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호실의 원고
카티 보니당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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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실의 원고>는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진 유리병 편지 같아요.

그 유리병 편지를 건져 올린 사람은 바로 안느 리즈 브리아르예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느 리즈는 여행을 갔다가 보리바주 호텔 128호실의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원고를 발견했어요.

첫 번째 장이 끝나는 156쪽에 주소가 적혀 있어서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편지를 썼어요. 

사실 저한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안느 리즈의 남편과 아들처럼 그 원고를 가만히 놔 뒀을 가능성이 커요.

그런데 다 읽고 난 지금은 안느 리즈에게 굉장히 고마워요. 그녀의 모험심이 아니었다면 영영 묻혀버렸을 진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안느 리즈의 마음을 흔든 164쪽 여백에 쓰여 있던 글을 읽어 보았어요.


"어쨌든 무슨 상관인가? 거짓말도 결국에는 진실의 길에 다다르지 않는가?

내 이야기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결말이 다르다고 과연 의미도 다를까?

이야기가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잘 보여준다면.

우리는 때때로 진실을 말하는 자보다 거짓을 말하는 자를 통해 더 분명히 볼 수 있으니까."   (14-15p)


예술작품을 감상해도 단번에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처럼 자세히 들여다봐야 그제야 느끼는 둔감한 사람도 있는 법.

인정해야 될 것 같아요. 평소라면 안느 리즈 같은 친구를 오지랖 떤다고 구박했겠지만 이제는 그 오지랖이 용기라는 걸 말이죠.

저한테는 늘 그 용기가 부족했어요. 주저하고 망설이느라 못했던 것들이 마구마구 떠올랐어요.

안느 리즈의 첫 번째 편지를 받은 실베스트르 파메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어요. 그는 이 원고를 1983년 4월 3일, 몬트리올을 여행하다 잃어버렸다고 해요. 당시 스물세 살 청년이었던 실베스트르는 그 원고가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었대요. 또한 그가 쓴 부분은 156쪽까지였고, 적혀 있던 주소는 대부님의 연락처였어요. 원래 평론가 친구에게 보내려던 원고를 잃어버린 후 그의 작품 인생도 미완성인 채 30여 년이 흐른 거예요. 만약 그 원고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해보곤 했다는 실베스트르는 현재 은둔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안느 리즈의 편지 한 통이 그의 마음을 열었던 거예요. 

안느 리즈는 절친 마기와 함께 128호실 원고가 어떻게 보리바주 호텔에서 발견된 건지, 소설의 뒷부분은 누가 완성했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탐정 프로젝트를 펼치게 돼요.


<128호실의 원고>는 특이하게도 모두 편지 형태로 되어 있어요.

안느 리즈 브리아르가 익명의 누군가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를 시작으로 실베스트르는 안느에게, 안느는 친구 마기에게... 점점 편지를 주고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요.

보리바주 호텔에 원고를 둔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에게 원고를 건네준 사람, 그 이전에 또 어떤 사람...

안느 리즈는 자신이 알아낸 내용들을 꼼꼼하게 편지에 적어 실베스트르에게 전해줬고, 실베스트르는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게 됐어요. 처음에 당황하다가 호기심이 커지고, 반발하며 화를 내다가, 나중에는 안느 리즈의 편지가 자신에게 준 영향을 인정하게 됐어요. 그는 30여 년만에 자신의 글을 되찾으면서 삶의 의욕까지 되찾았어요. 

놀랍게도 128호실의 원고는 마치 영적 스승처럼 기나긴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삶의 변화를 주었어요. 가장 값진 변화는 그 원고를 쓴 실베스트르 당사자일 것 같아요. 읽는 내내 128호실의 원고 내용이 궁금했어요. 도대체 어떤 이야기길래 이토록 강력한 힘을 지녔을까라고.

결국 이 원고의 비밀을 찾았어요. 이 책을 끝까지 읽고나면 다들 공감하게 될 거예요. 모든 단서가 거기 있었는데, 역시나 둔감한 저는 마지막까지 읽고나서야 알 수 있었어요.


"저는 삶의 단편들을 결코 기억 저편에 묻어두지 않고 

마음 속에 간직해야만 현재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311p) 

안느 리즈의 말처럼 삶의 단편들을 생생하게 느끼며 오늘을 살아야겠어요. 두근두근 설렘을 느꼈어요.

