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단어들의 지도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원의 지적 여정
데버라 워런 지음, 홍한결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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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어가 생명체처럼 진화한다?

이론적으로 그럴 수 있겠지라고 짐작하는 것과 실제로 그 과정을 목격하는 건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나네요.

재미있는 건 진화 속 돌연변이에 초점을 뒀다는 거예요. 뜬금없이 이상하게 바뀌는 경우들은 다 돌연변이 때문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수상한 단어들의 지도> (Strange to Say)인 거예요. 신기하게도 이상하면 이상할수록 묘하게 더 끌리더라고요. 만약 영어의 어원을 공부해보자고 했다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을 텐데, 저자는 어원 이야기를 의도나 목적 없이, 앞 못 보는 아메바처럼 이리저리 되는 대로 나아가보자고 이야기하니 궁금할 수밖에요. 이 책은 발 없는 말을 따라 정처 없이 떠나는 여정이에요. 아참, travel 이 '이동, 여행'이라는 뜻을 갖게 된 건 14세기경으로, 원래는 프랑스어 travail (일, 고생)과 똑같은 뜻이었고, 그 어원인 라틴어 tripalium 은 말뚝 세 개로 만든 '고문 기구'였대요. palus 가 '말뚝'인데 영어 단어 palisade (말뚝 울타리)과 beyond the pale (도를 넘은)이라는 표현도 거기에서 유래했대요. 그러니 여행이 고문까지는 아니더라도 집 울타리를 넘어 바깥 세상으로 나아가는 탐험 내지 모험으로 보면 될 것 같아요. '여행'이라는 단어로 시작해서 어디로 가는지 따라가다 보면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와 헤르메스, 구약의 판관기에 야엘과 가나안 장수 시스라, 셰익스피어 비극의 맥베스 등등 여기저기 예기치 못한 인물들과 이야기에 빠져들고 마네요. 당당하게 옆길로 빠져도 되는 어원 이야기라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인 것 같아요. 책을 읽는 방법도 처음부터 쭉 읽는 게 아니라 어디든지 마음대로 내키는대로 펼쳐보면 돼요. 단어들의 끝없는 여정을 우리는 잠깐 구경하는 거라고,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면 되는 거예요. 아일랜드에서 기원한 유랑 민족이 있는데, 영국과 아일랜드에서는 그냥 'Travellers (유랑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대요. 이들은 대부분 영어를 쓰지만 아일랜드 유랑민 은어라고 하는 영어와 셸타어를 섞어 사용했대요. 여행자들은 냄비와 솥을 잘 고치고 다녀서 tinker (땜장이)라고도 불렀대요. Traveller 와 fellow-traveler 가 전혀 다르다는 걸 아시나요? fellow-traveler (동조자)는 공산당원은 아니지만 공산주의에 동조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래요. 유랑민과 프롤레타리아 계급 이야기는 mobile (쉽게 움직이는) 이야기로 넘어가는데, 휴대전화를 미국에선 cell 이라고 부르지만 영국에서는 mobile 이라고 부른대요. 참고로 미국 앨라배마주의 도시 모빌 Mobile 은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이름에서 따온 거래요. '아하, 이 단어에 이런 뜻이 있었구나!'라는 지적인 탐구뿐 아니라 '뭐지?'라는 생뚱맞은 발견이 주는 웃음이 있네요. 언어 덕후는 아니지만 이 책 덕분에 언어의 매력 속으로 한걸음 다가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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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견디는 힘, 루쉰 인문학 - 어둠과 절망을 이기는 희망의 인문학 강의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18
이욱연 지음 / 21세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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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이란 원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었다.

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 「고향」, 『외침』 (96p)


《시대를 견디는 힘, 루쉰 인문학》은 인생명강 시리즈 열여덟 번째 책이에요.

저자인 이욱연 교수는 중국문화 전문가로서 루쉰과 그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고 있어요.

우선 루쉰은 누구일까요. 중국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인데 중국에서는 작가 외에도 사상가, 혁명가로도 불리고 있어요. 그만큼 사상적으로도 근대 중국이라는 시대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에요. 원래 루쉰은 일본에 유학하여 의사가 되고자 했으나 환등기 사건을 계기로 의학을 버리고 문학의 길을 걷게 돼요.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중국인의 병든 정신을 고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거예요. 여러 차례 정권이 바뀌고 정치 지도자가 바뀌어도 혼란이 거듭되는 이유는 사람들의 생각과 습관이 집단적으로 표현되는 문화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니 문화와 사람의 변화가 진정한 개혁이라고 본 거예요. 루쉰은 작가이자 지식인으로서 다양한 글을 통해 중국의 현실을 비판하고 바꾸기 위한 노력을 했는데, 동시대에 우리나라도 일제강점기였기에 이육사나 김광균과 같은 지식인과 청년들이 루쉰의 글과 사상에 공감하며 영감과 힘을 얻었다고 해요. 해방 이후에도 독재로 이어진 어두운 시대여서 청년과 지식인은 루쉰의 글과 사상에서 어둠과 절망을 견디는 힘을 발견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예요.

