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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베의 태양
돌로레스 레돈도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8월
평점 :
눈앞에 배우 마동석 같은 체격의 남자가 다가온다면, 본능적으로 뒷걸음치거나 움찔할 것 같아요.
<테베의 태양>이라는 책을 보자마자 첫느낌이 딱 그랬어요.
총 716페이지, 책 두께로 보자면 4.5센티미터.
음, 책을 펼치기도 전에 위압감 드는 비주얼이랄까.
그러나 책표지에 보이는 한 남자.
담쟁이덩쿨로 뒤덮인 창문 안쪽으로 옆 얼굴의 젊은 남자가 너무나 궁금해요. 눈을 내리깔고 거뭇거뭇 수염이 올라온 것이 뭔가 상심한 듯 슬퍼 보여요.
어쩌면 그는 이 소설 속 알바로 무니스 데다빌라?
위압감을 떨쳐내고 책을 펼친다면, 놀라운 이야기를 마주하게 될 거예요.
저자 돌로레스 레돈도는 스페인 작가로서 데뷔작『천사의 특권』(2009년)을 시작으로, 『바스탄』(2013년) 3부작이 호평을 받으면서 스페인 주요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요.
이 시리즈 중 1부 『보이지 않는 수호자』는 넷플릭스에서 영화 <인비저블 가디언 The Invisible Guadian , 2017)로 제작되었네요.
그리고 바로 이 소설 <테베의 태양>은 2016년 발표된 작품으로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문학상을 받았고, 35개 언어로 전 세계에서 출간되었어요.
주인공 마누엘 오르티고사는 쉰둘의 중견 작가예요.
마누엘은 혼자 집에서 소설 <테베의 태양>의 마무리 작업을 하던 중이었어요. 그때 찾아 온 사람은 제복을 입은 두 명의 과르디아 시빌 대원이었어요.
(과르디아 시빌 Guardia Civil : 스페인의 국가 헌병대로, 군 조직이면서 평시에 각 지역의 치안을 담당해요.)
그들은 오늘 새벽에 알바로 무니스 데 다빌라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이미 절명한 상태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왔던 거예요.
알바로는 마누엘의 동성 배우자예요. 두 사람은 15년을 함께 살아온 동성 부부예요.
갑작스런 배우자의 죽음... 문제는 그의 죽음이 단순 사고가 아닌 살인이라는 거예요. 옆구리에 자상이 발견되었지만 알바로가 죽은 그 지역의 전통 있는 가문의 후작 신분이 확인되자 가문의 명예를 위해 신속히 사건종결이 된 거예요. 은퇴를 앞두고 사건을 담당했던 과르디아 시빌 소속의 노게이라 중위는 의구심을 품고 사건을 추적하게 돼요.
마누엘이 받은 충격은 알바로의 죽음뿐 아니라 죽음을 통해 밝혀진 그의 비밀들이에요.
도대체 왜 알바로는 자신의 가족사를 숨겼던 걸까요.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 정말로 서서히 접근해간다는 점에서 여느 추리소설과는 결이 다른 것 같아요.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것보다 알바로의 과거와 그것을 하나씩 알게 되는 마누엘의 심리 묘사가 압권인 것 같아요.
죽기 전 알바로는 마누엘의 <테베의 태양> 원고를 읽고서 다음과 같은 감상평을 말했어요.
"마누엘, 당신은 글을 아주 잘 써. 그러니까 작가가 된 거라고.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 이번 작품은 왠지 진심이 느껴지지 않아.
『부인(不認)의 대가』가 지니고 있던 그런 느낌이 없어." (160p)
그러자 마누엘은 『부인의 대가』를 쓴 건 자신이 실제 겪은 고통스런 경험이기 때문에 다시는 그 이야기를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어요.
"내가 지금까지 그 삶에서 도망치려고, 그 모든 걸 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당신은 몰라.
물론 난 성공을 거두었어. 수많은 독자와 돈 그리고 이 집...... 이 정도면 뭐 하나 부족한 게 없지.
당신 말마따나 <테베의 태양>도 독자들의 마음에 들 테고. 그들이 좋아하는 작품이니까 말이야.
내가 정말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글을 쓸 때 왜 그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 거지?" (162p)
알바로는 답했어요. "그게 진실이기 때문이지." (162p)
문득 나 자신에게 묻게 되네요.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마누엘은 행복을 위해 과거의 고통을 덮었으면서, 정작 알바로가 자신에게 고통스러운 진실을 숨겼다는 것에 크나큰 상처를 받았어요.
알바로는 마누엘의 모순된 감정까지 다 헤아릴 정도로 그를 사랑했어요. 마누엘이 감당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실만을 보여줬던 거예요.
제게 있어서 <테베의 태양>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 가슴 밑바닥에 가라앉는 느낌이에요.
마지막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 중 시(詩) 「까마귀」에 나오는 "네버모어"라는 단어가 뇌리에 박혔어요.
알바로의 가문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를 '까마귀'라는 별명으로 불렀어요. 마누엘은 '까마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에드거 앨런 포의 「까마귀」에서 반복되던 불길한 말, "네버모어"를 떠올렸어요. 우리의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네버모어...
◆ 「까마귀」에서는 각 연의 끝마다 Nevermore 가 후렴처럼 반복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각 연마다 그 의미가 다르기 때문에 여기서는 <네버모어>라고 옮긴다.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화자가 사랑하는 레노어를 상실한 슬픔을 달래려 독서에 몰입하고 있는데 갑자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창문을 열자 까마귀 한 마리가 어둠 속에서 날아 들어와 아테네의 흉상 위에 앉는다.
화자가 이 새에게 이름을 묻자 뜻밖에 까마귀는 <네버모어>라고 대답한다.
놀란 화자가 날이 새면 이 새도 날아갈 것이라고 혼잣말을 하자 새는 <결코 날아가지 않을 거야>라고 답한다.
다시 화자가 약을 먹고 레노어를 잊겠노라고 혼잣말로 다짐하자 이번에도 새는 <결코 그럴 수 없을 걸>이라고 말한다.
결국 화자는 자신이 이 까마귀의 그림자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을 직감하면서 시를 끝맺는다. (175p)
- 옮긴이 엄지영님의 각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