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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바다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0년 2월
평점 :
# 첫사랑
2020년 공지영 작가님의 신작 <먼 바다>는 이루지 못한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늘 그렇듯이 공지영 작가님의 소설 속 주인공은 현실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만 같습니다.
어쩐지 자꾸만 작가님의 얼굴을 떠올리게 됩니다.
아마도 이런 착각을 하는 독자가 저 혼자만은 아닌가 봅니다.
작가의 말을 통해,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처지가 슬프지만 이 소설은 당연히 허구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만큼 <먼 바다>는 생생하게, 주인공의 마음 속으로 우리를 끌고 갑니다.
첫사랑이라는 먼 바다에 다다르기 위하여.
누군가에겐 실감나지 않는, 너무 막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첫사랑을 단순히 연애의 기억이 아닌 오직 '사랑'에 초점을 맞춰본다면...
주인공 이미호는 40년 만에 첫사랑을 만나러 뉴욕에 가는 길입니다.
과연 그녀에게는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요?
"... 40년이 지나도 절대로 지워지지 않는 것들도 분명 있었다.
그날 그가 했던 말들.
... 그때 인생은 그녀에게 운명의 다트를 던지라고 강요하는 듯했다.
그녀는 그것들을 아직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아니 애써 기억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어린 시절 친구네 집 풍경들처럼 그렇게 자연스럽게
그때의 기억들은 그녀에게 수동태로 머물고 있었다.
오히려 가끔은 그녀가 그 기억들을 잊어버리려고 애쓴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그녀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그것은 수동태가 옳았다." (18-19p)
#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 (Gymnoedies)>
음악은 참으로 놀라운 힘을 지닌 것 같습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기쁨을 주고, 때론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가장 멋진 건 음악에 새겨진 기억들입니다. 그 음악을 즐겨듣던 시절이 떠오르고, 사람이 생각나고, 그때의 감정이 밀려옵니다.
주인공 미호에게 에릭 사티의 <짐노페디>는 고1의 첫 크리스마스, 그 밤에 그가 연주하던 순간으로 남아 있습니다.
"... 천천히 마치 망설이는 것처럼 <짐노페디>의 선율이 울릴 때,
누르던 손가락이 잠시 머뭇거리던 그 찰나찰나,
그는 그녀를 보라보며 미소 지었다.
피아노 한 음마다 별 하나가 떠서 그녀의 가슴으로 와서 박히는 듯했었다.
빛나고 아팠다." (226p)
책을 다 읽고나서야 음악을 들었습니다.
미호가 '빛나고 아팠다'라고 했던 그 마음이 무엇인지 조금 알 것 같습니다.
느리고 비통하게, 느리고 슬프게, 느리고 장중하게.
아름답고도 슬픈 피아노 선율이 두 사람의 이야기 같아서.
# 마르가리타(Margrita)
스무 살이 되고 처음 칵테일 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마르가리타는 특이하게 글라스 주위에 소금이 둘러쳐 있어서 신기했습니다.
이 칵테일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습니다.
"마르가리타"는 라틴어로 진주를 뜻하고, 스페인어로는 데이지(꽃)를 뜻하는 단어라고 합니다.
저한테 마르가리타는 스무 살의 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칵테일에 취했던 그날, 제법 기분 좋았던...
그러나 주인공 미호에게 마르가리타는 진짜 마르가리타였습니다.
"혹시 프로즌 마르가리타가 가능한가요?"
"프로즌 마르가리타, 데킬라 베이스인데 좋아하나 보지?"
"네, 좋아해요. 그날의 서해바다 빛깔 같아서."
"... 나는 프로즌 마르가리타 이야기를 할게요.
마르가리타는 1949년인가 로스앤젤레스의 한 바텐더가 고안해 냈대요.
젊은 시절 사랑했던 여자가 죽었고 그 이름이 마르가리타였다고 하네요.
그녀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이 칵테일을 만들었죠.
어쩌면 그녀가 이런 빛깔의 바다에서 죽었을까?
혼자 생각해 보곤 했어요.
마르가리타 마을에서 또 한잔 하며 보내는 하루
사라진 소금 쉐이커를 찾는데
누군가 어느 여인 탓이라 하네.
하지만 난 알지.
그건 그냥 누구 탓도 아니야." (224-225p)
# "No day shall erase you from the memory of time."
(시간의 기억에서 당신을 지우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주인공 미호는 뉴욕 맨해튼의 9/11 메모리얼 파크에서 위의 문장을 보게 됩니다.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 버질이라는 사람의 시구절.
우리에게는 첫사랑뿐 아니라 떠나간 모든 사랑이 닿을 수 없는 저 먼 바다 같습니다.
결코 지울 수 없는,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우리를 아프게 하지만 그 고통조차 감내하게 만듭니다.
<먼 바다>는 철썩철썩 파도처럼 밀려와 가슴 한 켠을 저리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