진짜 놀라운 건 이 책의 이야기가 인명과 지명만 실제와 다를 뿐 거의 대부분 진짜 있었던 일이란 거예요. 실화냐고요? 네, 소설이 아니라 실화였어요.

카티 보니당, 당신의 이름을 기억해둘래요. <128호실의 원고>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그 잃어버린 원고였어요. 

부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냥 넘기지 마시고, 꼭 읽어보세요. (왠지 한때 유행하던 행운의 편지가 생각나서 흠칫 놀랐네요. 안 읽는다고 뭔 일이 생기진 않아요. 중요한 건 아무 일도 안 생긴다는 거예요.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가 없을테니까. 진짜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읽어보세요. 너무 설명이 길면 매력 없죠?)

그러니까 마지막 이 부분은 제가 익명의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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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김누리 지음 / 해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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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JTBC <차이나는 클라스>를 봤어요.

특집 공개 강연 마지막 4탄(147회) 독일 전문가 김누리 교수님의 '새로운 나라를 만든 독일의 교육'이 주제였어요.

우와, 정말이지 놀라운 강연이었어요. 

한국의 교육을 독일이라는 거울에 비추어 풀어낸 내용들이 가슴을 찌릿하게 만들었어요.

"...사실은 한국 교육에서 단 한 번도 인간을 기르는 교육을 해 본 적이 없어요."

이 한 마디가 가슴을 꿰뚫는 핵심이었어요. 우리가 왜 불행한 나라에 살고 있는지, 그 이유를 명백히 깨닫게 됐어요.

작년에 방송된 <차이나는 클라스> 131회, 132회까지 찾아 봤어요.

무슨 말이 필요할까 싶네요. 일단 보세요. 꼭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안 본 사람에게 추천해주세요. 강력추천이요.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는 김누리 교수님의 강연을 풀어 쓴 강연록이에요.

JTBC <차이나는 클라스> 131회 '독일의 68과 한국의 86'편과 132회 '우리의 소원은 통일?' 편을 녹취하여 최대한 방송 내용을 그대로 살리고, 좀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을 보충했다고 해요. 방송 편집 과정에서 삭제된 내용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까지 담아내고 있어요.

당연히 강연을 먼저 봐도 좋겠지만 순서와 상관 없이, 강연과 책 모두 꼭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한민국을 더 나은 사회를 바꿀 사람은 바로 우리들이에요. 누가 대신 해주지 않아요.

우리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살펴보고, 문제점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부터가 변화의 시작일 거예요.

따지고 보면 촛불 혁명을 기점으로 민주시민의 정신이 깨어났다고 볼 수 있어요. 그러나 아직 우리의 혁명은 도착하지 않았어요. 그건 우리 사회가 광장 민주주의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뿌리 깊은 유교 사상으로 인해 일상 민주주의는 여전히 낙후되었기 때문이에요.

독일 전문가 김누리 교수님이 독일을 거울 삼아 이야기하는 건 독일과 우리의 현대사 궤적이 유사하기 때문이에요. 우리가 원하는 건 헬조선을 벗어나 유토피아로 가는 것이 아니라 독일처럼 '상식이 통하는 나라'인 거예요. 독일은 교육을 통해 상식적인 나라를 만들었고, 한국은 교육을 통해 자본주의 노예를 만들었어요.

한국 교육은 경쟁의 덫에 걸려 있어요. 학교에서는 성적순으로 학생을 줄 세우고, 교사의 체벌은 '사랑의 매'로 미화되었어요. 제가 강연에서 '인간을 기르는 교육'이 전혀 없었다는 말에 공감하면서 분노했던 건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겪었던 인권침해가 떠올랐기 때문이에요. 지금은 체벌이 금지되었지만 여전히 수준 이하의 교사들이 비윤리적인 행동으로 아이들의 인권을 훼손하고 유린하고 있어요. 자녀를 키우는 부모로서 교육 문제 때문에 한국을 떠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왜 한국에서 교육은 입시로 연결되는 것인지, 도대체 교육개혁은 언제쯤 가능한 것인지 답답했어요. 학부모들은 유치원이나 학교의 부당한 조치에 대해 함구하는 이유를 내 아이가 피해를 당할까봐 걱정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해요. 부모 세대들이 받아온 교육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다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라는 인식이 강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근본적으로 한국 교육을 바꿀 생각은 못하고, 기존 시스템에 맞춰 가는 데에만 급급했던 것 같아요.

