸 소녀가 하루 놀아도 된다고 허락받은 것 같아요." (105p)

"... 여기서는 아무도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나요, 아처 씨?

진짜 외로운 건 가식적으로 행동하라고만 요구하는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거예요!" (110p)


"잔인한 것 같아요." 그녀가 말했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이 작은 물건들처럼... 중요하지 않아진다는 게요.

잊힌 사람들에게 필요하고 중요한 물건이었는데 이제는 돋보기로 보며 짐작해야 하고

'용도 미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잖아요."

"그래요. 하지만 한편으로..."

"아, 한편으로..."

"한편으로 당신과 관련된 것은... 모두 중요해요." 그가 말했다. (424p)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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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다 보면 웅진 모두의 그림책 49
김지안 지음 / 웅진주니어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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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 모두의 그림책 시리즈 마흔아홉 번째 책이 나왔어요.

아이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함께 읽는 그림책, 아니 어른들이 더 많이 읽어야 할 그림책인 것 같아요.

책 읽을 시간도 없이 바쁘다는 어른들에게 건네주고 싶은 책이에요. 시끄러운 말, 빽빽한 글 대신에 그림으로 전하는 마음이 보이거든요.

《달리다 보면》 은 김지안 작가님의 그림책이에요.

부제는 "오늘따라 더 피곤한 뚜고 씨의 출근길"이에요. 뚜고 씨는 오늘도 반쯤 감긴 눈으로 집을 나섰네요. 주차장에는 뚜고 씨의 노란색 자동차가 세워져 있어요. 삑! 부르릉~ 출발!!! 하늘은 맑고 상쾌해요. 근데 뚜고 씨와는 아무 상관이 없네요. 왜냐고요? 도로 위에는 수많은 차들로 꽉 막혀 있으니까요. 빵빵~ 어쩐 일인지 차들이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여요. 답답해진 뚜고 씨는 라디오를 켰고, "1분 교통 정보입니다. OO대교에서 발생한 접촉 사고로 극심한 정체가 계속되고 있습니다."라는 방송이 나오는 거예요. "에휴~ 안 되겠어. 다른 길로 가자." 뚜고 씨는 내비게이션으로 다른 길을 검색하네요. "띠롱~ 새로운 경로로 안내합니다." 막힌 도로를 벗어나 샛길로 빠지네요. 음, 근데 이상해요. 길을 잘못 든 건지 낯선 길이에요. 거기다가 내비게이션까지 먹통이 된 거예요. 자, 지금부터 진짜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뚜고 씨의 노란색 자동차는 계속 달리고 있어요.

뭘까,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궁금하면서도 설레는 기분이에요.

뚜고 씨와 함께 쭈욱 그냥 달리다 보면... 아주 서서히 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어요. 그리고 아하, 이거구나 싶은 생각이 들거예요. 물론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예쁜 그림을 보면서 화가 나진 않겠죠? 처음엔 운전을 하고 있는 동그란 눈의 뚜고 씨가 무척 피곤해 보이는 데다가 교통 사고로 막힌 도로 때문에 불쾌지수가 마구 올라갔던 건 사실이에요.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매일 아침마다 겪고 있는 출근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예요.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전철 안이나 교통 정체로 느릿느릿 기어가는 차 안에 있다면 최대한 깊게 숨을 쉬면서 조급해진 마음을 진정시킬 필요가 있어요. 본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면 스스로 괴롭히기 보다는 잠시 멈추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부정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말고 차분하게 자신의 감정을 바라보는 거예요. 토닥토닥, 괜찮아 질 거라고 누구보다 자신을 달래줘야 할 사람은 '나'라는 걸 잊으면 안 돼요.

뚜고 씨의 출근길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그 덕분에 즐거웠어요. 달리다 보면, 언젠가 우리도 만날 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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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史記 100문 100답
김영수 지음 / 창해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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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배운 역사 지식은 단편적인 경우가 많아요.

사마천의 《사기》도 교과서에는 몇 줄의 설명뿐이지만 궁형으로 살아남아 일생의 업인 역사서를 남겼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던 기억이 나네요.

