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리된 기억의 세계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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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들면서 두려운 게 생겼어요.

기억을 잃는다는 것.

치매.

단순한 건망증과는 달리, 기억이 조금씩 사라지다가 어느 순간 '나'라는 존재까지 소멸되는 병.

궁금해요.

만약 모든 기억을 잃는다면, 그는 과연 누구라고 규정해야 할까요.


고바야시 야스미의 <분리된 기억의 세계>는 SF소설이에요.

어느날 갑자기 모든 사람들의 장기 기억이 사라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여고생 유키 리노는 자신의 방에서 컴퓨터에 적힌 글들을 읽고 기분이 나빠졌어요.

시간별로 쓴 글들을 보면 분명 자기가 쓴 게 맞는데,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 거예요. 이러다가 평생 글을 쓰고 읽는 일을 한없이 반복하면 어쩌지?

그러다 곧 간단한 해결책이 있음을 깨닫고, 문장 제일 처음에 다음과 같이 적어 넣었어요.


이유는 뭔지 모르겠으나 기억이 이어지질 않는다. 

다음 문장도 그런 사실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것뿐. 다 읽을 필요는 없다. (14p)


냉철한 사고력을 가진 리노는 현재 상황을 빠르게 판단했어요. 방의 위치나 기본적인 정보는 다 기억이 나는데, 바로 컴퓨터에 글을 적기 시작한 시점부터 반복적으로 기억이 사라지고 있다는 걸. 또한 이 증상은 자신뿐 아니라 엄마 미사키 그리고 TV 속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겪고 있다는 걸.

문제는 그 사실을 깨닫고 나면 다시 잊어버린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의 기억이 10분마다 사라지고, 새롭게 리셋되고 있어요.

정말 심각한 건 사회 시스템이 마비되는 것.

원자력 발전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도 10분마다 기억이 사라진 탓에 제대로 일을 못하고 있어요. 경보가 울렸는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윽, 끔찍한 일이 벌어지겠죠.


맨처음에 여고생 유키 리노가 등장한 건 혼란에 빠진 세계를 구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를 했기 때문이에요.

리노는 자신이 발견한 내용을 SNS에 올렸어요. 모든 기억이 10분 남짓의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므로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노트에 중요한 일을 기록할 것, 뭐가 중요한지 모를 때는 생각나는 순서대로 적을 것, 메모 뒤에는 반드시 날짜와 시간을 기록할 것, 가능한 많은 사람에게 이 사실을 알릴 것. 

자,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됐어요. 분리된 기억의 세계로~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렸다면 인류는 생존을 위해서 무엇을 할까요. 그다음 단계는 사라지는 기억들을 저장하는 방법을 찾아냈어요.

대망각 이후에 탄생한 새로운 세대의 아이들은 자신의 뇌로 장기 기억을 수행할 수 없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반도체 메모리에 의존해서 살았어요. 그들에게 기억이란 반도체 메모리였어요. 반도체 메모리는 매우 작아졌고, 교체를 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 중 원하는 곳에 소켓을 설치하여 메모리를 삽입할 수 있게 되었어요.

마치 인공지능 로봇처럼 메모리를 넣었다가 뺄 수 있게 된 거죠. 그렇다면 그 메모리로 인해 벌어지는 일들이 생기겠죠?

다양한 에피소드로 구성된 이야기들이 흥미로운 건 그 가상의 상황들 속에 '나'를 대입하게 된다는 거예요. 마냥 즐길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어요.


가끔 과학의 발전이 무섭게 느껴져요. 왠지 브레이크가 고장난 차 같아서. 아무도 굴러가는 차를 막지 못하는데, 더 심각한 건 멈춰야 할 이유를 모른다는 거예요.

저 역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이 소설을 읽으면서 '멈춰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아무리 선의의 목적으로 개발된다고 해도 결과적으론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이 개입하는 순간 변질될 거예요. 지금도 최첨단 기술을 악용하는 범죄자들이 있잖아요. 어떻게 해야 막을 수 있을까요. 당신이라면?


내가 할 수 있을까?

아니, 해보기도 전에 포기해선 안 돼. 이건 누군가 해야만 하는 일이야.

그것도 한둘이 해봤자 의미가 없어. 가능한 많은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해.

지금 포기하면 모든 게 끝날 수 있어.