김누리 교수님을 통해 본 독일의 교육은 우리 교육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줬어요. 올바른 민주시민은 타고나는 게 아니라 배움을 통해 만들어져요. 

기형적인 국가, 부조리한 사회를 만든 것은 남한과 북한의 냉전체제예요. 따라서 이를 해결하려면 냉전체제가 시급히 해소되어야 해요.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통일이 아니라 냉전체제 극복이에요. 저자는 한 신문 컬럼에서 "문 대통령은 해방 이후 처음으로 '통일을 안 할 수도 있다'라는 말을 명시적으로 표명한 최초의 대통령이다"라고 쓴 적이 있다고 해요. "남한과 북한은 함께 살든 따로 살든 서로 평화롭게 공동 번영하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  ( 199p)

대통령 말의 핵심은 '평화가 통일보다 우선한다'는 거예요. 평화우선론은 지금 한국 사회에 필요한 가치와 방향이라고 생각해요.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중국이나 특정지역을 도발하며 가짜뉴스로 분열을 조장하는 무리들을 목격했어요. 다함께 위기를 극복해야 하는 중대한 시기에 더욱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다는 걸, 우리가 깨닫는 순간 바꿀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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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길을 잃는 이상한 여자 - 상상할 수 없는 독특한 뇌를 가진 사람들
헬렌 톰슨 지음, 김보은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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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과학은 놀랍고도 신기한 모험의 세계 같아요.

직접 모험을 떠날 수는 없으니 연구자들이 들려주는 인간의 뇌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최신 뇌과학 관련한 책들을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요.

<집에서 길을 잃는 이상한 여자>라는 책 제목을 보는 순간, 예전에 읽었던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가 떠올랐어요.

저자 헬렌 톰슨은 신경과학 학위와 과학 커뮤니케이션 석사 학위를 마친 뒤 <뉴사이언티스트> 잡지의 뉴스 편집자가 되었어요. 

프리랜서 기자가 된 지금은 BBC와 <가디언>지를 비롯한 다양한 언론 매체에 글을 기고하고 있어요. 특히 뇌, 그 중에서도 특이하고 기이한 뇌는 그를 매혹하는 분야라서,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 신경학회에 참석하고 과학 논문과 기발한 의학 잡지를 살폈다고 해요. 그러다가 문득 질병을 앓는 당사자와 주변인을 직접 만나서 조사한다면 어떨까라는 생각에 이르렀대요. 이때 떠오른 인물이 바로 올리버 색스였다고 해요. 1985년 출간된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색스는 자신의 사례 연구 대상자를 '상상할 수 없는 세계의 여행자들'이라고 불렀어요. 그로부터 30여년이 흘렀고 색스의 이런 발상을 다시 점검할 시간이 되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이 책은 올리버 색스의 뒤를 잇는 새로운 여정이라고 할 수 있어요.

저자는 병원환경과 신경학자의 시선에서 완전히 분리된, 즉 환자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친구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싶었다고 이야기해요.

그래서 과학자들이 놓친 부분을 짚어내고 있어요. 관찰해야 할 환자가 아니라 공감해줄 친구로 만났을 때에만 들을 수 있는 삶의 이야기들이 있어요.

어쩌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그러한 이야기였던 게 아닌가 싶어요.

세계에서 가장 놀라운 뇌를 탐구하는 일은 연구자들의 몫이겠지만 그들이 밝혀낸 뇌의 비밀을 아는 건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에요.

나 자신을 이해하고 더 나아가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열쇠인 것 같아요.

사람마다 세상을 보는 시선이 다른 이유는 바로 개성 있는 뇌 덕분이었어요. 인지 능력의 차이가 있다는 걸 알면 당연한 결과일 거예요.

과연 사람의 뇌가 우리가 믿는 것처럼 정상인지, 그 정상의 기준은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어요.

책에 소개된 사례들은 너무나 뚜렷한 증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상한 뇌라고 규정할 수 있어요. 이 이상한 뇌들은 소위 정상 뇌의 비밀을 들여다보는 독특한 창 역할을 하고 있어요. 사회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두려워하라고, 다른 사람이 보지도, 듣지도 않는 것을 보고 듣는 것을 정신 불안의 징후로 여기라고 가르쳐요. 하지만 상상 그 이상의 기이한 뇌를 접하다 보면 단순히 비정상이 아닌 잠재된 능력의 발현으로 볼 수 있어요. 그만큼 인간 뇌에 얽힌 복잡한 수수께끼는 앞으로도 계속 풀어가야 할 끝없는 여정이에요. 책에 나온 아홉 명의 사례는 정말 놀라웠어요. 

