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내려온다 아름다운 우리 노래 판소리 그림동화 1
김진 지음, 김우현 그림 / 아이들판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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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라디오 방송에서 이날치 밴드가 부르는 21세기 버전의 판소리 "범 내려온다"를 듣게 됐어요.

"범 내려온다"가 판소리《수궁가》중의 한 장면이라는 것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어요.

기존 판소리를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더욱 경쾌해진 리듬에 저절로 어깨가 들썩들썩~ 흥이 났어요.

아하, 이게 바로 우리 것이구나!


<범 내려온다>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에요.

판소리 《수궁가》는 자라가 바닷속 용궁에서 토끼의 간을 구하러 뭍으로 나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려낸 우리나라의 오래된 노래극이에요.

원래 옛날부터 전해 오던 이야기를 바탕으로 조선시대 신재효 선생이 고쳐서 판소리로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 책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수궁가》에서 범이 내려오는 장면만을 뽑아 이야기로 들려주고 있어요. 

무엇보다 그림을 민화풍으로 표현해내어 더욱 멋스럽게 느껴지네요. 책 표지의 범(호랑이)을 보면 정말 무시무시하죠?


용왕의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의 간을 구하러 뭍으로 올라온 자라는 엉금엉금 기어갔어요.

턱으로 땅을 짚고 밀며 기어갔어요. 겨우 높은 곳에 올라 둘러보니, 온갖 짐승들이 한데 모여 나이 자랑을 하고 있었어요. 마침 그곳에서 토끼를 발견한 자라는 반가운 마음에 급히 불렀어요. 그런데 턱으로 기어오느라 힘이 빠져서 '토 선생'하고 부른다는 것이 그만 '호 선생'하고 불렀어요. 

그러자 산속에 누워 있던 호랑이가 벌떡 일어났어요. 누가 자신을 선생이라고 불러준 것이 신이 나서 산을 급히 내려오기 시작했어요.

범 내려온다~~ 호랑이가 내려오는데 쿵, 쿵, 쿵, 쿵!

깜짝 놀란 짐승들이 큰 소리로 함께 노래를 불렀어요. 

" ♬♪ 범 내려온다, 범 내려온다. 깊은 소나무 골짜기를 지나 큰 짐승 내려온다. ♬" 


범나려 온다 범이 나려온다 송림 깊은 골로 한 짐생이 내려온다

누에머리를 흔들며 양귀 쭉 찢어지고 몸은 얼쑹덜쑹 꼬리는 잔뜩 한발이 넘고

동이 같은 앞다리 전동같은 뒷다리 새낫 같은 발톱으로 엄동설한 백설격으로

잔디뿌리 왕모래 죄르르르르르 헛치고 주홍입 쩍 벌리고 자래 앞에거 우뚝서

홍행홍행 허는 소리 산천이 뒤덮고 땅이 깨지난 듯 

자라가 깜짝놀래 목을 움치고 가만히 엎졌을 때

   - 수궁가 별주부 호생원 부르는 대목 중에서  [출처 : 위키백과]


책에서는 판소리 대목을 알기 쉽게 풀어서 노래를 부르는 느낌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판소리 원곡을 직접 들어봐도 좋고,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함께 들어보면 그림책의 느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어요.

호랑이가 내려와 보니 말라붙은 말똥 같은 자라만 있다는 사실에 실망했어요. 하지만 몸에 좋은 똥인가 싶어 자라를 꽉 집어먹으려 하고, 이에 놀란 자라는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하려고 꾀를 쓰지만 영 통하지 않네요. 주거니 받거니 호랑이와 자라의 신경전이 유쾌하고 재미있어요. 우스꽝스러운 한바탕 소동이 주는 쾌감이 있는 것 같아요.

아름다운 우리 노래 판소리의 매력을 발견하고, 느낄 수 있는 그림책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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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신도들 버티고 시리즈
오스틴 라이트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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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이네. 해리가 말했다. 


정확히 193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을 읽자마자 불안감이 밀려 왔어요.

