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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는 오후 - 시인 최영미, 생의 길목에서 만난 마흔네 편의 시
최영미 지음 / 해냄 / 2017년 8월
평점 :
품절
가뭄에 논 바닥이 쩌억 갈라지듯이,
내 안의 시가 말라버렸습니다.
그래서 겨우 물 한 바가지 퍼올려 마른 가슴을 적셔봅니다.
최영미 시인이 들려주는 마흔네 편의 시.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존 던, 사포, 윌리엄 블레이크, 조지 고든 바이런, 토머스 무어, 딜런 토마스, 실비아 플라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최승자, 마크 스트랜드, 로버트 프로스트, 에즈라 파운드, 월리스 스티븐스, 퍼시 비시 셸리,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 마야 안젤루, 세라 티즈데일, W.H. 오든, 밥 딜런,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도로시 파커, 오마르 하이얌, 에밀리 디킨슨,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크리스티나 로제티,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T.S. 엘리엇, 어니스트 헤밍웨이.
근래 셰익스피어의 명문장을 뽑아놓은 책을 보면서 문득 영어로 된 원작시 소네트가 궁금해서 충동적으로 원서를 구매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펼친 순간, 아차!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400년 전에 쓰인 영시라서 지금은 사라진 고어가 섞여 있는데, 음미는 고사하고 해석조차 어려운 수준... 아쉽지만 번역본으로 만족해야 됐음을 뒤늦게 안 겁니다.
영시는 누가 어떻게 번역했느냐가 중요합니다.
원작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서 우리말로 옮겨야 시를 제대로 음미할 수 있습니다. 시 번역은 단순히 언어전환이 아닌 감성전달이 핵심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최영미 시인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를 어떻게 우리말로 옮겼을까요?
소네트 73
- 윌리엄 셰익스피어
찬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위에
노란 잎사귀들이 몇 개 매달린, 혹은 잎이 다 떨어진
계절을 그대는 내게서 본다.
사랑스러운 새들이 노래하던 성가대는 폐허가 되었지.
해가 서쪽으로 진 뒤에
희미해진 석양을 그대는 내게서 본다.
모든 것을 덮어 잠들게 하는 죽음의 분신인
검은 밤이 야금야금 황혼을 몰아내고,
불이 꺼져 죽을 침대 위에서
그를 키워준 나무에 잡아먹히는 장작불처럼,
젊음이 타고 남은 재 위에 누워
빛나는 불꽃을 그대는 내게서 본다.
이걸 알게 된 그대는, 사랑이 더 강렬해지지.
머지않아 그대가 떠나보내야 할 사람을 깊이 사랑하게 되지.
Sonnet 73
That time of year thou mayst in me behold
When yellow leaves, or none, or few, do hang
Upon those boughs which shake against the cold,
Bare ruined choirs where late the sweet birds sang.
In me thou see'st the twilight of such day,
As after sunset fadeth in the west,
Which by and by black night doth take away,
Death's second self, that seals up all in rest.
In me thou see'st the glowing of such fire
That on the ashes of his youth doth lie,
As the death-bed whereon it must expire,
Consumed with that which it was nourished by.
This thou perceiv'st, which makes thy love more strong.
To love that well which thou must leave are long.
최영미 시인은 마지막 14행에서 시인의 대화 상대인 그대가 떠나야 할 것을 '젊음'으로 번역하려다가 '사람'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영어단어의 뜻을 알아도, '사랑'의 대상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영시는 별 감흥을 주지 못하지만 시인이 해석해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73>은 가을이라는 계절을 흠뻑 느끼게 해줍니다.
찬바람에 흔들리는 잎, 희미해진 석양, 젊음이 타고 남은 재.... 그리고 그대는 빛나는 불꽃.
이 가을에, 계절처럼 우리는 누군가를 혹은 무엇인가를 떠나보내야 할 운명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은 깊이 사랑하는 것뿐.
이 책에서는 시뿐만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합니다. 시를 읽으며, 시인의 삶을 들춰보고, 다시 우리의 삶을 돌아보기.
최영미 시인은 <시를 읽는 오후>를 통해서 우리 삶에 '시'라는 멋진 프리즘을 비추어줍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시어들.
우리가 비록 아름다운 시 한 줄을 쓸 수는 없어도, 이 책을 통해 시의 매력을 발견할 수는 있습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시.
도로시 파커의 <베테랑>을 읽으며... "세상이란 원래 그런거야." (178p)
마야 안젤루의 <그래도 나는 일어서리라>를 읽으며 ... "하지만, 먼지처럼, 나는 일어날 거야." (145p)
에밀리 디킨슨의 <사랑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 ...
"사랑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아는 모든 것;
이거면 충분하지, 그 사랑을 우리는
자기 그릇만큼밖에 담지 못하지." (200p)
어쩌면 시를 읽어도, 딱 자기 그릇만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