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탐식수필
정상원 지음 / 아침의정원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미감을 자극하는 수필을 만났어요.
바로 탐.식.수.필.
저자의 이력을 보지 않았더라면 미식가인 작가님이라고 여겼을 거예요.
그만큼 음식과 맛을 표현해내는 언어가 남다르게 느껴졌어요.
단순히 미감만을 자극하는 게 아니라 삶과 문화, 그리고 역사까지 깊이를 더해, 맛을 곱씹듯이 여운이 남기는 글이었어요.
밑줄을 긋게 되고, 다시 한 번 음미하며 읽게 되는 글.
<탐식수필>이 어떤 책인지를, 저자가 가장 잘 소개하고 있어요.
이 책은 미감의 탐험을 위한 안내서다.
... 생존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먹는 일'이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진입해가는 이야기다.
시인 백석의 문장이다.
"맛은 육신과 정서에 사무친다. 먹을 때는 생활이고 먹고 싶을 때는 그리움이다.
맛은 관념이나 추상이 아니고
먹는다는 것은 삶과의 맞대면이다.
맛은 삶에 대한 직접성이다."
식탁 차리는 일을 십수 년 해왔다. 가장 첨예한 파인 다이닝의 일선에서 찬사와 혹평 사이를 두려움 없이 오간다.
식당의 음식은 언제나 두 사람 사이에 놓인다. 각자의 경험에 기대어 평가되고 비교되며 음미된다.
... 이국적인 맛을 탐험하는 탐험가로, 그것을 재해석하여 표현하는 요리사로 달려온 고된 하루 뒤의 소박하지만 풍성한 한상.
가장 따뜻한 밥상을 마주한다.
이 책의 모든 글자는 아내의 밥에서 나왔다.
- 2020년 8월 5일 정상원 [들어가는 말 중에서]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을 맛보는 탐방기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애피타이저였네요.
단순히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맛의 역사를 풀어내고 있어요.
일단 반전이 있어요. 이국적인 맛을 대표하는 요리가 등장할 줄 알았는데 스페인의 라만차에서 우리가 아는 동치미를 만날 줄이야.
라만차 지역에서는 밥요리 파에야와 함께 동치미 김치를 먹는대요. 그 맛은 그냥 김치. 레시피도 김치와 똑같아요. 다만 재료가 알마그로 가지라는 채소일 뿐.
항아리 카수엘라는 흙으로 빚은 우리의 장독과 유사한데, 스페인 중부에서는 아직도 장독을 땅에 묻어 지열을 이용해 발효시킨대요. 스페인에서 만난 알마그로 가지김치를 보니, 왠지 반가우면서 섭섭했어요. 김치는 우리 것, 만이 아니었구나.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저장식품은 김치, 젓갈, 그리고 가공육이에요. 그중 소금의 산지인 대서양의 게랑드 염전 주변에는 유럽 최대 규모의 염장육 공장이 있어요. 게랑드 소금은 소금의 꽃이라 불린대요. 정제되지 않은 게랑드 소금은 셰프들에게 최고의 소금으로 취급받지만, 소금이 함유하고 있는 철, 마그네슘과 같은 다양한 무기질 때문에 그 맛을 다루는 것이 무척이나 까다롭다고 해요. 생선이나 육류, 가금류, 어떤 식재료와 만나도 맛이 섞이지 않는대요. 그래서 후추가 역설적으로 모든 식재료에 향미를 더하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하네요. 과연 게랑드 소금은 어떤 맛일지 궁금해요. 당연히 짠 맛일테지만 저자의 말에 따르면, 혀끝에 올려진 소금 결정을 천천히 녹여가며 음미하면 소라와 해초, 가자미와 돌고래를 순차적으로 만날 수 있대요.
와인과 치즈에 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는 없을 것 같네요. 부르고뉴의 피노누아는 부드럽고 단아한 느낌으로 사랑받는 와인이래요. 쥐라는 부르고뉴의 북쪽에 위치한 지역으로 프랑스의 모든 와인 산지 중 산 그림자가 가장 빨리 드리운다고. 이러한 지리적 특성상 부르고뉴의 다른 지역보다 쥐라의 피노누아가, 프랑스에서 가장 여리고 부드러운 레드 와인이래요. 쥐라는 아르보아 화이트 와인과 콩테 치즈로도 유명하대요. 지역별로 최고의 특산품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는 것 같아요.
미식문화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미식을 즐기는 관전 포인트도 조리에서 식재료로 옮겨가고 있다고 해요.
제철의 재료는 물론이고 유기농이니 넌 지엠오 non-GMO 니 하는 단어들이 식탁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세상이 된 거죠. 요리사에게 재료의 선택은 요리의 시작이라고 해요. 사실 전문적인 요리사가 아니어도 집밥 애호가들에겐 식재료가 정말 중요해요. 자연의 맛, 가장 신선하고 건강한 재료로 만든 음식이라면 다 좋은 것 같아요.
자칭 프랑스 미식가 군단에서 독보적인 존재라고 주장한 알렉산드르 뒤마는 평생 와인을 한 방울도 입에 대지 않았대요. 그는 오염되지 않은 시원한 샘물 한 잔을 마실 때 느끼는 기쁨이 와인보다 더 크다고 말했다네요. 어찌보면 맞는 말인 것 같아요. 아무것도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물의 맛이 주는 작은 차이를 알아차릴 정도가 되어야 진정한 미식가가 아닐까요.
정상원 셰프를 통해 '맛'이 언어로 표현되니, 미감에 대한 인식이 확장되어 삶과 예술의 조합을 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할 수 있었어요. 왠지 앞으로는 무엇을 먹든, 허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맛과 향을 음미하게 될 것 같아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