과연 해피엔딩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저자 오스틴 라이트의 『토니와 수잔』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야기 중반에 사건이 마무리될 리 없다는 걸 짐작할 테니.

납치된 아이를 드디어 찾았다는 사실은 기쁘지만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어요. 광신도 집단에서 이토록 순순히 아이를 내놓는다고?


세상에, 남자애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하더라고요. 주디가 말했다.

날 죽일 듯이 쳐다보던데. 데이비드 레오가 말했다.

촉촉한 눈으로 헤이지를 보더라. 주디가 말했다. (194p)


<광신도들>은 신과 종교, 그 믿음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사람들은 똑같은 상황에서도 각자 다른 것을 본다는 사실.

이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저는 매우 충격적이었어요. 이 소설은 여러 인물들을 통해서 사실과 진실의 괴리를 보여주고 있어요.

소설은 등장인물들의 관점에서 각각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어요.

일흔 살의 은퇴한 대학교수 해리 필드, 그의 딸 주디 필드, 그녀의 전 남자친구 올리버 퀸, 닉 포스터, 주디의 현재 남자친구이자 교수 데이비드 레오, 해리 필드의 첫사랑 레나 파울러 암스트롱, 마지막으로 스스로 신이 된 남자 밀러.


대부분 자신이 본 것을 사실이라고 믿는 것 같아요. 엄밀히 따지면 '봤다'는 행위만 사실이고, 무엇을 보고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달라질 수 있다는 걸 간과한 거죠.

주디는 소년의 눈에 맺힌 눈물을 연약함으로 바라봤다면, 데이비드는 자신을 죽일 듯 무섭게 노려보는 눈빛을 봤어요. 

소년의 이름은 닉이에요. 다소 지능이 떨어진 편이라서 사람들이 종종 무시하거나 속이는데, 닉 자신은 바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닉은 상점에서 야간 근무를 하다가 올리버를 알게 됐고, 올리버에게 조련되어 충직한 개처럼 그를 따랐어요.

주디는 해변가에서 올리버 퀸이라는 남자를 만나 격정적인 시간을 보냈고 헤이즐을 임신했어요.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올리버는 도망갔고, 딸애가 태어나는 날 병원에 잠깐 나타난 이후론 아예 소식이 끊겼어요. 

다행히 주디 곁에는 든든한 부모님과 친구들이 있어서 워킹맘으로 잘 살고 있었어요. 갑자기 올리버가 나타나 헤이즐을 납치하기 전까지는.

그 날은 헤이즐의 외할아버지 해리 필드가 집에서 손녀를 돌보고 있었고, 올리버 퀸의 깜짝 등장이 탐탁지는 않았지만 애 아빠니까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에서 한 시간만 놀아주겠다는 부탁을 들어줬던 거예요. 설마 애 아빠가 자기 딸을 유괴할 줄 몰랐던 거죠. 올리버 퀸은 익명의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제이크 루머에게 밀러 교회를 소개 받았고, 밀러가 신이며 사람들을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게 되었어요. 올리버는 최근 주디가 데이비드 레오라는 연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가 흑인이라는 점에 분노했어요. 그래서 자신의 딸을 밀러에게, 즉 신에게 바치기 위해 납치했던 거예요.

올리버는 계획적으로 닉에게 접근해서 자신의 유괴를 돕게 만들었어요. 닉은 16개월 아기 헤이즐을 돌보느라 진땀을 빼면서 올리버의 차량으로 함께 밀러 교회의 공동체까지 동행했어요. 닉에게는 자신을 대신해서 생각하고 일을 시켜줄 사람이 필요했고, 올리버를 스승으로 여겼어요.


그 사이, 주디와 해리는 경찰에 신고했고 데이비드는 자신이 나서서 올리버를 쫓아 갔어요. 일종의 영웅심리?

주디의 아버지 해리는 과학사를 연구하는 대학교수였고, 과학의 오용 및 사기와 협잡 분야의 전문가였어요. 은퇴 후에는 사이비 가짜 종교의 실체를 밝혀내는 일과 강연을 하고 있어요. 그러니 자신의 외손녀를 납치한 올리버가 그런 광신도들 중 하나라는 게 얼마나 황당하고 기가 막힐 노릇이겠어요.

