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의 삶이라는 책
알렉산다르 헤몬 지음, 이동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8월
평점 :
해외로 이민 간 사람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십 년 가까이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이방인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 조국... 늘 그곳에 살고 있다면 결코 느끼지 못할 감정들.
우리 대 그들.
"어떤 차이라도 이를 지적하는 순간
나이와는 상관없이 이미 존재하는 차이들의 체계,
순전히 제멋대로에 내 의도와는 무관하며
직접 선택하지도 않은 정체성들로 짜인 네트워크에 빠져버린다.
누군가를 타자화하는 순간,
타자가 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다." (21p)
<나의 삶이라는 책>은 알렉산다르 헤몬의 첫 에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태어났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뒤 문화 잡지 편집자로 일했습니다. 그러다 스물일곱 살에 우연히 미국 시카고를 방문했는데, 바로 그 시기에 본국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전이 발발하여 사라예보가 포위되는 바람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시카고에 체류하게 된 그는 1992년부터 그린피스 운동원, 서점 판매원 등 생계를 위한 일을 하게 됐고, 1995년에 영어로 쓴 자신의 글을 처음 발표한 이후로 여러 잡지에 산문을 발표했고 지금도 일부 잡지에 정기 기고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1993년 12월, 그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부모님은 난민 신분으로 캐나다 온타리오주 해밀턴에 도착했고 이후 이민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현재 저자는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뉴저지주 프린스턴에서 아내 테리와 두 딸 엘라, 에스터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책 날개에 적힌 저자의 소개글입니다.
이 책은 저자의 인생 회고록이기 때문에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려면 그의 조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대한 기본 지식이 필요합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과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구성하는 여섯 개의 공화국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보스니아인은 이슬람교를, 세르비아인은 세르비아 정교회를, 크로아티아인은 로마 가톨릭을 신봉합니다.
각 민족을 대표하는 정당들이 형성되면서,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잔류하기를 원한 반면, 보스니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독립하기를 원했습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거주하던 보스니아인들, 크로아티아인들, 세르비아인들 간의 분쟁이 1992년에 일어난 보스니아 전쟁입니다.
이때 각 민족들이 상대 민족들을 학살하는 행위가 벌어졌습니다.
현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보스니아계-크로아티아계 연방(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계 공화국(스릅스카 공화국)으로 구성된 1국가 2체제이며, 정치 체제가 매우 복잡합니다.
'나는 뭘까?'
저자의 여동생 크리스티나는 전쟁이 끝났을 때, 캐나다 여권을 들고 사라예보로 돌아가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정치 분석가라는 직업의 특성상 외국인이나 현지인 정치가나 공무원을 대면할 일이 많은데, 그들의 입장에서 동생은 어딘지 모르게 민족성이 모호한 이름인 데다 보스니아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한다는 점에서 신원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현지인과 외국인 모두에게 "원래는 어디 출신입니까?"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합니다. 이 질문에 대해 크리스티나는 강인하고 당돌한 여성이었기에, 바로 "그건 왜 묻는데요?"하고 되물었답니다. 그들에게 그녀는 한 개인으로서 무의미했던 겁니다. 그녀의 민족성으로 정의될 편견이 그들의 결론이니까. 처음에는 그녀의 반박 질문에 당황했지만 기어이 그 질문을 다시 밀어붙였습니다. 결국 동생은 "저는 보스니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국적 가운데 하나를 알려줬답니다.
동생의 경험에 따른 교훈으로 나는 "원래는 어디 출신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작가 출신입니다"라고 자신만만하게 대답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막상 거의 그런 적은 없는데......
나는 글을 쓸 때만 내가 작가라고 느낀다. 그래서 나도 헷갈린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덧붙이고 싶다.
저는 답할 수 없는 의문들이 얽히고설킨 다름의 결정체입니다.
"아직 뭐라 말씀드리기엔 너무 이른 것 같네요" 정도로만 대답하는 게 좋을 것 같다. (35p)
당장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고 해도 자신만만하게 답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이 책의 제목 <나의 삶이라는 책>을 처음 봤을 때, '난 아직 멀었어. 좀더 나이들면 그때 써야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글 쓰는 직업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나의 삶에 관한 책 한 권을 써보리라, 혼자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삶이라는 책에서 어디쯤 살고 있는지, 그리고 곧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걸.
무엇보다도 우리는 이번 생애에 적응 중인 이방인이라는 걸. 어딘가에 소속되기에는 우리 삶이 너무 짧아서...
"그때 나는 배웠다.
세상에는 내 것보다 비통하고 강력한 이야기가 늘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내가 왜 그렇게 피터에게 끌렸는지도 이해하게 되었다.
우리는 같은 실향 종족이었던 것이다." (193p)
분명 <나의 삶이라는 책>이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주지는 못할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진짜 삶의 이야기니까.
저자가 피터에게 끌렸듯이, 우리는 공통된 경험에 대해서만 공감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백퍼센트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는 오직 나의 삶이라는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