이 책은 루쉰의 글과 그의 글이 담긴 사상에서 우리 사회의 모습과 마음을 들여다보며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지 이야기하고 있어요. 사람을 바로 세우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나다움을 찾는 것이며, 루쉰이 말하는 나다움의 조건은 나만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했어요. 자신만의 생각이 있어야 주체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행동하며 그럴 때 나다움이 생긴다고는 거예요. 이는 생각과 행동을 할 때 다른 사람을 중심으로 두지 말고 자기 생각과 판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무리 속에 살아야 하는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낄 때는 집단에서 배척당하는 일인데 그 공포 때문에 다수에 맞춰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를 잃어버린다면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므로 비극이라는 거예요. 루쉰이 말하는 나다움을 찾는 과정은 대표작 중 하나인 「광인일기」 (1918)에서 잘 나타나는데, 주인공은 미친 사람이 아니라 동네 사람들에게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고 있어요. 주인공처럼 무엇이 옳은지를 깊이 고민하고 질문하는 사람이 많아질 때, 나다움을 찾는 사람이 많을 때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한다고 루쉰은 말하네요. 「아Q정전」에 나오는 주인공 아Q는 권력을 힘이라고 생각하는 대표적인 인물인데, 루쉰은 중국인의 고질적인 사고방식을 비판하기 위해 아Q라는 인물을 창조했다고 해요. 어진 마음과 균형의 의미를 생각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권한으로만 권력을 이해하는 권력자는 아Q 같은 권력자이며 사회를 병들게 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세상이 어둡고 병들었다면 루쉰이 강조했듯이 사람이 바뀌어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어요. 저자가 왜 지금, 우리에게 루쉰을 이야기하느냐, 그건 책 속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어요.



루쉰은 1921년에 「아Q정전」을 신문에 연재합니다. 그때 신문에 연재되던 소설을 보고, 당시 중국인들이 이렇게 쑥덕거렸다고 합니다.

"그 소설 읽어봤어? 꼭 내 얘기 같아. 나를 잘 아는 사람이 내 얘기 쓴 거 같아." 중국 사람들이 서로 자기 이야기를 쓴 거 같다고 말할 정도로 아Q가 중국인을 닮았던 겁니다. 그러니까 아Q의 정신승리법은 중국인의 사고방식의 특징과 중국 민족성을 상징합니다. ... 루쉰은 중국이 변하기 위해서는 아Q와 같은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중국인을 비판하기 위해서 아Q라는 인물을 창조했습니다. ... 동네 사람들에게 맞고 놀림을 당하고 패배하지만, 정신에서는 자신이 패배하지 않았다고 여기면서, 갖가지 방법으로 합리화하는 중국인의 사고방식을 고쳐야 중국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 패배에서 배우지 않으면 패배는 반복되고, 결국 더 큰 패배로 비극적 종말을 맞을 수 있습니다. 정신승리법의 대가 아Q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삶의 메시지입니다. 우리 사회에 정신승리라는 말이 유행하는 건, 우리 사회에 그만큼 힘들고, 실패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말합니다. 정신승리라는 말이 유행하는 사회는 병든 사회에 가깝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신승리라는 말조차 더 이상 필요 없는 건강한 사회가 되길 희망합니다. (79-8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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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아팠다 - 위인들의 질환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나
이찬휘.허두영.강지희 지음 / 들녘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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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이에요.

그래서 이 책의 저자들은 이렇게 말하네요. 어디가 아픈지 알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아팠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앓은 질환에 돋보기를 갖다 댄 책이에요.

책 표지에는 '위인들의 질환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었나'라고 적혀 있는데, 소개된 인물들을 보면 위인도 있지만 유명 연예인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요. 처음 등장하는 인물이 마이클 잭슨, 그 다음이 장국영이에요. 두 사람은 대중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슈퍼스타라서 그들이 어떤 삶과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익히 알려진 내용이지만 이 책에서는 그들이 앓은 질환과 고통의 시간에 초점을 두고 있어서 색다른 것 같아요. 만약 한 인물의 삶과 죽음을 다룬 내용이었다면 일반적인 위인전이 되었을 텐데, 이 책에서는 수많은 인물들의 다양한 질환과 삶 그리고 죽음을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신기하고 놀라운 세계토픽을 보는 느낌이에요. 요즘 유행하는,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잡학사전 같은 구성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아요.