처음에 언급했듯이 납치된 아기 헤이즐은 엄마 품으로 돌아와요. 혹시나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봐 조마조마할 필요는 없어요. 진짜 위험에 처한 사람은 따로 있어요. 중요한 건 자신이 위험하다는 걸 모른다는 거예요. 사람들은 자기 기준으로 타인을 보기 때문에, 상식적인 사람은 상식 선에서 모든 걸 예측해요. 그러나 광신도들은 다르죠. 우리는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만 광신도라고 생각하지만 잘못된 믿음은 사회 곳곳에 퍼져 있어요.  그들은 각자 자신이 보는 대로, 믿는 대로 행동할 뿐이지만 서로 완전히 다른른 생각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충돌하면서 점점 꼬여만 가네요. 과연 이 모든 건 신의 섭리인 걸까요. 

<광신도들>을 통해서 그 신을 만나볼 수 있어요. 세상을 구원하기는커녕 혼돈에 빠뜨리는 신, 스스로 신이 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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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 현대지성 클래식 31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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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리주의란 무엇일까요.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를 제대로 읽은 건 처음이에요.

솔직히 쉽지 않은 내용이라서 여러 번 곱씹어 그 의미를 생각하며 읽었어요.

옳고 그름을 가려내는 기준에 대한 논쟁은 과거로부터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으나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다고 존 스튜어트 밀은 말하고 있어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이면서 동시에 해결되지 않은 과제라고 보고 있어요.

지난 2세기에 걸쳐 이 책이 널리 읽히는 이유가 아닐까 싶어요. 많은 철학자들이 밀의 영향을 받았고, 현재 우리 역시 그의 철학을 사회 구성원으로서 어느 정도 수용하며 살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왜 그의 철학이 중요한지 이 책을 통해 자세히 이해할 수 있어요.

우선 존 스튜어트 밀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시 봤어요. 

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칸트와 함께 서양 철학의 4대 윤리사상가로 꼽히고 있어요. 그가 말하는 공리주의는 도덕의 제1원리예요. 밀은 올바른 행위 즉 도덕적 행위의 궁극적 기준(제1원리)은 행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도덕적 행위를 만들어내는 기준이 여럿 있을 때에도 행복이 최고 우선순위라는 거예요. 이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 반론에 대한 반론을 펼치고 있어요. 공리주의의 기준을 수용하도록 만드는 철학적 근거를 논의하기 전에 공리주의의 의미를 불완전한 개념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오해부터 풀어야 한다고 본 거예요. 공리주의를 오해하거나 잘 모르는 데서 오는 여러 가지 실제적인 반대 의견들은 다음과 같아요. 공리주의가 비현실적이고, 냉담한 결과론이며 무신론이나 편의론이라는 반론과 행복과 행위는 무관하다는 것과 예외론이라는 반론이 그것이에요. 반대자들은 공리주의자가 자신의 특별한 케이스를 도덕 법칙에서 예외 사항으로 내세우는 경향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잘못된 주장이에요. 여러 의무가 갈등하는 애매한 경우가 발생하지 않는 도덕 체계는 존재하지 않아요. 이런 것들은 윤리 이론에서나 윤리 이론에서나 개인적 행동의 양심적 측명에서 볼 때 정말 까다로운 문제들이에요. 이런 문제들은 개인의 지성과 미덕에 따라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극복 가능해요. 가령 공리(효용)를 도덕적 의무사항들의 궁극적 원천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무사항들이 양립할 수 없을 때, 공리를 기준 삼아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어요. 제2원리들이 갈등을 일으키는 사례들에서 제1원리에 호소하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야기예요. 이 부분에 달린 주석이 흥미로워요.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아끼는 장군 마속의 목을 울면서 치는데, 이것을 가리켜 "읍참마속"이라고 해요. 마속의 목을 벨 때 작용하는 제2원리는 군령을 어겼다는 것인데, 군령이 의존하는 제1원리는 국가의 안녕이기 때문에 이 사건을 관찰하는 사람은 그 제1원리를 알아본 거예요. 

