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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헌의 영지순례 - 기운과 풍광, 인생 순례자를 달래주는 영지 23곳
조용헌 지음, 구지회 그림 / 불광출판사 / 2020년 12월
평점 :
<조용헌의 영지순례>는 인생 순례자를 달래주는 영지(靈地) 23곳을 소개한 책이에요.
우선 영지가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되겠죠.
영지는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명당(明堂)을 뜻한다고 해요. 음과 양이 조화로운 곳에는 특별한 에너지가 솟는데, 이러한 공간에 머물면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몸속으로 들어온대요. 흔히 '기를 받는다'라고 표현하는데, 기를 받으면 우선 몸이 상쾌해지고 몸 상태가 쾌적해지면서 마음도 상쾌해진다고 해요. 몸과 마음은 같은 쳇바퀴로 돌아가기 때문에 마음이 상쾌해지면서 정신이 또렷해지면 자연스럽게 기도가 된다고 해요.
기도는 대자연과 일체가 되는 마음이며,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해요. 이러한 기도와 자기정화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해주는 땅, 즉 영지를 순례하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일이라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어요.
기운과 풍광.
이 두 가지 요소가 인간에게 감동을 준대요. 저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대자연의 감동이 단순한 감상이 아닌 실재하는 힘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어요.
영지를 신령의 땅, 치유의 땅, 구원의 땅으로 나누어 각각 구체적인 장소를 소개하고 있어요.
일단 사진으로 본 풍광에 놀랐어요. 뭘 모르는 사람이 봐도 산맥과 산세의 기운을 느낄 수가 있어요. 편안하고 아늑하게 자리한 느낌.
처음 소개된 오대산은 그 영적 에너지를 주목한 문파가 불교였다고 해요. 신라시대 자장 율사가 일찍부터 오대산을 주목하여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오대산의 중대 꼭대기에 모셨고, 그것이 지금의 적멸보궁이라고 해요. 오대산과 중대의 적멸보궁은 6세기 무렵부터 이미 영지로 대접받았던 민족의 성지요, 자기 치유의 땅이라고 하네요.
신라시대에 자장 율사, 보천과 효명 태자가 오대산에 있었다면 근래에는 한암 선사와 그의 제자 탄허 대사가 있었대요.
한암(漢岩, 1876~1951)이 도력이 높은 고승이라는 사실이 소문이 나자 일본인 고위관료가 상원사에 찾아와 스님과 차를 한잔 마시게 되었대요. 한암이 일본 관료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는데, 찻물이 찻잔에 넘치도록 따랐대요.
"아니, 스님 찻물이 넘치는데요?"
"그대의 마음이 이미 꼭 차 있어서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받아들여지지 않고 넘치는 상태입니다."
또 다른 총독부 관료가 한암을 찾아와 물었대요.
"이번 대동아전쟁에서 누가 이길까요?"
"덕이 있는 나라가 이길 겁니다!" (41p)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49년에 탄허(呑虛, 1913~1983년)는 전쟁을 예측하여 스승인 한암에게 상의를 드렸더니, 한암은 자신은 오대산을 떠나지 않는다면서 탄허를 비롯한 제자들을 남쪽으로 피란 가도록 했대요. 한국전쟁으로 전국의 많은 사찰이 잿더미로 변했고 상원사도 예외는 아니었대요. 국군이 상원사 아래쪽에 있는 월정사를 불태운 다음 상원사로 올라왔대요. 이때 한암이 가사장삼을 갖춰 입고 산 채로 화장을 당하겠다는 굳은 결의를 나타내자 국군 장교는 법당의 문짝만 몇 개 불태우고 돌아갔다고 해요. 그리하여 오대산 상원사는 한암이 목숨을 걸고 지켰고, 한암은 1951년에 그곳에서 앉은 채로 그대로 죽었다고 해요.
이 책에는 오대산, 계룡산, 지리산, 팔공산, 가야산, 덕유산 등 신령과 치유, 구원의 땅을 담아낸 206컷의 사진들과 함께 역사 속 고수와 스승에 관한 이야기까지 들려주고 있어서 무척 흥미로워요.
영조 26년, 1750년에 전국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했다. 1월부터 7월까지 사망자가 2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700만 명. 상당한 비율의 사망률이다. 이런 상황에서 살기 위해서는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그리고 사람 눈에 띄지 않는 심심산골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그런 곳이 십승지에 해당한다. 조선 팔도를 다 뒤져 그 가운데 가장 숨기 좋은 지점을 열 군데로 추린 셈이다. 그러니까 십승지는 하루 아침에 형성된 게 아니고 적어도 오백 년 이상 목숨 보존처를 찾아 헤매던 낭인들과 떠돌이 민초들, 그리고 깊은 수도처를 구하던 승려와 도사들의 현장경험이 축적된 결과물이다. (235p)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지금 가장 안전한 곳은 어디일까요.
현대 도시인들에게 가장 안전한 곳은 집뿐일까요.
《정감록》, 《남사고비결》등 각종 민간 비결서에서 주장하는 십승지는 비결서마다 약간씩 들쑥날쑥한데, 저자는 다음과 같이 알려주고 있어요.
경북 영주 풍기의 금계촌을 비롯한 봉화의 춘양면, 안동의 화곡(현재 봉화읍), 경남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 강원 영월의 정동쪽, 충북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 근처, 단양의 영춘, 충남 공주의 유구와 마곡, 전북 부안의 호암,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 무주의 무풍 북동쪽 덕유산 근처 등이라고 해요.
지리산 일대에 산재한 청학동 서너 군데도 십승지의 연장선인데, 이곳은 오히려 십승지보다도 훨씬 이전에 난세에 몸을 보전하고 신선도를 닦을 수 있는 명당으로 여겨졌던 곳이라고 해요. 십승지의 특징은 사람이 접근하기 어려운 오지이며 외부에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이라고 해요. 우리 조상들은 이미 사회적 거리두기와 같은 방역 수칙을 실천했었네요. 새삼 대자연의 소중함과 감사를 느끼게 되네요.
<조용헌의 영지순례>를 읽고나니 우리나라 백두대간에서 뻗어나온 산천토목의 가치를 새롭게 배운 것 같아요.
문득 무분별한 개발로 훼손된 자연환경이 떠올랐어요. 한암 선사가 지켜낸 상원사처럼 우리가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저자는 영지순례기를 쓴 이유 중 하나가 우리 사회의 좌·우파 갈등 때문이라고 했어요. 편가르기와 분열, 분노 조장은 자멸로 이르는 길이에요. 영지는 분노를 삭혀주는 효과가 있다고 해요. 대자연의 힘으로 우리 사회의 염증이 치유되고 아픔이 달래지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