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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100쇄 기념 에디션)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읽는 『눈먼 자들의 도시』, 새로운 것이 보입니다.
동일한 소설을 또 읽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미 다 아는 내용은 시시하니까.
그런데 이 소설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이야기가 아닌 사실, 사실 너머의 진실.
단순히 소설의 줄거리를 아는 것과 그 이야기가 지닌 의미를 깨닫는 건 다릅니다.
이 소설은 1995년 포르투갈어판으로, 1998년 한국어판이 나왔습니다.
1922년생 주제 사라마구가 일흔을 넘긴 나이에 쓴 소설이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눈이 멀었다'라는 설정을 비유가 아닌 실재하는 상황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소설의 첫 번째 장면에서, 어떤 한 남자가 운전을 하던 도중에 눈이 멀게 됩니다. 누가 봐도 남자의 눈이 건강해 보이는데, 그는 눈이 안 보인다며 절규합니다. 눈 먼 남자를 돕겠다면 나선 낯선 남자는 눈 먼 남자를 집에 데려다 준 후 눈 먼 남자의 차를 훔쳐갑니다. 첫 번째 눈 먼 남자를 시작으로 해서 도시는 집단적 실명 현상이 전염병처럼 퍼져갑니다. 눈 먼 자들의 도시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의사의 아내입니다. 왜 그녀만 실명이 되지 않았는지 그 이유는 모릅니다. 어쩔 수 없이 공포와 혼란의 도시를 목격하게 된 의사의 아내, 그녀의 눈을 통해 눈 먼 자들의 도시를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처음 읽은 시기는 2008년입니다. 그때는 유일한 목격자, 의사의 아내 입장에서 바라봤습니다. 눈 먼 세상이 지옥처럼 보였습니다. 극한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성이 끔찍했습니다. 그건 마치 인간다운 본질에 대해 눈 감아 버린, 괴물들의 세계였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으나 아무런 힘이 없는 의사의 아내가 위태롭게 느껴졌습니다.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영웅이 아니라 약자라서 슬펐습니다.
2019년에 본 <눈먼 자들의 도시>는, 놀랍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닮아 있었습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가짜 뉴스와 음모 조작, 약육강식의 세계.
"눈이 보이면, 보라.
볼 수 있으면, 관찰하라."
- 『훈계의 책』에서
『눈먼 자들의 도시』의 첫 장에 적힌 문구입니다.
스스로 묻게 됩니다. 내 눈은 제대로 보이는지, 볼 수 있는 게 맞는지.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눈을 통해 본 것들을 진짜라고 믿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유명한 심리학 실험 중에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이 있습니다. 6명의 실험참가자를 두 팀으로 나눠 농구공을 서로 패스하면서 그 횟수를 세도록 지시한 뒤, 고릴라 옷을 입은 사람이 그들 옆을 천천히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실험 결과, 실험 참가자의 50%가 고릴라의 등장을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어떤 일에 집중하면 바로 앞에 사물도 인지하지 못하는 '부주의맹(inattention blindness)'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똑같이 눈을 뜨고 있는데, 왜 누구는 보고 누군 보지 못했을까요? 사람들은 자신의 관심대상에 집중하는 정도가 다릅니다. 이러한 차이는 사람들이 기대하지 않는 것을 보는 것에 영향을 끼친다고 합니다. '보이지 않는 실험'에서 고릴라 옷을 입은 사람이 바로 실험 참가자들이 '기대하지 않는 것'에 해당됩니다. 결과적으로, 고릴라를 인지하는 사람들이 집중을 더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집중력이 높은 사람은 사고를 유발하는 돌발 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집중력을 높이는 건 세상을 향한 관심과 애정입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면 보입니다.
눈먼 자들의 도시가 보여준 지옥이 우리의 현실이 되지 않도록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보지도 못하는 우리가,
행동한 사람 자신도 모르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247p)
"의사가 말했다 ... 가장 큰 문제는 우리에게 조직이 없다는 거야, 각 건물마다, 각 거리마다, 각 지역마다 조직이 있어야 해.
정부가 필요하다는 거로군요, 아내가 말했다. ... 눈먼 사람들의 사회가 어떻게 조직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겠어요.
스스로를 조직해야지, 자신을 조직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눈을 갖기 시작하는 거야.
어쩌면 당신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 실명의 경험은 우리에게 죽음과 고통만 주었어요, 내 눈도 당신 병원처럼 쓸모가 없어요.
사모님 덕분에 우리는 아직 살아 있잖아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했다.
내가 눈이 멀었다 해도 우리는 살아 있을 거야, 세상은 눈먼 사람들로 가득해, 하지만 난 결국 우리 모두가 죽을 거라고 생각해, 시간의 문제일 뿐이야.
죽는 건 늘 시간의 문제였지, 의사가 말했다. 하지만 눈이 멀었기 때문에 죽는다니, 이런 식으로 죽는 것보다 더 비참한 건 없을 거예요.
... 우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어요, 하지만 우리는 적어도 눈은 멀지 말아야 해요, 의사의 아내가 말했다." (418-419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