공리는 정의의 기준이자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서 어떤 행위의 옳고 그름을 그 행위가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늘리는 데 얼마나 기여하는지에 따라 결정된다고 보고 있어요. 따라서 공리주의는 사회적 갈등의 조정자로서 사회 발전에 기여한 사상이 된 거예요.

이 책에서 주목할 점은 존 스튜어트 밀의 생애를 다룬 부분과 해제인 것 같아요. 

어린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엄격한 영재 교육을 받았던 밀은 스무 살 무렵에 정신적 위기에 빠졌는데, 이때 새뮤얼 콜리지의 시 <낙담>을 읽고서 깊이 공감했다고 해요. 콜리지의 양성적 개념은 인간의 내면세계에는 남성적인 힘과 여성적인 힘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이 두 가지가 함께 조화를 이루고 협동해야 정상적이고 편안한 상태가 된다고 해요. 위대한 마음이란 이런 양성성이 겸비된 상태로 직관관 관념을 중시하므로, 물질적이고 수학적인 벤담의 공리주의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있는 사상이에요. 

개인의 자유와 공리(행복)가 똑같은 가치라고 보고 그 둘이 서로 충돌할 경우에는 어떻게 될까요. 밀은 사회의 공리를 추진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중요한 가치(정의, 자유, 행복)를 어느 정도 희생시킬 수도 있다고 봤어요. 밀은 『자유론』(1859)에서 사회나 정부가 개인의 자유에 개입해서는 절대로 안 되고 단지 자기 보호의 목적에서만 개입할 수 있다고 했다가, 『공리주의』(1861)에서는 최대 다수의 행복(사회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는 개인의 공리(행복 혹은 자유)를 어느 정도 희생할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고 해요. 책이 나온 시기를 볼 때 밀은 자유와 공리의 가치가 충돌하고 있을 때 공리 쪽에 손을 들고 있는 것 같아요. 이러한 충돌 때문에 여러 학자들이 밀의 논리가 모순되고 일관성 없다는 지적을 한다고 해요. 맨처음에 언급했던 옳고 그름의 논쟁처럼 자유와 공리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예요. 그럼에도 역자는 『공리주의』2장에 나온 "만족하는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만족하는 바보보다는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173p)라는 문장을 인용하여, 밀은 자유를 선택했을 거라고 해석하고 있어요. 인간성에 대한 밀의 견해는 동일한 패턴의 반복이 아니라 지속적인 자기 혁신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 사상가들의 의견이라고 해요.

그런 의미에서 공리주의적 관점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와 시대를 이해하고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결론이 나오네요. 철학과 사상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삶 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는 걸 배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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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 - 한 사내가 72시간 동안 겪는 기묘한 함정 이야기
정명섭 지음 / 북오션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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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은 정명섭 작가님의 스릴러 소설이에요.

한물 간 배우 강형모라는 남자가 72시간 동안 겪는 기묘한 함정 이야기.

강형모는 한때는 잘 나가는 스타였지만 사업하다가 빚더미에 앉고, 마약과 스캔들까지 겹쳐 현재는 사채업자 독거미에게 시달리고 있어요.

그래서 돈 많은 이혼녀 서미진을 유혹하여 돈을 끌어올 계획이었는데, 바로 그녀가 살해되었어요.

사건의 시작은 금요일 오전 11시 51분, 서미진이 보낸 카톡 메시지였어요. 딸과 함께 경주로 여행을 가려고 하니까 집에 있는 여행둉 캐리어를 마두역에 있는 상가로 갖다 달라는 부탁이었어요. 원래 마두역에 짓고 있는 상가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여행을 가겠다는 서미진에게 화가 났지만 비위를 맞추느라 알겠다는 카톡을 보냈어요. 서미진의 목동 아파트 거실에는 커다란 캐리어 세 개가 있었고, 강형모는 유난히 무거운 캐리어를 낑낑 대며 상가 공사 현장까지 옮겼어요. 도착해서 서미진에게 전화를 하자, 캐리어에서 벨소리가 들렸고 캐리어를 열었더니 그 안에는 서미진이 들어 있었어요. 꼼짝 없이 살인 누명을 쓰게 된 강형모는 월요일 전까지 진짜 범인을 찾아야 해요. 왜냐하면 서미진의 집 앞에서 그녀의 남동생 서욱철을 만나서 여행 갔다가 월요일에 돌아올 거라고 말했기 때문이에요. 서욱철은 백수로 누나한테 도움을 받는 상황에서 강형모를 굉장히 싫어했어요. 하필이면 캐리어를 옮기는 걸 서욱철뿐 아니라 아파트 경비까지 목격한 터라 모든 정황이 강형모에게 불리해요.