자신이 살아온 날들을 빠짐없이 기억할 수 있는 밥, 방향 감각이 사라지는 질병 때문에 자신의 집에서도 길을 잃는 샤론, 희귀한 공감각을 지닌 탓에 사람을 볼 때 색을 인지하는 루벤, 뇌종양으로 하룻밤 사이에 인격 변화를 보인 토미, 아무도 들리지 않는 소리를 혼자만 듣는 청각 장애인 실비아, 동물화 망상증으로 자신을 호랑이라고 생각하는 마타,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듯 내 몸에서 분리된 느낌인 이인성 증상을 겪는 루이즈, 자신이 죽었다고 믿는 망상인 코타르 증후군(일명 '걷는 시체 증후군')을 앓는 그레이엄, 거울 뉴런계의 활성이 유달리 발달하여 타인이 느끼는 촉각 감각과 감정을 보면 자신도 똑같이 느끼는 조엘.

아직까지 그들이 겪는 고통을 다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이 너무나 안타까웠어요. 사실 처음에는 이상한 뇌에 관한 호기심이 더 컸는데 다 읽고나니 알 것 같아요. 가장 먼저 밥, 샤론, 루벤, 토미, 실로, 실비아, 마타, 루이즈, 그레이엄, 조엘, 바스와 그의 가족, 친구들에게 감사를 전하는 저자의 마음처럼 친구의 시선으로 보게 되었어요. 그들을 통해 우리도 특별한 뇌를 가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우리는 곧 우리의 뇌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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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차의 애프터 파이브 - 막차의 신, 두 번째 이야기
아가와 다이주 지음, 이영미 옮김 / 소소의책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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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와 다이주의 <첫차의 애프터 파이브>는 <막차의 신> 두 번째 이야기라고 해요.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더라니.

<막차의 신>의 책 표지가 참 특이했어요. 겉표지는 캄캄한 밤 전철 풍경인데, 속표지는 환해서 새벽 첫 차 같다고 느꼈거든요.

역시나 후속작을 염두에 둔 작가의 센스였을까요. 암튼 이 소설도 첫차를 타는 사람들이 주인공이에요. 저마다 사연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 다섯 편이 실려 있어요.

매일 전철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나요. 

아가와 다이주는 그 평범하면서도 낯선 타인들의 삶에 주목하고 있어요. 한 번도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

첫차와 막차는 똑같은 전철이지만 시간이 주는 의미로 인해 전혀 다른 공간으로 바뀌는 것 같아요. 새벽 5시가 마치 오후 5시처럼 느껴지는 이유를 곧 알게 될 거예요.

<첫차의 애프터 파이브>의 주인공 시미즈 소지로는 막차를 타고 출근했다가 첫차를 타고 퇴근해요. 한밤중에 러브호텔 청소를 하는 임시 직원이에요.

얼마 전까지는 대기업의 유능한 상사맨으로 해외 생활을 주로 했던 그가 호텔 청소부가 된 사연은 너무도 기가 막혀서 막 화가 나요. 그러니 당사자가 느꼈을 분노와 절망감이은 오죽했을까 싶어요. 어찌됐든 그는 일자리를 얻기 위해 자신의 화려한 이력을 숨겼어요. 간간히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누군가를 돕게 되면 그날이 운이 좋은 날이라며 기뻐하는 사람이에요. 소심하고 착한 남자 소지로는 함께 일하는 야가미 씨에게 말 한 마디 건네는 것도 조심스러워요. 그런데 오늘은 퇴근길에 노래를 흥얼대며 즐거워하는 야가미 씨를 보고 용기를 내어 같이 아침을 먹자고 제안했어요. 야가미 씨가 흔쾌히 승낙했어요. 오호, 진짜 운이 좋은 날인가봐요. 무엇보다도 야가미 씨의 말이 가슴에 콕 와닿았어요. 첫차는 막차와 달리 다음 차가 또 온다는 말이 왠지 두 사람에게 주어진 새로운 기회 같아서 특별했어요. 


"이렇게 얘기하다 전철 놓치는 거 아닌가?"

