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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1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17년 5월
평점 :
위화의 소설 <형제>는 11년 전, 중국에서 출간되었을 당시에 엄청난 논쟁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내용이 저속하다는 것과 사회 병폐에 대해 기존과 다른 입장에서 이야기했다는 것.
아닌게 아니라, 진짜로 <형제>의 주인공 이광두는 혀를 내두를 만큼 악동 기질이 다분한 인물입니다.
공중변소에서 다섯 개의 여자 엉덩이를 몰래 훔쳐보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것이 열네 살 때였으니, 속된 말로 어린 것이 까지다 못해 되바라진 것만은 확실합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광두의 아버지가 공중변소에서 여자들 엉덩이를 몰래 훔쳐보다가 똥통에 빠져 죽었으니, 이는 이광두의 어머니 말에 의하면 '그 아비에 그 자식'인 운명의 굴레인가 봅니다. 암튼 몹쓸 일을 당한 여자 중 한 명이 류진의 미인으로 꼽는 열일곱 소녀 임홍이었다는 게 소문이 나면서 이광두는 류진 지역의 유명인사가 됩니다.
음흉한 남자들이 이광두에게 은밀하게 접근하여 그가 본 임홍의 엉덩이에 관한 비밀을 듣고 싶어했고, 이광두는 십분 장사꾼 기질을 발휘하여 비싼 삼선탕면을 공짜로 얻어먹는 구실로 삼습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이광두의 아버지가 죽은 그날, 공중변소에서 시체를 발견하여 꺼낸 사람이 송범평입니다. 착한 심성을 가진 사내.
아마 이 소설 전체에서 가장 멋진 인물은 송범평 한 명뿐일 듯 싶습니다. 그만큼 그는 짧은 생을 마지막까지 아름답게 살다간 인물입니다.
송범평이 죽은 남자를 집까지 데려가 우물물로 씻겨줄 때, 자신의 남편이 죽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아내 이란은 하혈하며 아기를 출산합니다. 그 아기가 바로 이광두.
당시 송범평은 한 살배기 아들을 둔 유부남이었으나 1년 뒤 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이광두의 엄마 이란과 재혼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송범평의 아들 송강과 이란의 아들 이광두는 형제가 됩니다. 서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형제인데도 그 둘은 친형제 못지 않은 우애가 있었으니.... 그건 송범평이 자상한 아버지였고, 사랑이 넘치는 남편이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영향을 준 게 아닐까요.
1권을 읽으면서 두 번 울컥했습니다. 송범평이 아내 이란과의 약속을 지키려다가 끔찍한 죽음을 맞는 장면과 이광두의 엄마 이란이 죽음을 준비하며 자신의 관을 사고 목욕재계를 하는 장면입니다. 송범평과는 1년 2개월이라는 짧은 시간을 부부로 살았지만 이란의 마음 속에는 그 시간이 일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이란은 송범평을 기리기 위해 7년간 머리를 감지 않다가, 본인의 죽음을 감지하고 머리를 감고 나자 백발이 드러나는데... 이광두는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가 늙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열다섯 살 철부지 소년에서 어른이 됩니다.
어떻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송강과 이광두가 형제가 될 수 있었느냐는 송범평과 이란의 숭고한 사랑만으로도 충분한 설명이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예상치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그건 류진의 미인 '임홍'입니다. 이광두는 임홍을 저돌적으로 사랑하고, 임홍은 송강을 사랑하고, 송강은 형제의 우애와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비극적인 로맨스. 광기와 열정을 가진 이광두와 온순해서 바보 같은 송강이 너무나 대비를 이룹니다.
중국의 근현대사를 교과서로 배운다면 매우 품격있는 역사적 지식을 얻겠지만 그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반면에 <형제>는 표현이 저속할지는 몰라도 가장 인간적인 본능과 감정을 자극하면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느끼게 합니다. 지나치리만치 적나라한 감정들이 뒤섞여서 인간을 선과 악으로 나누는 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단순한 발상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11년이 지난 현재, 중국에서 <형제>에 관한 논쟁들이 사라지고, 오히려 지속적으로 읽히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는 2007년 5월 출간되었고, 2017년 현재 개정판이 출간되었습니다. 그때가 아니고 지금이라서, <형제>의 진가를 알게 된 것 같습니다.
... 나는 <형제>에서 거대한 간극에 대해 썼습니다. 문화대혁명 시대와 오늘날의 간극은 역사적 간극일테고, 이광두와 송강의 간극은 현실적 간극일 것입니다.
... 우리는 현실과 역사가 중첩되는 거대한 간극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병자일 수도 있고, 모두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양극단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늘과 과거를 비교해봐도 그렇고, 오늘날과 오늘날을 비교해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20여 년 전 이제 막 이야기를 하는 직업에 종사하기 시작했을 때 읽었던 노르웨이의 작가 입센이 "모든 이는 자신이 속한 사회에 책임이 있고, 그 사회의 온갖 폐해에 대해 일말의 책임이 있다."라고 한 말이 생각납니다.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내가 왜 <형제>를 쓰게 되었는지 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병자이기 때문입니다.
- 2007년 5월 26일 위화 , [한국어판 서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