과연 누가 서미진과 딸, 아들까지 세 사람을 한꺼번에 죽인 걸까요. 

강형모는 다시 아파트로 돌아가 살인 현장을 둘러보고 범인 추적에 나서게 돼요.

솔직히 강형모라는 인물은 배우라기보다는 사기꾼으로 타락한 인간이라서 그에 대한 연민은 안 생기더라고요. 하지만 그가 살인범이 아니니까 억울한 누명을 쓰면 안 될 일이에요. 짧은 시간 동안 강형모에게 벌어진 끔찍한 사건은 그야말로 악몽 같아요. 누구라도 피하고 싶은 악몽. 

가장 마음 아픈 건 아무 잘못 없는 서미진의 딸과 아들의 죽음이에요. 

이 소설에서는 강형모가 밝혀 낸 진실보다 주변인의 적극적인 행동이 사건 해결에 주효했던 것 같아요. 범죄사건이란 수없이 얽히고 설킨 인간 관계 속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그 원인을 찾아내는 일이 쉽지 않은 것 같아요. 서로 속고 속이는 배신의 결과라는 점에서 뒷맛이 씁쓸하네요. 무엇보다도 죽음은 돌이킬 수 없고, 남은 이들은 평생 그 슬픔과 아픔을 안고 살아야 한다는 게 비극인 것이죠.

살인 사건으로 시작된 한 남자의 이야기를 통해 '추락'이란 무엇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 그래서 범인이 누구인지 알게 됐을 때 더 끔찍했던 것 같아요. 아무도 이런 비극을 예상하지 않았겠지만 결국에는 일어났을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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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트
아네 카트리네 보만 지음, 이세진 옮김 / 그러나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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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은 예상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아가트>라는 책도, 제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갔고, 그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어요.


"일흔두 살 은퇴까지 아직 5개월이 남았다. 이는 도합 22주에 해당하고 

지금 보는 환자들이 모두 끝까지 함께한다면 상담 회기로는 정확히 800회를 진행해야 한다.

환자 중에서 누군가 병이 나거나 예약을 취소한다면 이 숫자는 당연히 줄어들 것이다.

어찌 됐든,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하다."  (7p)


주인공 '나'는 일흔두 살, 은퇴를 앞둔 정신과 의사예요. 

병원 진료소에는 30년 넘게 일하고 있는 비서인 쉬뤼그 부인이 있어요. 

그녀는 처음 일하게 된 후로 늘 똑같이 나를 맞이해왔어요. 내가 들어가면 일어나 외투와 지팡이를 받아 걸어준 뒤, 그날의 진료 일정을 브리핑하고 차트 다발을 건네줬어요.

아침 인사 몇 마디를 주고받고 나면 점심시간까지 서로 얼굴 볼 일이 없어요. 나는 정확히 12시 45분에 진료소에서 나가 평범한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데, 이따금 쉬뤼그 부인은 뭘 먹는지 궁금할 정도로 한 번도 음식 냄새를 풍기는 일이 없었어요.

그날 아침, 쉬뤼그 부인은 어떤 독일 여성이 전화를 걸어 이따가 상담 예약을 잡으러 오겠다고 했다고, 그리고 그녀의 주치의인 닥터 뒤랑과 환자에 대해서 얘기를 했는데 몇 년 전 자살 기도를 하고 심각한 조증을 보여 생 스테판 병원에 입원했었다고도 전했어요. 나는 딱 잘라 안 된다고 말했어요. 그런 환자는 꾸준히 몇 년은 치료를 받아야 하는데, 나는 곧 은퇴할 예정이니 더 이상 환자를 받을 순 없다고 말이에요.