"아프냐, 나도 아프다."라는 드라마 명대사처럼 위인들이 어떤 질환으로 아팠고, 그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보면서 숙연해졌네요. 위대한 업적과 화려한 성공 뒤에는 남모를 고통과 어려움이 있었다는 사실, 새삼스럽지만 그 부분을 놓치고 있었던 거죠.

초인 사상의 창시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말년에 정신착란을 보인 건 매독이 아니라 뇌종양 때문이라고 해요. 많은 니체 비평가들이 매독감염설을 주장한 배경에는 니체의 초인사상이 나치의 정신적 좌표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추정과 이를 폄하하려는 의도였다는 거예요. 니체를 돌보던 누이가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였고, 오빠의 글을 짜깁기 해서 파시스트 입맛에 맞춰 책을 출간한 것이 대중들에겐 니체를 히틀러와 연결짓는 오해를 낳은 거래요. 어릴 때부터 지독한 근시였던 니체는 20대 후반에 읽기나 쓰기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하루 1시간일 정도로 시력이 나빠졌는데 오히려 눈병을 축복으로 여기며 철학적 사유를 발전시켰던 거죠. 흐릿한 눈으로 책을 읽고 쓰다보니 금세 머리가 어지럽고 아팠는데 그럴 때마다 산책하고 사유하여 위대한 철학을 완성한 거예요. 서구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웠기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는데, 실제로 극심한 어지럼증과 두통, 불면증이라는 '망치'에 맞서 싸웠다고 봐야겠네요. 전형적인 뇌종양의 증상에 시달려면서도 니체는 일찌감치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이렇게 말했어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 (Whatever does not kill me makes me stronger.) (181p) 또한 니체가 제정신으로 본 마지막 날의 사건은 '토리노의 말'인데, 마부의 채찍질에도 꼼찍하지 않고 꿋꿋하게 우뚝 선 말을 보았고 나흘 동안 '디오니소스'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고 서명한 '망상의 편지'를 여기저기 보낸 뒤 정신병원에서 진행성 마비증으로 진단받았다고 하네요. 평생 육체적 고통을 겪었던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아모르 파티 (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를 외쳤다는 것이 너무나도 강렬하게 와닿네요. 위대한 철학자는 고통과 불행에서 어떻게 해야 해방될 수 있는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니체는 "행복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란 없다."라고 말했어요. 누구든지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을 내면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픔과 고통은 삶의 걸림돌이 아니라 삶을 제대로 인식하고, 더 나은 존재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임을 배우는 시간이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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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러 픽션 나이트
반고훈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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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호기심이었고, 그 다음엔 짜릿한 자극에 끌렸다가 지금은 좀 진지해진 것 같아요.

공포의 세계란, 그저 가상의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 가까이에 있음을 깨닫는 중이에요.

《호러 픽션 나이트》는 반고훈 작가님의 소설집이에요.

이 책에는 모두 일곱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어요. 순서대로 읽다보면 만찬 코스를 즐기는 느낌이에요.

애피타이저 같은 <당신과 가까운 곳에>로 시작해서 <시체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으로 슬슬 발동이 걸리더니, <벽 너머의 소리>에서는 공포보다는 통쾌함으로 이어지네요. <과거로부터의 해방>에서는 놀랍고도 기묘한 경험담을, <검은 짐승들>은 옛날 옛적 산 속에서 마주한 이상한 마을의 숨겨진 섬뜩한 비밀을, <제3의 종>은 바다로 가는 열차에서 만난 노인의 사연을, <귀신은 있다>는 맨 처음 봤던 <당신과 가까운 곳에> 이야기와 연결되네요. 참으로 독특한 공포 소설인 것 같아요.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다가 어느 순간 흠뻑 젖게 되는 가랑비처럼 뒤늦게 공포감이 찾아오네요. 혹시나 여기에 실린 이야기가 전혀 무섭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대단한 착각이 아닐까 싶어요. 왜냐하면 내용을 정확히 이해했다면 당연히 소름돋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에요. 단순히 귀신이 무섭냐, 무섭지 않냐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지닌 보편적인 감정에 관한 문제라고 볼 수 있어요. 제 기준에는 호러 픽션보다는 스릴러 픽션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대놓고 겁주는 방식이 아니라 서서히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두려움을 일으키는 방식인 것 같아요. 강력한 공포물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다가온다면 반고훈 작가님의 호러 픽션 나이트는 불 붙은 도화선처럼 시간차가 있어서 나중에서야 "앗, 뜨거워!"라며 소리치게 되네요. 그 공포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되짚을수록 더 무서운 것 같아요.