사형을 면하기 위해 궁형을 자청했다는 것은 그 시대에는 굉장히 치욕스러운 선택인데 사마천은 인간적인 굴욕을 감수하면서도 시대의 책무를 기꺼이 짊어졌다는 점에서 위대하다고 볼 수 있어요. 딱 여기까지 아는 내용이고 실제 《사기》가 어떤 역사서인지는 찾아본 적이 없다는 걸 이 책을 마주하고서야 자각했네요.

《사마천 사기 100문 100답》 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사기》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는 책이에요.

저자는 지난 30여 년 동안 사마천과 《사기》, 그리고 중국 역사를 연구하며 현장을 지속적으로 답사해온 당대 최고의 전문가라고 해요.

전문가 입장에서는 하나라도 더 자세히, 깊이 있는 내용을 전해주고 싶고, 독자 입장에서는 좀더 쉽게 이해하길 바라므로 둘 다를 총족시키는 '백문백답'의 책이 완성되었다고 하네요. 확실히 묻고 답하는 방식이라서 뭔가 더 흥미롭고 재미있게 몰입했던 것 같아요.

이 책은 크게 세 부로 이루어져 있는데, 1부는 사기가 어떤 책일까?, 2부는 사마천은 누구인가?, 3부는 사마천이 잠들어 있는 한성시는 어떤 곳인지를 다루고 있어요. 질문부터 궁금증을 유발하는 데다가 답변을 통해 알게 된 내용 자체가 흥미를 자극하여 점점 빠져들게 되더라고요.

우선 《사기》는 5천 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본격적인 역사서이며, 모두 130권에 526,500자로 이루어진 3천 년 통사라고 해요.

관청(정부기간)에서 편찬을 주관한 역사서를 관찬 사서라고 하는데, 《사기》는 관찬 사서가 아니라 사찬 사서, 즉 아버지지 사마담과 아들 사마천이 2대에 걸쳐서 사마 집안과 사마천 개인이 편찬한 역사서라는 거예요.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사마천을 역사학의 성인이라는 뜻의 '사성(史聖)이라 부른대요.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에 태어났고, 그가 살았던 나라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번영을 누렸던 한(漢)이며, 한나라는 역사서에서는 서한(西漢)이라 칭한대요. 《사기》의 서술 체제는 기전체로 되어 있는데, 중국 정사들은 예외 없이 기전체로 서술되므로 《사기》를 정사의 맨 앞에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거래요. 기전체라는 건 본기(제왕), 표(연표), 서(제도, 문화), 세가(제후), 열전(인물)으로 된 구성을 의미해요. 《사기》는 130권 중 70권이 열전인데 인물들이 왕자, 귀족뿐 아니라 상인, 코미디언 등 다양하며 외국에 대한 기록도 있고, 흉노를 비롯한 중국 변방에 소수민족에 대한 기록도 포함했다니 역사가의 시각이 남다름을 보여주네요. 무엇보다도 눈을 번쩍 뜨게 만든 건 <조선열전>이 《사기》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에요. 권115 에 고조선 멸망사 기록이 나와 있다는 거예요. 고조선은 기원전 108년 멸망했는데 이 내용이 《사기》에 있다는 건 한국 고대사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어요. 왜 <조선열전>이 중요한지를 알고 싶다면 유튜브 <김영수의 좀 알자, 중국 : 특별영상 《사기》와 <조선열전> >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사마천은 55년을 살았고, 47세 이후의 후반 10년은 지옥과 다름없었는데 바로 그 지옥 속에서 위대한 유산을 인류에게 남겼어요.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는다.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 어떤 죽음은 새털보다 가볍다.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292p) 라는 사마천의 말이 깊은 울림을 주네요. 저자는 사마천 고향인 한성시를 방문해 서촌 마을의 촌장님을 만났는데 그 분이 자신을 사마촌 18대손이라고 소개했대요. 근데 촌장님의 이름은 '동영영'으로 성이 사마가 아닌 '동'이 된 이유는 사마천이 한 무제의 심기를 또 건드려 처형되는 바람에 후손들이 고향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와서 성을 바꾸게 된 거래요. 촌장님이 안내한 곳은 한백옥이라는 돌로 만든 패방인데, 패방이란 신성한 구역의 입구에 세우는 문으로 정면에 '법왕행궁'이라는 네 글자 새겨져 있대요. 촌장님은 청나라의 유적이라서 글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어야 한다면서 '궁행왕법'이 된다고 했대요. 이 네 글자에 숨겨진 의미를 알고나면 깜짝 놀랄 거예요. 누가 이 패방을 세웠는지는 모르나 기막히고 절묘한 표현에 무릎을 쳤네요. 사마천과 그가 남긴 《사기》의 진가를 알려주는 책 덕분에 심도 있는 역사 탐방을 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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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거란전쟁
길승수 지음 / 들녘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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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고려거란전쟁만을 떼어 내어 본격적으로 탐구한 책은 처음인 것 같아요.

