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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혐오 - 공쿠르상 수상 작가 파스칼 키냐르가 말하는 음악의 시원과 본질
파스칼 키냐르 지음, 김유진 옮김 / 프란츠 / 2017년 7월
평점 :
검은색 포장지를 조심스레 벗겨내니 <음악 혐오>라는 책 제목이 보입니다.
세상 그 무엇이든 그 대상에게 '혐오'라는 단어를 붙이는 순간 족쇄와 같은 효과가 생겨납니다.
존재의 본질은 사라지고, '혐오'만 남을 가능성이 큽니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더 옭조여오는 족쇄.
이상하게도 '혐오'는 묘한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뭔지도 모르고 책 제목에 이끌렸는데, 프랑스 소설로 분류된 이 책은 전혀 소설 같지 않습니다.
첫 문장부터 난해합니다.
"우리는 극도로 상처 입은 어린아이와 같은 유성(有聲) 의 나체를,
우리 심연에 아무 말 없이 머무는 그 알몸을
천들로 감싸고 있다.
천은 세 종류다. 칸타타, 소나타, 시.
노래하는 것, 울리는 것, 말하는 것.
이 천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우리 몸이 내는 대부분의 소리를
타인이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과 같이,
몇몇 음(音)들과 그보다 오래된 탄식에서
우리의 귀를 지켜 내려 한다." (9p)
우리 몸을 하나의 소리로 인식하면서, 그 소리로부터 우리 귀를 지켜 낸다는 건 모순됩니다.
저자는 소리가 주는 고통과 음악의 지속적인 관계에 대해서 음악과 공포는 영원히 결속된 것 같다고 말합니다.
"모든 소리는 미묘한 공포를 안긴다. Tremit. 그것은 떨린다."
"음악은 소리를 내는 허수아비다. 새의 울음이 새에게 그러하듯이.
Terrificatio 공포에 떨게 하는 어떤 것. " (40p)
철학적인 비유나 문헌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으나, 조각조각 뜯겨진 지도를 보는 느낌입니다.
<1장 성 베드로의 눈물>에서 가장 공감하는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베드로가 안뜰에서 여자에게 말한다.
그는 반복한다.
Nescio quiddicis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여자는 얼어붙을 듯한 4월의 밤 끝자락에서 두건을 다시 올려 쓴다.
여자는 말한다.
"당신 말투에서 당신이 누군지 드러나오." Tua loquela manifestum te facit. (83p)
위 문장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말하는 장면인데, 제게는 이 책에 대한 소감과 일치합니다.
단락은 이해하겠지만 전체가 보이질 않습니다. 도통 무엇을 말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다만 베드로의 귓가에 너무나 선명하게 들리는 수탉의 울음소리, 그것이 얼마나 공포스러웠을지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음악은 야성의 소리로부터 벗어나려는 의지의 산물입니다.
<2장 귀에는 눈꺼풀이 없다>에서는 음악의 본질을 이야기합니다.
눈은 눈꺼풀을 내리면 보는 것을 멈출 수 있지만 귀는 듣지 않으려 해도 스스로 막아낼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인간의 귀는 개인적인 것에서 벗어나 공동체를 이루는 데 기여했다는 것입니다.
비경계성과 비가시성. 음악은 만인의 목소리라는 것.
드디어 <7장 음악 혐오>에서 왜 '음악 혐오'라는 표현을 썼는지 설명합니다.
나치의 강제수용소에 징발된 유일한 예술 장르가 음악이었다는 사실.
죽음의 수용소에서 흘러나왔던 음악.
'음악 혐오는 음악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던 사람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증오스러운 것이 될 수 있는지를 표현한 말입니다.
감히 비교할 수는 없지만 과거 어린 시절에 피아노 선생이 준 트라우마 때문에 음악 자체를 싫어했던 경험이 떠오릅니다.
불행하게도 피아노에 '혐오'라는 족쇄가 풀어지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반면 저자 파스칼 키냐르는 평생 음악과 함께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나는 언제 음악이 내게서 떨어져 나갔는지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어느 날, 모든 울리는 것들에 대해 일순 무심해져 버렸다."(255p)라고 말합니다.
확실한 건 그가 급성 폐출혈로 죽을뻔 했던 시기에 <음악 혐오>를 썼다는 겁니다. 이 책의 원제목은 <음악의 증오>라고 합니다.
어쩌면 음악에 대한 키냐르의 증오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에서 온 것은 아닐까요. 이것이 프랑스 소설이라니, 너무 난해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