"전혀 문제없어요. 막차랑 달라서 첫차는 다음 차가 또 오니까."  (54p)


"시각은 오전 5시, 밤에 일한 사람에게는 지금부터가 애프터 파이브인 것이다." (55p)


<스탠 바이 미>는 도쿄역 부근 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의 이야기예요. 과연 우연일까, 운명일까. 

앗, 로맨스는 절대 아니에요. 오히려 뮤지션을 꿈꾸는 이십대 여성과 오십대 노숙남이 기타라는 공통점으로 소통하는 휴먼 드라마예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이와타니 로코는 낯선 도쿄 한복판에서 중학생, 기껏해야 고등학생 세 명에게 더럽다는 이유로 구타당하는 노숙자 와타나베 씨를 구해줬어요. 실제로 와타나베 씨는 몹시 심한 냄새가 났어요. 목욕탕에 가고 싶어도 너무 더러워서 들어갈 수 없다는 그를 씻을 수 있게 도와주고 새 옷을 사주는 로코. 그건 와타나베 씨가 놀라운 기타 실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에요. 깨끗해진 와타나베 씨가 기타 연주를 하고 로코가 노래를 불렀어요. 사실 이와타니 로코가 도쿄에 온 이유는 버스킹을 하기 위한 거였는데 혼자서는 못했을 거예요. 놀랍게도 노숙자 와타나베 씨의 도움으로 도쿄에 도착한 지 열네 시간만에 첫 버스킹을 성공했어요. 새벽 5시, 도쿄역으로 첫차를 타러 가는 사람들 앞에서 부른 섯노래는 바로 벤 E. 킹의「스탠 바이 미 Stand By Me」였어요. 


밤이 찾아와 지상에 어둠이 깔리고, 달빛만 비춰도 난 두렵지 않아. 두렵지 않아.

당신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함께 올려다보는 저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해도 

산이 깎여 바다로 가라앉는다 해도 난 울지 않아. 절대 울지 않아. 눈물도 흘리지 않아. 

그래, 당신만 내 곁에 있어준다면.

달링, 달링, 

곁에 있어줘, 내 곁에 있어줘.  


저도 이 팝송 멜로디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가사 내용은 <스탠 바이 미>를 읽으면서 진심으로 깨닫게 됐어요. 

아하, 이거였구나...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은 모두 막차로 돌아가고, 돌아갈 곳 없는 와타나베 씨와 돌아갈 곳을 버리고 온 로코는 첫차가 오는 시각에 함께 하고 있어요.

자신감을 잃고 약해졌던 로코처럼 우리는 외롭고 힘든 순간에 당신만 곁에 있어준다면 이겨낼 수 있어요.


<밤의 가족>의 주인공 마리아, 아니 노리코는 어떤 상황에서든 스스로 인생을 개척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했어요. 바로 새벽 동이 트고, 첫차가 움직이는 시각, 그때의 기분이 뭔지 알 것 같았어요. 눈앞의 현실은 괴롭지만 포기하지 않는 노리코, 아니 마리아가 진짜 멋져 보였어요. 

부디 꼭 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진심으로 응원했어요.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오늘 밤을 지새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뭘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봐?"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다양한 사람들이 이 거리에서 밤을 지새우는구나 싶어서."

"다양한 사람들이 있으니까 좋지. ... 나보다 훨씬 더 위태로운 사람도 있거든. 

말 못할 사정을 안고 사는 사람도 아주 많고, 이게 당연하다느니, 보통은 이렇다느니 하는 법칙도 없잖아.

그래서 이 거리에 있으면, 신이 너도 그렇게 살아가면 된다고 말해주는 기분이 들어.

내 삶의 방식도 잘못된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  (262-2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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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째 방 - 개정증보판
오쓰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고요한숨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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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츠이치의 <일곱 번째 방>은 2007년 출간된 《ZOO》의 개정판이라고 해요.

<옛날 저녁놀 지던 공원에서>가 새롭게 추가되어 모두 열한 편의 작품이 실려 있어요.

일본 소설계에서는 오츠이치를 "장르를 나눌 수 없는 작가"라고 부르며, 그의 소설 세계를 오츠이치 월드라는 말로 표현한다고 해요.

사실 이 책 한 권으로 오츠이치 월드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다만 확실한 건 강렬한 향기처럼 기묘한 느낌을 남긴다는 거예요.

