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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 이름 붙이기 -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할 때
캐럴 계숙 윤 지음, 정지인 옮김 / 윌북 / 2023년 10월
평점 :
"사람들은 왜 명백히 눈앞에 존재하는 걸 보지 못하는 걸까?" (143p)
과학은 인류사를 바꿀 만큼 위대한 일들을 해왔어요. 다만 과학이 생명의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은 아니라는 점을 간과하지 말 것.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과학자들은 물고기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어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사라진 물고기를 찾아서, 놀랍고도 흥미로운 여정이 펼쳐지네요.
《자연에 이름 붙이기》는 진화생물학자이자 분류학자인 캐럴 계숙 윤의 책이에요.
이 책의 커다란 틀은 생명의 진화적 계보를 추적해온 분류학이지만 그 안에 담긴 것은 인간과 생명 세계의 모든 것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이제껏 분류학에 관해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면 이 책을 통해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보이지 않던 세계가 보이기 시작하는, 그야말로 대단한 책이에요.
저자가 분류의 과학에서 제일 먼저 충격을 받았던 건 과학자들이 생명의 세계를 정확하게 질서에 맞춰 분류하는 방법이 명백한 진실로 보이는 것과 너무 심하게 자주 엇갈려 보인다는 점이었다고 해요. 분기학자들이 우리가 물고기라고 생각하는 모든 생물을 자세히 들여봤더니 온전히 하나의 분류군에 집어넣을 수 없는 요소를 발견했고, 이를 근거로 '어류 fish'라는 분류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했던 거예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속에서 퍼덕이며 은빛 비늘을 반짝이는 것을 보며 물고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엄청난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거죠. 과학자인 저자 역시 자신의 감각과 어긋나는 분류학의 선언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물고기들을 되찾아야겠다는 결심이 이 책을 쓰게 만들었다고 해요.
어쩌다가 분류의 과학이 현실 세계와 동떨어진 방향으로 흘러갔는지, 이 부분은 분류학의 역사를 통해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어요. 중요한 건 우리가 어떻게 그 어긋난 부분을 바로잡느냐일 거예요. 저자는 물고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하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을 언급하고 있어요. 그건 바로 움벨트 umwelt , 독일어 단어를 그대로 해석하면 환경 또는 주변세계인데, 생물학자들에게 움벨트란 한 동물이 감각으로 인지한 세계를 의미한대요. 개의 눈으로 보는 세계와 인간의 눈으로 보는 세계가 다른 이유는 움벨트 때문이에요. 우리를 둘러싼 생명의 세계에 대해 인간 특유의 감각이 그려낸 그림이 움벨트이며, 모두 똑같은 움벨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언어와 문화, 사회, 살아가는 장소가 달라도 물고기를 보면 물고기라고, 비슷한 분류를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자는 분류학의 역사가 2세기에 걸쳐 인간의 움벨트에 맞서 싸워온 역사라고 설명하네요. 분류학자들은 보이지 않는 움벨트에 맞서 싸워왔는데, 과학이 승리를 거두면서 움벨트를 내버린 채 어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엄청난 선언을 하게 된 거예요. 여기서 문제는 과학자들의 분류 작업이 일반인들에겐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점이고, 더 큰 문제는 우리가 생명과 너무 단절된 탓에 생명이 사라지고 있는데도 관심은커녕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는 사실이에요. 물고기는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주변의 생물들을 분류하고 명명하는 분류학이 굳이 필요한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 있어요. 분류학을 모르고도 잘 살아가는 사람들은 있지만 인간 집단으로 보면 생명 세계를 분류하고 명명하는 일을 멈출 수 없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다른 방식으로는 세계를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에요. 인간의 움벨트는 태곳적부터 쭉 그렇게 작동되었다고 해요. 인류학의 세계에서는 강력하고 보편적인 생명의 비전을 움벨트를 통해 목격할 수 있는데, 정작 움벨트가 지닌 진짜 중요성을 이해하려면 심리학의 세계로 들어가야 해요. 뇌손상 환자의 관한 내용을 보면 생명의 질서를 알아보는 능력을 잃는다는 것, 자신의 움벨트를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인지 확인할 수 있어요. 처음엔 분류학에 관한 이야기라서 나와는 무관한, 상당히 동떨어진 영역이라고 여겼는데, 분류학 자체의 기원과 역사를 살펴보는 과정에서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됐어요. 생명을 분류하는 건 단순히 식별하고 알고 이름을 부르기 위해서뿐 아니라 우리가 이 세계에 닻을 내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며, 바로 우리의 움벨트를 설명해준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동시에 소중한 움벨트가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다는 현실을 자각하고 우리가 우리의 움벨트의 비전을 필사적으로 되찾아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어요.
"이름을 불러도 벌레들이 대답을 안 한다면
이름이 있어 봐야 무슨 쓸모가 있니?" 각다귀가 말했다.
"걔들한텐 쓸모가 없지. 그렇지만 걔들한테 이름을 붙인 사람들한테는 쓸모가 있을 것 같아.
아니면 애초에 왜 걔들한테 이름이 생겼겠어?" 앨리스가 말했다.
"나야 모르지"하고 각다귀가 대답했다.
- 루이스 캐럴, 「거울 나라의 앨리스』 (19p)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