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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갱은 셋 세라 ㅣ 명랑한 갱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11월
평점 :
은행강도와 신문기자, 둘 중에 누가 더 나쁠까요.
너무 쉬운 질문인가요.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면 달라질 걸요.
<명랑한 갱은 셋 세라>는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이에요.
다 읽고나서야 '명랑한 갱 시리즈' 중 세 번째 이야기라는 걸 알게 됐네요.
작가의 말을 참고하자면 전작 <명랑한 갱의 일상과 습격>으로부터 9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에 나온 후속작이라서 취향이나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고 해요.
4인조 은행 강도들의 이야기인 건 동일한데, 진짜 이야기는 따로 있거든요. 아직 명랑한 갱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제목에서 '셋 세라'를 이름으로 착각했어요. 갱의 이름인 줄...
여기서 '셋'은 숫자 3을 의미한대요. 시리즈 세 번째 작품이라는 걸 대놓고 알려주는 작가의 센스였다네요.
어쩐지, 작가의 센스는 소설의 각 장에 나오는 말머리에도 드러나네요. 이 부분만 다시 읽어보니 너무 그럴듯한 명언이더라고요.
제1장 악당들은 오랜만에 은행을 털고, 작은 실수를 계기로 트러블에 휘말린다 늘 있는 일
'얌전히 못 있겠으면 하다못해 조심이라도 해라'
제 2장 악당들은 불똥을 피하려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탐색하지만, 피할수록 불똥이 들러붙는다
'잠자는 개는 가급적 자게 내버려 둬라'
제 3장 악당들은 사건의 구도를 알아차리지만, 상대보다 한발 늦는다
'1인치를 내주면 2야드를 빼앗긴다'
제 4장 악당들은 다른 악당으로부터 달아나려고 필사적으로 행동하지만, 일이 예정대로 되지 않는다
'계획은 사람이 세우지만 성패는 하늘에 달렸다'
우선 명랑한 갱의 주인공 네 명을 소개할게요.
나루세는 4인조 강도단의 리더로서 타인의 거짓말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가진 중년 아저씨예요.
교노는 내용도 맥락도 없는 이야기를 쉴 새 없이 떠드는 재주를 지녔고, 실전에서 요긴하게 써먹는 기술이에요.
유키코는 시간을 소수점 단위로 파악할 수 있는 체내시계의 소유자예요.
구온은 천재 소매치기로 동물을 지나칠 정도로 좋아해서 틈만 나면 동물원에 가는 신비한 청년이에요.
첫 장면은 4인조 강도단이 은행을 털고 있어요. 교노가 쉴 새 없이 떠들며 사람들의 정신을 쏙 빼놓고 있는 사이에 나머지 셋은 열심히 돈 가방을 챙기고 있어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얘기지만 교노가 떠드는 사이 아무도 다친 사람 없이 딱 4분만에 은행 돈을 털어 가는 거예요. 그런데 아얏, 예기치 못한 일이 벌어졌어요. 플로어를 빠져나가려는 찰나에 한 경비원이 경찰봉을 집어 던졌고, 날라오는 회전봉에 구온의 왼쪽 손등이 정통으로 맞았어요.
일이 꼬이는 건 작은 실수 때문이라는 걸 보여주는 장면이에요. 그날 이후 구온은 왼손에 붕대를 감고 다녀야 했어요. 은행 강도라는 확실한 증거를 티내면서.
진짜 이야기는 호텔 1층 라운지 카페에서 시작돼요. 나루세 일행은 호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유키코의 아들 신이치를 만나러 갔다가 히지리 기자와 얽히게 돼요.
으악, 악연이란 무섭고 끈질긴 것 같아요. 악덕 기자 히지리 때문에 나루세 일행은 위험에 빠지게 되고, 상상도 못했던 사건에 휘말리게 돼요.
"세상 트러블의 90퍼센트는 돈 때문이니까요."
나루세는 영국 정치가의 유명한 말을 떠올렸다. "거짓말에는 세종류가 있다. 거짓말,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아마." 구온이 말했다. "그 말도 거짓말일 거예요." (66p)
히지리 기자가 얼마나 인간 쓰레기인지, 읽는 내내 화가 나더라고요. 재미있는 건 상대적으로 은행강도가 착해보이는 착시 효과가 생긴 거예요.
처음에 은행을 털었던 4명이 도리어 선량해보일 정도로 히지리 기자는 합법적인 악당이에요. 일말의 양심도 없는 나쁜 놈.
"아까 기생충이라고 했지? 그 말도 많이 들어. 하이에나란 말도.
단지 내 입장에서 보면 조금 다르거든. 나는 조금 약한 곤충을, 개미 떼 속에 떨어뜨리는 것뿐이야.
그러면 개미가 그 벌레를 먹어 치우지. 이 경우 그 벌레를 먹은 건 누구지? 하이에나인 내가 아니야.
모여들어서 물어뜯으며 즐기는 건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야. 그렇지? 이 세상은 누구나 다른 누군가의 기생충이야." (222p)
세상은 갈수록 온라인 가짜 뉴스가 기승을 부리는 것 같아요.
자극적인 내용일수록 일파만파 빠르게 퍼지는데, 그 진실 여부는 아무도 따지지 않아요. 나중에 가짜 뉴스라는 게 밝혀져도 대중에겐 이미 지나간 일.
<명랑한 갱은 셋 세라>은 모순된 현실을 악당들의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 있어요. 악당이 악당을 때려잡는 세상.
자칫 무겁고 우울할 수 있는 주제를 유쾌하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엄지 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