   - 유키 리노   (5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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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면도시 Part 1 : 일광욕의 날
김동식 외 지음 / CABINET(캐비넷)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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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SF소설이에요. 

지구가 아닌 달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

<월면도시>라는 동일한 세계관을 배경으로 여섯 명의 작가가 각자 개성 넘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먼저 '일광욕의 날'이 무엇인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아요.

미래 시점에서 이십년 전, 하늘에서 쏟아진 미확인 이상광선의 노출로 많은 시민들이 피해를 본 유례없던 재난의 날이 바로 '일광욕의 날'이에요.

센트럴력 122년.

이때 월면도시 전체가 입은 피해가 엄청났어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상광선에 포함된 방사선 노출로 태어난 돌연변이들은 버림받아 도시의 뒷골목이나 지하수도, 폐기구역 쪽으로 흘러들어갔어요. 센트럴에 조사국과 특수조사관이 생겨나게 된 직접적인 이유예요. 

일광욕의 날이 일어난 이후 도시 곳곳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들이 나타났어요. 

과연 센트럴이 감추고 있는 비밀은 무엇일까요.

여섯 편의 이야기는 '일광욕의 날'로부터 20년 후에 월면도시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요.

김동식 작가님의 <재현>은 달의 변방, 위성도시 '마레'를 대표하는 세 가문의 놀라운 유산을 보여주고 있어요. 평생 지구인으로 살아온 사람으로서 약간 생경한 기분이 들었던 것 같아요. 달의 시민으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재현해준다는 점에서 특이했어요.

정명섭 작가님의 <진시황의 바다>는 SF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느낌이었어요. 달의 선주민들과 이주민 그리고 로봇 안드로이드인까지, 우주에 존재하는 것들을 어떤 기준으로 정의내려야 하는지 혼자 고민했어요. 물론 결론을 내리진 못했지만 잠시 인간의 관점을 탈피해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아요.

김선민 작가님의 <제13호>는 제목에서 암시하듯 불길한 결말이에요. 결말보다 중요한 건 그 과정이니까. 여기에 나오는 외계문자가 약간 그리스 라틴어 비슷하게 생긴 문자인데, 기괴한 주문처럼 들린다고 해서 무척 궁금했어요. 과연 어떤 소리로 들릴까요. 

홍지운 작가님의 <하드보일드와 블루베리타르트>는 디즈니 영화 '주토피아'가 연상되면서 무척 재미있었어요. 사립탐정인 주인공은 뱀 수인이에요. 뱀의 모습을 한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인간의 지능을 가진 뱀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주인공이 세들어 사는 집의 주인이 토끼 할머니인데, 왠지 주디 생각이 났어요.

김창규 작가님의 <가마솥>은 구수한 제목과는 달리 매우 SF적인 요소가 빛나는 내용이었어요. 문차일드를 비롯한 달의 생명체와 외계인에 관한 상상을 자극했어요.

최지혜 작가님의 <예약손님>은 우리가 상상했던 온갖 외계인의 실체를 독특한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어요. 외계인과 접촉 혹은 소통이 이뤄진다면 아마도 이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 의미에서 모든 작품이 기존의 상상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묘한 SF적인 공감을 불러왔던 것 같아요.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할 것만 같은 월면도시로의 여행, 잘 다녀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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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과 오해
E, Crystal 지음 / 시코(C Co.)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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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많고 많은, 널리고 널린... 비밀과 오해

어떤 이야기인지 시작도 하기 전에 공감해버렸어요.

굳이 숨기려고 한 게 아닌데 비밀을 갖게 되고, 누군가는 오해하게 되는 상황들이 생기곤 하죠.

아마 세상에 모든 게 다 사라져도 '비밀과 오해'는 끝까지 남지 않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아무도 완벽하게 솔직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애초부터 우리는 자기 마음조차 잘 몰랐으니, 그걸 어떻게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겠어요.


... 그 일이 있고부터 세주와 유주와 비주는 무얼 드러내고 숨겨야 하는지도 

알 수 없는 이상한 자매가 되어버렸다. 

너무 무서운 일이 순식간에 자매에게 닥쳤고, 자매는 산산조각이 났다.

그리고 서로에 대한 걱정과 불안, 염려까지도 감추는 데 급급해져 버렸다.

언제나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전부 별일 아닌 것처럼.  (175p)


<비밀과 오해>는 세 자매에 관한 이야기예요.

홍세주, 홍유주, 홍비주.

