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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친절한 거짓말 - 총리가 된 하녀의 특별한 선택
제럴딘 매코크런 지음, 오현주 옮김 / 빚은책들 / 2023년 9월
평점 :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만큼 주어진 역할이 중요하다는 뜻일 텐데 이 소설을 읽으면서 그 자리가 빛날 수 있는 건 역시 사람의 몫이구나 싶었어요.
깜냥도 안 되는 사람에게 막중한 자리를 주는 건 대단히 위험한 일이자 비극이 될 수 있어요. 반면 조금 부족하더라도 모두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책임을 다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하는 것 같아요. 두 경우에 드러나는 확연한 차이는 진심이 어디에 있느냐인 것 같아요. 사익 추구형이냐, 아니면 공익 추구형이냐. 그 사람의 판단과 선택으로 위기 상황을 극복했다면 다수에게 옳은 일을 한 거예요.
《너무 친절한 거짓말》은 제럴딘 매코크런의 소설이에요.
하루아침에 총리가 된 하녀 글로리아의 이야기예요. 쉰 살이 넘은 여성과 열다섯 살 소녀, 어떻게 하녀는 총리가 되었을까요.
이 소설은 1928년 가상의 세계 아팔리아, 거대한 성곽 도시 프래스토에서 가장 높은 언덕 꼭대기에 있는 저택에서 시작되고 있어요. 이 저택에는 최고 통치자인 총리가 살고 있어요. 총리는 작은 체구의 여성으로 늘 사람을 만날 때마다 베일로 싸인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망사 장갑을 끼고 있어서 여러 해 동안 총리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어요. 베일 아래로 보이는 새빨간 립스틱과 가늘고 날카로운 목소리 그리고 반려견들이 총리의 존재를 확인하는 특징이에요. 물론 총리의 남편 티모르는 아내의 얼굴을 알겠지만 제대로 눈이나 마주칠까 싶을 정도로 이들 부부의 관계는 평범하지 않아요.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글로리아는 북쪽 지역 소우밀즈라는 시골 출신으로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데, 깐깐하고 무서운 총리에게 트집을 잡혀 제대로 임금을 못 받고 있어요. 그나마 글로리아가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상대는 하얀 개 데이지예요. 총리가 늘 안고 있는 작은 개 보즈 때문에 관심 밖으로 밀려난 데이지를 글로리아가 돌봐주고 있어요.
두 달 동안 내린 비로 퍼르카강이 범람하여 저지대는 이미 물에 잠겼다는 소문이 퍼졌고, 언론사 <더 보이스>에서는 호우 소식을 전하고 있어요. 프래스토에서 일어난 사상 초유의 홍수 위기를 해결하고자 상원의원 회의가 총리 저택에서 열렸어요. 프래스토의 성벽과 문을 닫을 것이냐 말 것이냐, 성문 안과 밖의 사람들은 모두 불안에 떨고 있어요.
"강 수위가 얼마나 올라왔는지 아십니까, 총리님? 총리님은 그저 성문 안에서 어렴풋이 보고 계실 뿐이지요!
북부로 가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그대로 가게 두어야 할까요? 그러니까, 그들이 이대로 북부에 가도 안전하겠느냔 말입니다."
총리가 재채기인지 코웃음인지 모를 묘한 소리를 냈다.
"돈을 갖다 버리고 있는 건 그 사람들이지요. 똑똑한 자들이었다면 더 안전한 이곳에 머물렀겠죠."
"어쨌든 그래도 그들이 이동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이곳의 노동 인력인 그들이 가족을 만난답시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16p)
이 장면에서 총리가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할 수 있어요. 아팔리아 대홍수라는 엄청난 위기 속에서 총리의 능력치가 드러났다고 볼 수 있어요. 정말 묘하게도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됐어요. 기록적인 폭우로 지하차도가 침수되어 사망자가 발생했던 사건, 사흘간 물폭탄이 쏟아져 제방이 무너졌고 강물이 순식간에 지하차도 일대를 범람했어요. 홍수 경보가 내려질 정도로 비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에서 차량 통제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명 피해가 발생했어요. 비슷한 시기에 해병대원들이 구명조끼 착용없이 실종자 수색을 나갔다가 급류에 휩쓸려 사망했어요. 자연재해는 어쩔 수 없지만 적어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데 왜 하지 않았을까요. 리더는 누구나 될 수 있지만 아무나 리더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걸, 위기를 겪으면서 깨닫게 되네요. 어려움과 위기를 맞이했을 때 이를 극복하는 사람이 진정한 리더라고 할 수 있어요. 만약 리더가 스스로 위기를 자초했다면 그런 리더는 리더 자리를 내놓아야 해요. 글로리아는 총리의 남편 티모르의 명령으로 총리 흉내를 냈지만 진심으로 사람들을 걱정하고 해결책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누가 진짜 리더의 자격이 있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이 소설에서 기막힌 설정은 언론사 <더 보이스> 신문 내용을 그대로 게재한 거예요. 뉴스의 목적, 그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 데다가 숨겨둔 암호까지 더해져서 반전을 주네요. 가상의 세계로 보는 현실 정치의 축소판, 대단히 흥미롭고 교훈적이었네요.
"글로리아는 거울 속의 자신을 들여다보며
어두운 빨간 립스틱을 거울 속 입술에 그려보았다.
벽에 낙서하는 기분이었다. 바로 앞의 여자는 자신이 아니었다.
그 여자는 프래스토 사람들이 선출한 한 나라의 우두머리였다.
국민은 여자를 권력자로 선출하여 이렇게 큰 집에 살게 했고
애피스와 리무진을, 공짜 음식을,
벽난로 위에 있는 누드 조각상을 선사해준 것이다." (237p)
"당신의 투표권, 현명하게 사용하자!
프래스토시의 미래는
당신 손에 달려 있다!" (288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