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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순간에
수잰 레드펀 지음, 김마림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2월
평점 :
사람은 자신의 삶이 한순간에
강탈당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른 채 살아간다.
(238p)
《 한순간에 In an Instant 》는 수잰 레드펀의 장편소설이에요.
제목처럼 한순간에 벌어진 사고가 어떻게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았는지,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준 작품이에요.
첫 장을 읽자마자 몰입했고 휘리릭 마지막 장까지 읽을 수밖에 없었어요.
뉴스에 나오는 사건, 사고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도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요. 아니, 외면하며 살고 있지요.
이 소설은 색다른 방식으로 <한순간에> 뒤바뀐 삶을 그려내고 있어요.
그들은 결코, 다시는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열한 명의 사람들.
왜냐하면 그들 중 두 명이 죽었기 때문이에요. 한 명의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또 한 명의 죽음은 나머지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어요.
가장 충격적인 건 주인공 '핀'이 죽었다는 것.
핀은 자신이 죽은 이후의 시간들을 유령처럼 떠돌고 있어요. 그때 그 사건에 있었던 사람들을 지켜보며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어요.
추운 겨울, 재난에 처한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가식적인 위선이 벗겨지고 추악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날 때 비로소 깨닫게 될 거예요.
아하, 우리가 안다고 생각했던 그 사람의 모습이 다 진짜가 아니었구나.
주인공 '나'는 열여섯 살, 이름은 핀 밀러예요.
밀러네 가족들은 핀을 포함한 여섯 명과 개 한 마리예요. 아빠 잭과 엄마 앤, 삼개월 후에 결혼하는 오브리 언니, 열여덟 살 클로이 언니, 그리고 열세 살 남동생 오즈와 황금색 래브라도 빙고. 한가지 특이할 점은 남동생 오즈가 지능은 서너 살 아이 수준인데 키는 180센티미터인 아빠와 비슷해지고 몸무게는 적어도 10킬로그램은 더 나갈 만큼 커졌다는 거예요. 이런 오즈를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은 아빠뿐이에요. 그래서 아빠가 전적으로 오즈를 돌보고 있는데, 시설에 보내야 한다는 엄마와 늘 그 문제로 싸우고 있어요.
밀러 모바일은 아빠가 열아홉 때 산 캠핑카인데, 이번 스키 여행에 타고 가기로 했어요. 티격태격 아빠와 다투던 엄마는 극약처방으로 엄마의 절친인 캐런 가족을 초대했어요. 워낙 친해서 밀러네 아이들은 모두 캐런 이모라고 불러요. 캐런 이모와 밥 삼촌, 그리고 딸 내털리.
내털리는 핀과 동갑내기라서 어릴 때부터 같이 놀았지만 칭얼대는 내털리의 성격 탓에 앙숙이 되었고 지금은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고 있어요.
핀은 자신의 절친 모린(모)을 초대했어요. 모의 엄마 카민스키 아줌마는 외동딸 모에 대한 애정이 엄청난데, 특히 안전에 관해서는 강박증 수준이라 부모의 동행 없이는 혼자 보낸 적이 없어요. 그런 카민스키 아줌마를 설득한 사람이 핀의 엄마 앤이에요. 모만 빼고 6학년 학생 전부가 과학 캠프를 갈 뻔 했는데, 핀의 아빠가 보호자로 동반해서 모를 지켜봐주겠다는 엄마의 약속 덕분에 모는 12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엄마의 동행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었어요. 그 후로 카민스키 아줌마는 모를 계속 밀러 가족에게 믿고 맡기게 된 거예요. 과보호 속에 자란 것에 비하면 모는 속이 깊고 심성이 착한 데다가 예쁘기까지 한 친구예요. 그래서 내털리가 자꾸만 핀과 모 사이에 끼어들려고 해요.
이번 스키여행에 오브리 언니는 결혼 준비 때문에 빠졌고, 클로이 언니가 남자친구 밴스를 데려왔어요. 사춘기 반항을 한참 하고 있는 클로이는 밴스와 함께 열여덟 살 생일기념으로 파격적인 숏컷과 인디고 블랙으로 염색했어요. 둘은 항상 붙어 있어서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커플이에요.
여기서 사건에 불쑥 동참하게 된 인물이 있어요.
차가 망가져서 도로에 서 있던 열여덟 살의 카일, 이 남자애는 주인공 가족의 캠핑카를 얻어 타게 됐고 함께 추락하는 사고를 당했어요.
사고 이후 아무도 카일을 신경쓰지 않았지만 카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어요.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어떤 일은 ...... 그런 건 ...... 말할 가치도 없어.
우리는 모두 그날 해야 할 일을 했으니까."
(370p)
모든 진실을 알고 나면, 이것이 얼마나 잔인한 말인지 깨닫게 될 거예요.
과연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아마도 그들과 크게 다르진 않을 거라는 생각에 더욱 소름이 돋고 오싹해졌던 것 같아요.
하지만 나쁜 건 결국 나쁜 거예요. 진짜 나쁜 사람이 아무런 죄책감 없이 편하게 산다는 건 정말 최악이에요.
겨우 부츠 한 컬레와 장갑 때문이라고?
그 어떤 핑계를 대도 달라지지 않아요. 굳건하다고 믿었던 우정이 단지 비극적인 하룻밤 때문에 산산이 부서져버렸어요.
세상은 정말 알 수 없어요. 모든 게 끝난 것 같은 절망감 속에 빠졌을 때 생판 모르는 타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니까요.
혐오감, 상처, 죄책감, 그리고 비통함... 핀의 엄마는 매일 감정들의 부피와 무게에 짓눌려 미친 듯이 달리기를 하고 있어요. 더 이상 숨을 쉴 수 없을 때까지 달리다가 비틀대며 주저앉았는데, 50대 중반의 남자가 개를 데리고 조깅을 하다가 엄마를 보고 황급히 달려와 물었어요. 괜찮아요?
엄마는 혼잣말을 하듯이 중얼거렸고, 그 질문에 대해 남자는 뭔가 심오한 경험과 깊은 통찰력에서 우러나온 대답을 해줬어요.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처럼.
인생에서 어떤 일은 결코 되돌릴 수 없어요. 특히 핀의 죽음, 죽고난 다음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요.
"지금 이 상태를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까요?"
"한 번에 한 발자국씩이요."
"당신은 아직 여기 있어요.
그러니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1센티미터, 10센티미터씩이라도
꼭 올바른 방향일 필요는 없어요.
하지만 그래도 계속 나아가야 해요."
"그러다 보면 마침내 현재는 과거가 되고,
어느샌가 당신은 완전히 다른 곳에 있게 될 겁니다.
그곳이 지금보다 더 나은 곳이면 좋겠어요."
(373p)
<한순간에>를 읽으면서 비극 앞에 놓인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회오리쳤던 것 같아요.
놀랍게도 마지막에 느낀 감정은 안도감이었어요. 힘든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설 때의 마음 같았어요.
평범해서 좋은 날, 가족과 함께 하는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시간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