2년 전 그 일이 있고나서, 세 자매는 각자 떨어져 살았어요. 서로 마주보기 힘들어서 피했어요.

그 뒤로 한 번도 그때의 일을 입밖에 낸 적이 없었어요. 끔찍한 기억들을 마음에 묻었다고 해야 하나?

그러나 기어코 그 마음에 상처를 내고, 기억을 끄집어내려는 사람들이 있어요.

아무런 설명 없이, 세 자매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저 역시 똑같은 오해를 했던 것 같아요.

세 자매가 함께 살던 집에는 막내 비주 혼자 지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충수염으로 입원하게 되면서 모두 모이게 됐어요.

인생의 모순인 것 같아요. 분명 안 좋은 일인데, 그 덕분에 모였으니 아주 나쁘다고 볼 수 없는 일.

비밀과 오해 역시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비밀이 밝혀져서 받을 충격과 비밀을 몰라 오해하며 괴로운 것과 어느 쪽이 더 나은 걸까요.


"예전에 들은 적이 있어. 충수염 진단은 100%까지 끌어올리기에 한계가 있대.

80%까지 의심되면 그냥 수술한다는 거야. 진단 정확도를 높이려다 충수돌기가 터져 복막염으로까지 번지면

환자가 위험하니까."  비주가 뜬금없이 말을 꺼냈다.

"그리고 막상 수술에 들어가선 설령 충수가 정상이라 하더라도 충수를 자른대."

유주는 비주가 무슨 말을 하나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봤다.

"난 그 충수가 우리 세 자매 중 나 같다는 생각이 들어."

"......"

"일단 의심되면 그냥 떼어버리는 거지. 없어져도 상관없으니까."   (79p)


맞는 말인 것 같지만 틀렸어요. 충수돌기를 제거해도 우리 몸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건 사실이 아니에요.

퇴화된 조직이라서 특별한 기능이 없다고 말하는 건, 아직 그 기능이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한 마디로 "모른다"는 거죠. 충수돌기의 비밀도 모르면서 다들 오해하는 거라고요.

염증이 생긴 게 충수돌기 탓도 아닌데, 염증으로 아픈 충수돌기만 제거해버리고... 물론 맹장수술을 반대하는 건 아니고.

비주가 자신을 충수돌기로 표현한 것이 너무 안타까워서 그만... 염증 때문에 충수돌기를 떼어버릴 수는 있지만 마음은, 아프다고 도려낼 순 없잖아요.

우리가 뭔가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하겠지만 적어도 덜 오해하면 좋겠어요. 비밀 중에서 가장 나쁜 건 들통난 비밀이에요. 

결과적으로 형석의 비밀이 최악이었어요. 스스로 판 구덩이 속에 빠진 남자. 

숱한 비밀과 오해가 폭탄처럼 터지고 나서야 알았어요. 


"당신이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요?"

     -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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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척도
마르코 말발디 지음, 김지원 옮김 / 그린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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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척도>는 마르코 말발디의 소설이에요.

철학이나 윤리학에 어울릴 것 같은 제목과 소설의 주인공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는 두 가지 요소가 호기심을 자극했어요.

과연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길래 추리 미스터리 장르가 되었을까요.

우리가 천재를 언급할 때 빼놓지 않는 인물이죠. 레오나르도 디 세르 피에로 다 빈치. 

사실 첫 페이지부터 깨알 같은 스포르차 가문의 가계도가 나와서 살짝 긴장했어요. 또한 몇 페이지에 걸쳐 소개된 등장인물들이 너무 많아서 머릿속이 어지러웠어요.

이 모든 이야기는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다양한 인물들의 관계를 주목해야 그 본질을 파악할 수 있어요. 복잡한 인간 관계 속에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참으로 곤란한 입장에 처해 있어요. 사실과 진실 그리고 오해와 편견 그 어디쯤에서 그의 활약을 확인하는 과정이 이 소설의 주된 줄거리라고 할 수 있어요.

워낙 등장인물들이 많아서 전부 소개할 수는 없고, 주요 인물 딱 한 명만 언급하고 싶어요.

루도비코 일 모로.