갑자기 눈앞에 쿵! 뭔가 떨어졌을 때의 충격처럼, 잠시 넋이 나간다고 해야 하나.

독특한 설정 혹은 상황이 만들어낸 감정들 때문에 등장인물에게 몰입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일곱 번째 방>에서는 열 살 소년과 그의 누나가 납치된 이야기예요.

소년이 기억하는 건 가로수 길을 누나와 함께 걷고 있었다는 것뿐이에요. 엄마가 장을 다 볼 때까지 남동생을 돌봐야 하는 누나와 굳이 자신을 돌볼 필요 없다고 여기는 소년 사이가 유쾌할 리 없겠죠. 여느 남매처럼 투닥투닥, 말다툼을 하며 걷고 있었는데, 누군가 머리를 내리쳤고 깨어보니 이상한 방에 갇히게 된 거예요.

도대체 누가 왜 어린 남매를 가둔 걸까요, 과연 둘은 그 방을 나갈 수 있을까요.

단순히 사이코패스 범죄자의 노리개가 된 거라고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묘한 기시감을 느꼈어요. 죽음, 그 자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문득 떠올랐어요. 원래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었다면 체감하지 못했을 죽음의 공포를, 일곱 개의 방에 갇힌 사람들은 직면하고 있어요.

마지막 순간의 선택은... 나였다면.

<SO-far>는 이제 곧 중학생이 되는 소년이 유치원 다니던 시절에 겪었던 불가사의한 경험에 관한 이야기예요.

먼저 제목에 대한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 SO(significant other) : ① [사회] 중요한 타인 (부모, 동료 등)  ② [미약식] 배우자, 연인 (약:SO)

⊙ far : [거리] 먼 곳으로(에) , (멀리) 떨어져서

유령의 존재를 믿는다면 소년의 경험이 낯설지는 않을 거예요. 다만 이 작품에서 유령은 곁에 있어도 존재감 제로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 같아요.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아프게 하는 법. 

<ZOO>에서 주목할 건 주인공의 심리 상태인 것 같아요. 범인은 바로 너!

한 사람의 내면 세계를 들여다보는 듯한 묘사가 소름끼쳤어요. 

<양지 暘地 의 시 詩>는 SF 소재를 통해 인간의 삶과 죽음을 그려내고 있어요. 양지와 음지를 오가며 감사와 원망을 동시에 품고 사는 것, 그 모순된 감정이 너무나 인간적이라서, 이름 없는 그녀에게 공감했어요.

<신의 말>은 유일무이한 초능력을 가진 주인공의 이야기예요. 마치 초능력이 핵폭탄 같이 보였어요. 언제든지 모든 걸 파괴해버릴 것 같은 살상 무기.

만약 이런 초능력이 존재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를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어요. 

<카자리와 요코>는 홀어머니와 살고 있는 쌍둥이 자매 요코와 카자리의 이야기예요.

똑같은 외모를 가진 일란성 쌍둥이 중 언니 요코는 엄마에게 심한 학대를 당하고 있어요. 반면 카자리는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어요.

왜? 그 이유는 알 수 없어요. 중요한 건 엄마의 학대로 인해 요코는 정말 남들에게 이상한 아이 취급을 당한다는 거예요. 늘 구부정한 자세로 고개를 떨군 음울한 아이.

엄마는 요코를 함부로 때릴 뿐 아니라 의식주 모든 걸 제대로 해주질 않아요. 교복도 요코 것만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요. 카자리는 공주, 요코는 거지인 거죠. 카자리는 엄마가 자신만 아낀다는 걸 알고 요코를 무시하고 괴롭혀요. 결말을 보고 소름돋았어요. 

<Closet>과 <혈액을 찾아라>는 탐욕스런 인간 민낯이 드러나는 미스터리물이에요. 반전의 결말은 보너스. 

<차가운 숲의 하얀 집>과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를 굳이 묶어서 설명하자면, '괴물을 만드는 건 인간 자신'이라는 거예요. 끔찍한 범죄 사건을 접할 때마다 그 내면에 숨겨진 비극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아요.

<옛날 저녁놀 지던 공원에서>는 짧지만 강렬한 잔상을 남기는 이야기예요. 뒤돌아 보지 말라고 하면 돌아보고 싶은 인간 심리, 왠지 기억나지 않는 공포까지 끌어올리는 상상력이 있는 것 같아요. 그것이 오츠이치의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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