"너, 집에 있는 그게 귀신인지 아닌지 궁금한 거지? 그래서 여기까지 따라온 거지?"

"어, 맞아요."

"에이,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을 해야지. 괜히 진지하게 생각했잖아."

"만약 지금 네가 집에서 본 걸 여기서도 볼 수 있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간단해. 볼 수 없어.

왜냐면 넌 귀신을 본 게 아니라 귀신 같은 걸 본 거기 때문이야. 공포심이 만들어낸 환각이라고." (49p)

과연 그럴까요. 그러면 공포심의 근원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어느 방송에서 귀신을 보는 사람이 출연해 놀라운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어요. 정말 귀신을 보냐고, 굉장히 불량하게 구는 남자가 찾아왔는데 그 남자 옆에 긴 머리 여성이 보이더래요. 그 여성의 목에 검은 반점이 있다고 했더니 남자가 화들짝 놀라더래요. 사실 그 남자는 연인을 살해한 죄로 감옥에 있다가 출소했다는 거예요. 귀신이 있다면 억울하게 죽은 그 여성처럼 남자 곁을 맴돌 것 같아요. 귀신을 믿든 안 믿든, 죄진 것이 없다면 귀신을 무서워할 필요는 없겠지요. 세상에는 귀신을 본다는 사람이 있고, 말 못할 비밀이 귀신을 통해 드러나는 걸 보면 우리가 모르는 미지의 세계가 있다고 봐야겠죠. 다소 엉뚱한 결론일 수는 있는데, 반고훈 작가님의 이야기를 읽고나니 '착하게 살자!'라는 문장이 떠올랐어요. 우리가 무서워해야 할 건 귀신이 아니라 양심을 속이는 죄인 것 같아요. 세상에 극악무도한 것들을 향해 우리가 해줄 말은 "귀신은 뭐하냐 저런 놈 안 잡아가고?"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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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못다 한 이야기들
마르크 레비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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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있나요.

《차마 못다 한 이야기들》은 그 물음에 대한 이야기예요. 당연히 사랑 이야기겠죠?

마르크 레비의 장편소설이 처음이라면 분명 이 책을 읽고 난 뒤에는 그의 이름을 기억하게 될 거예요. 뭉클한 감동과 반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이야기에 푹 빠져들 테니까요. 재미있으면서도 감동적이라니, 뭘 더 바라겠어요. 무엇보다도 마르크 레비가 소설을 쓰게 된 계기가 아들을 위해서였다는 것, 그 소설을 가장 먼저 읽은 독자는 그의 아버지였다는 걸 알고나서는 더욱 열렬한 팬이 된 것 같아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인 사랑과 가족에 대해 이토록 멋진 이야기를 들려준 마르크 레비 작가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네요. 후회없이 사랑하며 살고 싶다면 이 소설이 좋은 안내서가 될 거예요.

원래 이 소설은 49개 언어로 번역되고, 5천만 부 이상 판매된 베스트셀러인데 이번에 재출간되었어요. 2022년 프랑스에서 드라마로 제작되어 큰 화제가 되었는데 이 드라마를 국내에서도 곧 만날 수 있다고 하네요. 책 표지도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바뀌어서 분위기가 확 다르네요. 소설의 주요 줄거리는 딸 줄리아와 안드로이드 아빠 안토니 왈슈가 일주일 간의 여행을 하는 내용이에요. 드라마에서는 아빠 역할을 <레옹>의 장 르노가 맡았네요. 가깝고도 먼 관계가 가족 사이인 것 같아요. 줄리아와 아빠 안토니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오해와 갈등을 단 일주일만에 해소하는 건 현실적으로 무리지만 소설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건 놀라운 비밀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에요. 정말 최고의 이야기라고 소개하고 싶어요. 자세한 내용은 꼭 책으로 확인해보세요. 일단 첫 장을 펼치면 휘리릭, 끝까지 읽게 되는 매력적인 이야기예요. 소설 속에서 많이 안타까웠던 부분은 아빠 안토니가 일하느라 놓쳤던 딸과의 시간인 것 같아요. 딸 줄리아가 아빠를 간절히 원했던 그 시기에 아빠는 너무 바빴고, 줄리아는 혼자 버려졌다고 느꼈어요. 그때 아빠는 먹고 살기 위해 아둥바둥 일했던 건데 그 상황을 어린 줄리아가 이해하긴 어려웠으니,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은 아빠의 잘못도 있어요. 딸을 엄청 사랑하는 아빠지만 표현하지 않으니 딸은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만 정서적으로 불안했던 줄리아가 토마스와 사랑에 빠져 도피를 선택한 것도 무리는 아니에요. 무엇보다도 그는 첫사랑이자 운명의 남자였으니 말이에요. 하지만 아빠 안토니의 입장에서 보면 딸의 미래를 걱정할 수밖에 없고, 그 선택으로 인해 모녀 관계가 완전히 틀어지고 말았던 거예요. 결국 십칠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진실이 밝혀지는데, 그 시간이 너무나 아쉽고 마음이 아팠네요. 그래도 더 늦기 전에 진심을 확인할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소설은 운명의 끈으로 되돌렸지만 현실은 다르기 때문에 우리에겐 결심이 필요해요. 사랑할 결심,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보여줘야 해요. 후회없이 오늘을 사랑하며 살고 싶어요.