거의 50년간 임상의로 일했으니,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라고, 그러니 새로운 환자는 더 필요 없다고 생각했거든요.

오후에 그 독일 여성이 병원을 찾아 왔고, 나는 쉬뤼그 부인에게 일처리를 부탁하며 황급히 '나의 안전한 진료실 안으로' 달아났어요.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쉬뤼그 부인은 그날의 진료 일정을 브리핑하며 그 독일 여자의 진료 예약을 받아줬다고 말했어요. 자신은 분명히 선생님이 앞으로 5개월만 일한다고 설명했는데도 그 여자가 완강하게 요청했다는 거예요. 그 독일 여성의 이름은 아가트 지메르만.

어쩔 수 없이 아가트라는 환자를 진료하게 되었고, 그녀는 자신을 지메르만 부인이 아니라 그냥 아가트라고 불러달라고 했어요.


"제가 여기 온 이유는,

... 다시 살아보겠다는 의욕을 잃었기 때문이에요.

병이 씻은 듯이 나을 거라는 환상 따위는 전혀 없어요.

그렇지만 웬만큼 사람 구실을 하고 싶어요."   (29p)


나에게 아가트라는 환자는 남아 있는 688번의 상담에서 추가된 몇 번의 상담자일 뿐이었어요. 처음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점점 상담이 진행될수록 궁금해졌어요. 아가트는 조증이라기엔 너무나 차분했어요. 독일어로 그녀의 이름을 '아가테'로 발음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주위 사람들이 늘 자기 이름을 '아가트'라고 발음하는 게 그녀 입장에서 싫지 않을까 궁금했지만 물어보진 않았어요.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가 지어주셨고, 기념 선물로 문구를 새긴 쌍안경을 주셨다고 했어요. 그 문구란 '퓌르 아가테, 마이넨 아욱아펠'이며, '나의 눈동자(또는 나의 소중한) 아가테에게'라는 뜻이에요. 덴마크어로 '오이에에블레(눈동자)'에는 사과라는 뜻이 있대요. 이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녀에게서 풍기는 향기가 무엇인지 깨달았어요. 그건 계핏가루를 뿌린 사과가 오븐에서 익어가는 냄새, 내 어머니가 자주 만들어주었던 요리 냄새였어요.

자신도 모르게 아가타와의 상담을 기다렸던 이유가 그 향기 때문이었을까요.


여기엔 주인공 '나'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아요. 모두들 "선생님!"이라고 부르기 때문이에요.

진료실 안에서 나는 선생님으로 살아왔고, 이제는 은퇴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어요. 모든 것이 순탄하게 별일 없이 잘 흘러가는 와중에 아가트의 등장은 예기치 못한 변수였어요. 나는 언젠가 환자를 상담하다가 지독한 좌절감 때문에 연필 끝으로 종이를 뚫고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아차린 적이 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종이에 새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환자들이 이야기할 때 그들의 말을 듣는 척 하면서 새를 그리는 거죠.


익명의 정신과 의사와 여러 환자들, 쉬뤼그 부인 그리고 아가트까지.

그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들을 바라보듯이 그들 자신이 스스로를 볼 수 있다면...

네, 다들 잊고 있었던 거예요. 정말 아이러니한 건 이 책을 읽는 나 역시 타인을 보느라 나는 잊고 있었어요.

어쩌면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선을 긋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네요. 그러나 결국은 다 똑같아요. 사람이란, 상처받은 마음이란, 살아간다는 건...


<아가트>는 비교적 짧은 소설이에요. 읽다보면 어느새 끝나버렸어요.

그래도 온갖 감정들을 다 느끼게 해주네요. 진료실 안과 밖, 이토록 단조로운 세상에서 놀라운 이야기가 펼쳐질 줄이야.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자기 자신을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죠, 아가트."   (14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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