그는 바리 공작이자 밀라노의 군주예요. 당시 사람들은 루도비코 일 모로에 대해 교황을 전용 사제로 부리고 황제를 집사로 부리는 밀라노의 주인, 한 마디로 대세라고 여겼어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에게 고용된 예술가였어요. 원래 임무는 루도비코의 아버지를 기리는 청동 말을 제작하는 것인데, 벌써 4년이 흘렀고 미완의 상태라서 압박감을 느기고 있어요. 아무리 천재라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인 거죠. 

어느 날, 루도비코의 성 안쪽 뜰에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됐어요. 전염병일까봐 걱정이 된 루도비코는 왕궁 점술사를 불러 시체를 확인하게 했어요. 시체에는 어떤 종류의 징표도 없었어요. 칼에 찔린 자국도 단검의 흔적도 없었으며, 몸 어디에도 핏자국은 없었어요. 왕궁 점술사 암브로지오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전에 본 적 없는 질병일 거라면서 혹시 전염병이 퍼질 수도 있으니 시체를 옮겨야 한다고 말했어요.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그다음에 불려가 시체를 확인하는 임무를 맡았어요. 평소 해부학에 관심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부검을 의뢰했던 거예요. 이건 요즘의 과학 수사의 개념은 아니에요. 그 시대의 해부학은 금지는 아니어도 내과 의사가 아닌 사람에게는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일이었고, 거의 점술처럼 여겨졌다고 해요. 더군다나 교회 재판소에 알려지면 오해받기 십상이라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일이었대요. 암튼 부검 결과는 질식사였어요. 죽은 남자는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던 거예요. 이 사실을 알리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두 가지 사실을 숨겼어요. 죽은 남자의 이름은 람발도 치티, 그가 누구인지 알지만 모른 척 했어요. 왜냐하면 그는 레오나르도의 예전 제자였기 때문에 의심받을까봐 두려워서 말하지 못했던 거죠.

이런, 천재의 실수인가요. 도리어 숨긴 탓에 루도비토의 추궁을 받게 됐어요. 꼼짝 없이 살인범을 찾아야만 하는 레오나르도.

음, 그 과정이 셜록 홈즈처럼 스펙타클하진 않았어요. 

읽다보니 슬그머니 "인간의 척도"라는 제목을 상기하게 되는 매우 인상적인 장면이 있었어요.

궁정의 대사로 일하는 지아코모 트로티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나누는 대화 주제는 '돈'이에요.

그러나 진짜 핵심은 '돈'이 아니라 돈이라는 도구을 통해 얻고자 하는 '힘'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인간의 척도는 무엇일까요.

간단히 답할 수 있는 질문은 아닌 것 같아요. 비록 이 책 속에는 레오나르도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건 수많은 답들 중 하나일 뿐이라고 생각해요.

각자 한 인간으로서 자신만의 답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라는.  왠지 이 소설이 우리에게 건네는 암호 같아요. 풀릴 때까지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암호.



"돈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돈이 웬만큼 있다면 그럴 거라는 뜻이죠." 

레오나르도가 말했다.

"아무한테도 돈은 웬만큼 있지 않지. 심지어는 어제 도착한 두 명의 프랑스 귀족도 돈에 대해서 계속 불평하더군."

... (레오나르도는 길가 상인에게 돈을 주고 나이팅게일 한 쌍을 사더니, 새장을 열었어요. 새들은 멀리 날아가버렸어요.)

"... 미안하네만, 자네가 돈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자네의 경우에도 더 많은 돈을 가질수록 자네를 행복하게 만드는 일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잖나."

"친애하는 트로티 대사님, 제 설명이 명확하지 않았던 모양이군요. 

방금 전에 저 새 장수와 저는 거래를 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5개의 작은 금속 조각을 주었고,

그는 저에게 두 마리의 나이팅게일을 주었죠. 우리 둘다 그 5개의 작은 금속 조각이 어떤 의미인지 동의했습니다.

자, 돈은 언어죠. 돈은 그 나름의 본질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모두 그것에 동일한 힘을 부여하는 데 동의했기 때문에 작용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단어와 문장 전부보다 훨씬 강력한 언어죠."

"그렇지. 왜냐하면 모두가 그걸 이해하니까."

"그 반대로, 그게 암호이기 때문입니다."
"암호?"
            (151-15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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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안온한 날들 - 당신에게 건네는 60편의 사랑 이야기
남궁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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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인 작가님.

<만약은 없다>, <지독한 하루>라는 책을 썼다는 건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두 권 모두 읽지 못했어요. 