줄리아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무언가를 상상할 때 우리는 헛되이 현실의 빛을 찾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의 꿈이 너무나도 강렬한 현실의 빛에 부딪혔을 때는

그저 잠시 그 꿈을 포기하면 된다는 것을.

그러면 잠시 그 꿈이 사라진다는 것을. (89p)


... 너는 아니? 너는 여름이 찾아오듯 그렇게 내게로 왔어.

아무런 예고도 없이 아침에 깨어 느낄 수 있는 찬란한 빛의 파편을 몰고 그렇게.

네 손이 내 뺨에 닿았지. 너의 손가락은 내 얼굴을 어루만졌어.

그리고 넌 내 눈에 입을 맞췄지.

"고마워." 멀어져가면서 네가 했던 말이야.

... 세월은 전혀 다른 두 인생을 살게 만들어버렸지. (179p)



솔직히 대답해보렴. 그 칠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남김없이 네 자신을 누군가에게 희생할 수 있겠니?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그 사람이 언젠가는 너와 함께 보낸 모든 시간들을 다 잊을 거란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런 근심 없이, 어떤 걱정도 없이 그렇게 다 줄 수 있을까?

너의 모든 정성, 너의 모든 사랑이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영영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겠니?

공백을 참을 수 없어하는 게 인간인지라, 정성과 사랑이 잊힌 자리에는 후회와 비난이 자리잡지.

넌 과연 그걸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걸 깨닫고, 네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 목이 마르다는 이유로

혹은 나쁜 꿈을 꿨다는 이유로 한밤중에 함께 깨어나줄 힘을 찾아낼 수 있을까?

... 분명 그 사람의 미래는 너에게서 멀어져 살아갈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너의 대답이 '그렇다'는 것이라면, 나를 용서하렴. 내가 널 너무 섣불리 판단한 것 같구나.

넌 진정한 사랑이 뭔지를 아는 셈이니 말이다."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 거예요?"

"아니, 바로 너의 이야기란다. 지금 내가 말한 사랑은, 자식을 향한 어느 아버지 혹은 어느 어머니의 사랑이야.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식을 걱정하며, 혹시라도 닥칠 위험을 대비하며, 자식들을 바라보며,

자식들을 잘 자라도록 도와주며,

그들의 슬픔을 달래주며, 그들을 웃게 만들며 보냈을까?

... 이곳저곳 얼마나 많은 데를 다니고, 또 얼마나 많은 말을 반복하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며 보냈을까?

하지만 ... 이 자식들에게 있어서 첫 번째 어린 시절의 기억은 무엇일까?

자식들만을 위해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 얼마나 사랑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니?

그 자식들이 태어나고 몇 년간은 아예 기억을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후의 시간은 우리가 자식들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 때문에 괴로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리고 언젠가는 자식들이 자유를 찾아 분명 내 품을 떠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항상 네 옆에 있어주지 않았다고 날 나무랐지?

그럼 자식들이 떠나는 날 부모의 마음이 어떤지는 알고 있니?

이렇게 헤어지는 것이 어떤 기분이라는 걸 알고 있니?

내가 설명해주마. 부모들은 자식이 떠나는 모습을 문턱에서 멍청하게 바라볼 뿐이야.

다 큰 자식을 떠나보내는 것은 자랑스럽고 기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

내 피요 살인 자식을 떠나게 만드는 그 무심함,

자식들로 하여금 부모를 떠나게 하는 그 무심함까지도 사랑해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그 어떤 아버지도, 또 그 어떤 어머니도 덕을 보자고 자식을 키우는 것이 아니야.

이게 바로 사랑이라는 거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 우린 자식을 사랑하니까 말이다.

(387-3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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