《고려거란전쟁》은 길승수 작가님의 역사 스토리텔링북이에요.

저자는 고려와 거란의 오랜 전쟁에 대한 진실을 알리고자 이 책을 썼다고 해요. 역사적 팩트를 담은 책이라고 하면 어렵고 딱딱하게 여길 수 있는데, 그러한 선입견을 깨고자 다양한 삽화와 사진 자료,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되 현대적인 언어로 가공한 대사를 삽입했고, 무려 14년이라는 시간과 공을 들여 이 책을 완성했다고 하네요. 확실히 색다른 장르의 역사교양서인 것 같아요. 주요 장면들마다 그림과 함께 실감나는 대사가 있어서 역사 드라마를 보는 듯한 재미가 있어요.

고려거란전쟁은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까지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일련의 전쟁을 말하는데, 워낙 횟수가 많아서 크게 세 번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어요. 1차 전쟁은 993년(성종 12년), 2차 전쟁은 1010년(현종 원년), 3차 전쟁은 1018년(현종 9년)이에요. 원래 고려와 거란은 간헐적으로 사신이 오갔는데 거란이 우호를 맺어온 발해를 배반하여 멸망시킨 뒤로 왕건은 단교를 선언했어요. 그러자 거란이 태세를 전환하여 사신단과 낙타를 보냈는데 왕건은 거란의 사신단을 섬에 유배 보내고 낙타는 만부교 아래 매어두어 굶어 죽게 함으로써 거란을 적대하겠다는 뜻을 만방에 선포했어요. 왕건은 고려를 세운 지 26년, 나이 67세에 눈을 감았고 후손들에게 훈요 10조를 남겼어요. 고려 성종은 태조 왕건의 손자로 고려의 여섯 번째 왕이고, 현종은 여덟 번째 왕이에요.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들이 쭉 나열되어 있다면 아무래도 흥미를 느끼긴 힘들었을 거예요. 하지만 탁월한 스토리텔링 기법으로 술술 읽을 수 있었네요. 새삼 이 책을 읽다보니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기나긴 전쟁에서 우리가 잘못 알거나 모르는 것들이 있다는 걸 배우게 됐네요.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외교의 중요성을 절감하는 시점이라 서희와 같은 존재가 간절하네요.

거란에 군영에서 서희와 소손녕이 인사를 나누는 장면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와요.

소소녕 : "그대의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다.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도 그대들이 침범하고 있다. 또한 우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에 사대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일 땅을 떼어 바치고 조공을 잘한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서희 : "그렇지 않다. 우리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난 나라다. 그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 문제를 두고 말한다면, 거란의 동경도 모조리 우리 땅인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서희의 말에 소손녕은 할 말을 잃었다. 고구려와 고려는 혼용해서 사용하는 같은 국호였고, 평양을 서경으로 칭하며 수도의 기능을 부여한 것도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거란의 동경은 원래 고구려의 요동성이었다. 거란은 요동성을 점령하고 '동쪽 지역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부여하여 '동경'이라고 칭했던 것이다.)

서희 : "게다가 압록강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족이 그 땅을 훔쳐 살며 길을 막고 있다. 그러니 거란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 송나라로 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공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족 때문이다.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준다면 어찌 감히 조공을 잘 하지 않겠는가?" (87-88p)

대사를 추가했을 뿐인데 완전히 다른 느낌의 책이 된 것 같아요. 한국사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인 것 같아요. 무엇보다도 올해 11월 방송 예정인 KBS 대하 드라마 '고려거란전쟁(가제)'의 원작자인 길승수 작가님의 책이라서 흥미롭게 읽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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