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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루스 오제키 지음, 민은영 옮김 / 엘리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놀라운 마법 같아요.
첫 페이지를 펼치는 순간,
아마도 알게 될 거예요.
아, 난 이미 네 시간 속에 빠졌구나.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나오예요. 저는 유시有時 예요. 유시가 뭔지 아세요?
음, 잠깐만 시간을 주시면 알려드릴게요.
유시는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사람, 그러니까, 당신과 나, 그리고 지금 존재하고 예전에 존재했고 앞으로 존재할 모든 사람을 뜻해요.
나로 말하자면, 지금 난 아키바 전자상가의 프랑스 메이드 카페에 앉아 있어요. 당신의 과거이자 나의 현재인 지금, 흘러나오는 슬픈 샹송을 들으며
이 편지를 쓰면서 내 미래 어느 즈음엔가 있을 당신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어요.
만일 당신이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그때쯤 당신도 나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테지요.
당신은 내가 궁금하고.
나는 당신이 궁금하고.
당신은 누구인가요? 무얼 하고 있어요? ...." (11p)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를 쓴 루스 오제키라는 사람이 있어요. 나는 그녀가 쓴 소설을 읽고 있어요. 소설 속의 루스는 우연히 해변에서 주운 일기장을 읽고 있어요.
일기장의 겉표지는 마르셀 프루스트라는 프랑스 작가가 쓴 <알 라 르셰르슈 뒤 탕 페르뒤>라는 책이에요. 마르셀 프루스트의 책을 표지만 남기고 도려낸 거죠.
<알 라 르셰르슈 뒤 탕 페르뒤>라는 프랑스말을 번역하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고 해요.
참, 일기장의 주인은 야스타니 나오.
맨처음 인사했던 그 나오예요. 열여섯 살 소녀. 소녀가 글을 쓰는 목적은 백네 살 비구니 선승인 자신의 증조할머니 야스타니 지코의 멋진 삶을 누군가에게 들려주려는 거래요.
그런데 진짜 신기한 건 뭔지 알아요. 나오의 말처럼 유시有時를 경험하게 된다는 거예요. 나오와 루스 그리고 나. 또 이 책을 읽게 될 사람들.
우리는 다른 공간, 다른 시간 속에 살고 있지만 동시에 같은 시간 속에 있어요.
어느날 밤 루스는 비구니 꿈을 꾸었어요. 그건 지코 할머니였어요. 컴퓨터 앞에 앉아서 조심스럽게 자판을 누르고 있어요.
"위, 아래, 모두 같은 거란다. 그리고 다르기도 하지.
... 위가 위를 볼 때는 위는 아래란다.
아래가 아래를 볼 때는 아래가 위란다.
하나가 아니고 둘도 아니지. 같지 않아. 다르지도 않아.
이제 알겠니?" (60p)
지코 할머니의 위, 아래 이야기는 불교의 선문답 같아요. 무슨 뜻인지를 이해하려고 억지로 애쓸 필요는 없어요. 이 책을 끝까지 읽다보면, 물론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어서 어느새 마지막 장에 이르겠지만 자연스럽게 느껴질 거예요. 이건 안다고 말하기는 어렵고 그냥 느껴진다고 해야 할 것 같아요. 뭐라고 설명하기 힘들거든요.
루스의 남편 올리버는 이 모든 일들을 양자물리학에 등장하는 슈뢰딩거의 고양이로 받아들여요. 양자물리학이 물질과 에너지의 작용을 현미경적 수준에서 기술한다는 것, 여기에서 현미경적 수준이란 말이 중요해요. 나오의 일기장 표지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책을 쓴 마르셀 프루스트가 <되찾은 시간>에서 이렇게 말했대요.
"현실에서, 모든 독자는 책을 읽는 동안 자기 자신을 읽는다.
작가의 작품은 일종의 광학 기구에 불과하며, 작가는 그것을 독자에게 제공함으로써,
책이 없었다면 자기 안에서 볼 수 없었을 어떤 것을 알아차리게 해준다.
책이 말하는 것이 자기 안에도 있음을 독자가 인식한다는 것은 그 말이 진실이라는 증거다." (1157p)
루스의 소설을 읽는 나는, 루스가 나오에게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통해서 내 안에 잠자고 있던 무언가를 깨우게 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지코 할머니가 말씀해주셨던 수파파와~~
"낫짱, 할미 생각엔 네가 진정한 힘을 키우는 게 최선일 것 같아. 슈퍼파워를 기르는 게 최선일 것 같아." (248p)
할머니는 일본어로 말하면서 '슈퍼파워'만큼은 영어로 그대로 말했어요. 마치 수파파와라고 하는 것 같았죠.
슈뢰딩거는 독극물을 넣은 이론상의 상자 속에 이론상의 고양이를 넣는 실험을 했어요. 기본적인 명제는 상자를 계속 열지 않고 상자 안의 조건들이 충족되었는지 여부를 우리가 모르는 상태에서 고양이가 아원자 입자처럼 작용한다면 고양이는 죽은 것이기도 산 것이기도 하다는 거죠. 하지만 관찰자가 상자를 열고 안을 들여다보며 내부 조건을 측정하는 순간, 고양이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를 알게 되는 거죠. 이것을 관찰자의 역설이라고 부른대요. 양자물리학은 과학인데 마법 같아요. 측정 또는 관찰하기 전까지 가능성만 존재한다는 것.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죽기도 했고 동시에 살기도 했다는 거죠. 결국 관찰자는 분리되어서 죽은 고양이를 관찰하는 내가 있고 산 고양이를 관찰하는 내가 있어요. 고양이는 원래 하나였지만 여러 마리가 되고, 관찰자도 원래 한 명이었지만 결국 여러 명이 되는 거죠.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당신은 분명 살아 있겠네요. 내가 너를 구할 수 있을까. 어떤 이야기일지 궁금한가요?
부디 궁금하기를 바랄게요. 내가 느낀 '그것'이 뭔지 당신도 함께 느꼈으면 좋겠어요.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독극물이 든 상자 같은 세상에서 어떤 결과를 바라고 있나요? 우리는 고양이인 동시에 관찰자인지도 몰라요. 우리가 누구이든간에 무엇을 선택하든간에 변하지 않는 사실은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지코 할머니의 수파파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