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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실의 원고
카티 보니당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3월
평점 :
품절
<128호실의 원고>는 세상이라는 바다에 던져진 유리병 편지 같아요.
그 유리병 편지를 건져 올린 사람은 바로 안느 리즈 브리아르예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느 리즈는 여행을 갔다가 보리바주 호텔 128호실의 침대 옆 협탁 서랍에서 원고를 발견했어요.
첫 번째 장이 끝나는 156쪽에 주소가 적혀 있어서 누군지도 모를 사람에게 편지를 썼어요.
사실 저한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안느 리즈의 남편과 아들처럼 그 원고를 가만히 놔 뒀을 가능성이 커요.
그런데 다 읽고 난 지금은 안느 리즈에게 굉장히 고마워요. 그녀의 모험심이 아니었다면 영영 묻혀버렸을 진실을 알게 됐으니까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안느 리즈의 마음을 흔든 164쪽 여백에 쓰여 있던 글을 읽어 보았어요.
"어쨌든 무슨 상관인가? 거짓말도 결국에는 진실의 길에 다다르지 않는가?
내 이야기가 진실이든 거짓이든 간에 결말이 다르다고 과연 의미도 다를까?
이야기가 진실이냐 거짓이냐는 상관없다. 어느 쪽이든 내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지금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잘 보여준다면.
우리는 때때로 진실을 말하는 자보다 거짓을 말하는 자를 통해 더 분명히 볼 수 있으니까." (14-15p)
예술작품을 감상해도 단번에 감동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저처럼 자세히 들여다봐야 그제야 느끼는 둔감한 사람도 있는 법.
인정해야 될 것 같아요. 평소라면 안느 리즈 같은 친구를 오지랖 떤다고 구박했겠지만 이제는 그 오지랖이 용기라는 걸 말이죠.
저한테는 늘 그 용기가 부족했어요. 주저하고 망설이느라 못했던 것들이 마구마구 떠올랐어요.
안느 리즈의 첫 번째 편지를 받은 실베스트르 파메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어요. 그는 이 원고를 1983년 4월 3일, 몬트리올을 여행하다 잃어버렸다고 해요. 당시 스물세 살 청년이었던 실베스트르는 그 원고가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이었대요. 또한 그가 쓴 부분은 156쪽까지였고, 적혀 있던 주소는 대부님의 연락처였어요. 원래 평론가 친구에게 보내려던 원고를 잃어버린 후 그의 작품 인생도 미완성인 채 30여 년이 흐른 거예요. 만약 그 원고를 잃어버리지 않았다면 인생이 어떻게 됐을까 상상해보곤 했다는 실베스트르는 현재 은둔자의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안느 리즈의 편지 한 통이 그의 마음을 열었던 거예요.
안느 리즈는 절친 마기와 함께 128호실 원고가 어떻게 보리바주 호텔에서 발견된 건지, 소설의 뒷부분은 누가 완성했는지를 알아내기 위한 탐정 프로젝트를 펼치게 돼요.
<128호실의 원고>는 특이하게도 모두 편지 형태로 되어 있어요.
안느 리즈 브리아르가 익명의 누군가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를 시작으로 실베스트르는 안느에게, 안느는 친구 마기에게... 점점 편지를 주고 받는 사람들이 늘어나요.
보리바주 호텔에 원고를 둔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에게 원고를 건네준 사람, 그 이전에 또 어떤 사람...
안느 리즈는 자신이 알아낸 내용들을 꼼꼼하게 편지에 적어 실베스트르에게 전해줬고, 실베스트르는 복잡한 심경을 털어놓게 됐어요. 처음에 당황하다가 호기심이 커지고, 반발하며 화를 내다가, 나중에는 안느 리즈의 편지가 자신에게 준 영향을 인정하게 됐어요. 그는 30여 년만에 자신의 글을 되찾으면서 삶의 의욕까지 되찾았어요.
놀랍게도 128호실의 원고는 마치 영적 스승처럼 기나긴 여정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삶의 변화를 주었어요. 가장 값진 변화는 그 원고를 쓴 실베스트르 당사자일 것 같아요. 읽는 내내 128호실의 원고 내용이 궁금했어요. 도대체 어떤 이야기길래 이토록 강력한 힘을 지녔을까라고.
결국 이 원고의 비밀을 찾았어요. 이 책을 끝까지 읽고나면 다들 공감하게 될 거예요. 모든 단서가 거기 있었는데, 역시나 둔감한 저는 마지막까지 읽고나서야 알 수 있었어요.
"저는 삶의 단편들을 결코 기억 저편에 묻어두지 않고
마음 속에 간직해야만 현재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에요......" (311p)
안느 리즈의 말처럼 삶의 단편들을 생생하게 느끼며 오늘을 살아야겠어요. 두근두근 설렘을 느꼈어요.
진짜 놀라운 건 이 책의 이야기가 인명과 지명만 실제와 다를 뿐 거의 대부분 진짜 있었던 일이란 거예요. 실화냐고요? 네, 소설이 아니라 실화였어요.
카티 보니당, 당신의 이름을 기억해둘래요. <128호실의 원고>는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전하는 그 잃어버린 원고였어요.
부디 이 글을 읽는 분들은 그냥 넘기지 마시고, 꼭 읽어보세요. (왠지 한때 유행하던 행운의 편지가 생각나서 흠칫 놀랐네요. 안 읽는다고 뭔 일이 생기진 않아요. 중요한 건 아무 일도 안 생긴다는 거예요.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가 없을테니까. 진짜 삶의 변화를 원한다면 읽어보세요. 너무 설명이 길면 매력 없죠?)
그러니까 마지막 이 부분은 제가 익명의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