응급의학과 의사가 쓴 죽음과 삶, 그 경계의 기록... 매일 밤 응급실은 예기치 못한 불행을 겪은 사람들로 붐비는데, 그 현장을 지키는 이의 목소리라니... 솔직히 읽을 자신이 없었어요. 이건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숨쉬고 있는 세상에서 벌어지는 비극적인 현장이니까.

실제로 응급실을 가본 사람이라면 다시는 그곳에 가고 싶지 않다고 느낄 테니까. 그래서 책조차 피했던 것 같아요.


<제법 안온한 날들>

책 제목에 끌려 작가 이름을 보니, 앗!

이번 책 부제는 '당신에게 건네는 60편의 사랑 이야기'라서 안심이 됐어요. 읽을 수 있겠구나... 겁쟁이 같은 마음이지만 어쩔 수 없어요.

첫 페이지를 여니, 다음의 문장이 있었어요.

"너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아니야. 너는, 그냥 외로운 사람이야."

우리가 처음으로 입을 맞춘 뒤,

당신은 바로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아하, 당신이라는 존재는 과거 사랑했던 그 사람이군요, 라고 짐작했어요. 

책의 시작은 "나라에서 당신에게"라는 편지였거든요. 일본 긴키 지방의 시골 마을 나라에 머물던 저자가 1300년 전 궁궐터에 갔다가 그저 주춧돌과 기둥뿌리, 제단만 남은 황폐한 부지를 보았어요. 이 터만 남은 곳을 사람들은 왜 기억하고, 의미가 있다고 믿는 걸까요. 숙소로 돌아와 비좁은 침대에서 저자는 편지를 쓰고 있어요. 자신의 감정을 오래도록 기억해두고 싶어서.

"평범하게 사랑했던 옛사람들과 눈에 보이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믿는 지금 사람들이 떠올라, 저는 당신에게 편지를 써요.

... 제가 이 도시를 떠돌며 소원했던 것처럼 당신에 대한 마음이 계속 남아 당신을 그리워하게 되어,

당신이 나를 향해 돌팔매질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각진 돌이 아닌 뭉툭하고 부드러운 손을 내밀어주는 상상을 해요.

그걸로 저는 삶을 이어가야겠죠.

... 아, 1300년간 영속할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

당장이라도 사라져버릴 것 같은 내가, 사라지지 않을 견고한 모든 것을 떠올리며. 당신에게."  (18-19p)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이 편지를 받게 될 당신은 누구인가요.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제 자신에게 물었어요. 편지를 읽으면서 마치 제가 쓴 편지마냥 '나만의 당신'을 떠올렸거든요. 

가장 절박하고 절망적인 순간에 나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당신.

저자는 응급의학과 의사라서, 그의 삶 중 상당한 부분을 응급실에서 보내고 있어요. 이 책이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저 혼자 단단히 오해를 했어요. 소설책이 아닌데...

네, 저자가 들려주는 사랑 이야기는 응급실을 포함한 그의 모든 일상에서 마주했던 사랑이에요.

과거에 사귀었던 여자 친구 이야기도 있고, 본인이 크게 다쳐서 의사인 자아와 나약한 자아 사이에서 갈등하는 매우 인간적인 이야기도 등장해요.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응급실 이야기, 에휴... 읽다가 그만 눈물이 왈칵 쏟아졌어요.


"죽기 위해 인간은 돈이 필요하지 않다. 죽음의 순간 하늘은 세금 따위를 부과하지 않는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죽기 직전까지 인간은 돈이 필요하다. 

그게 없으면, 이 사회에서 인간은 인간 같지도 못한 죽음을 겪어야 한다. 

죽음에 가격이 있다면, 그 죽음은 마치 무료에 가까운 금액으로 제공되는 가장 저렴한 죽음이 아닐까."  (212p)


"나는 그때 처음으로 이곳은 불행이 일렬로 지나가고, 사람들이 그것을 지켜보아야 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277p)


"나는 죽음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 외에 누군가에게 더 알려줄 사실은 없다." (278p)


수많은 사연들 중에서 심정지 환자와 그의 어머니 이야기는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인 것 같아요. 

어머니, 저자의 어머니 역시 아들을 지키기 위해 오늘도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으시네요. 어머니라서 가능한 기적.

제법 안온한 날들은, 온갖 괴로움과 고통을 견디어 낸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인 것 같아요.

책을 덮으면서 제 머릿속에 남는 건 -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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