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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넬라 라슨 지음, 서숙 옮김 / 글빛(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패싱 passing> 이란 백인 행세를 하는 흑인을 말한다.
작가 넬라 라슨의 두 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이 소설은 백인과의 혼혈로 백인의 외모와 흡사한 흑인 여성이 주인공이다. 작가 자신이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사망 후 백인 남성과 재혼한 어머니와의 관계도 멀어진다. 그녀가 경험한 인종차별과 흑인 정체성의 불안이 무엇인지 작품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작가의 삶은 매우 중요하다. 창작의 작업을 하는 그들이지만 특히 초기 작품은 자신을 가장 많이 드러내는 것 같다. 어쩌면 허구의 주인공들을 통해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가장 진실되고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인종을 주제로 한 심리 소설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소설의 화자 아이린과 클레어는 패싱이 가능한 흑인 여성이다. 그녀들은 어린 시절 친구로 12년 만에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그 장소는 시카고에서 흑인 출입이 금지된 드레이튼 호텔 옥상 카페다.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는 익히 들어왔지만 패싱에 대한 문제는 새로운 것 같다.
흑인 혼혈, 즉 물라토들이 왜 백인 행세를 할 수 밖에 없는지 그들에게 흑인 정체성은 어떤 의미인지를 이해하는 기회였다. 심각한 인종차별을 경험한다면 누구라도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문제는 백인들의 의식이다. 백인에 대한 자부심이 지나쳐 위험하게 느껴진다. 책 속에 대표적인 인물로 클레어의 남편 존 벨루를 들 수 있다. 자신의 부인이 흑인 혼혈인 줄은 모르고 흑인의 피가 한 방울이라도 섞인 사람과는 상종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니 클레어는 안정되고 풍요로운 삶은 얻었지만 자신을 잃었다. 그녀가 흑인 세계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열망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흑인 혼혈에게 백인 행세는 사회적 혜택을 주지만 흑인을 인정하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과 심리적 안정, 행복을 주는 것 같다. 그들의 정체성은 흑인 안에 존재하는 것 같다. 나 역시 순수한 백인종을 강조하며 배타적인 백인 사회보다는 흑인 사회의 결집력, 포용력이 더 끌리기는 한다.
아이린이 클레어의 등장으로 느끼는 위협은 매우 직감적이며 정확했다. 그런데도 클레어를 거부할 수 없는 것이 갈등의 주요인이다. 클레어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은 약간의 질투심을 느끼게 하지만 정작 그녀의 삶은 위험천만이다. 클레어의 방문은 항상 자신을 건 모험이기 때문에 아이린도 거부하지 못한 것이다. 또한 아이린의 남편 브라이언, 솔직히 이 남자는 마음에 안 든다. 예민하면서도 뭔가 소통하기 힘든 존재다. 아무튼 그녀들의 남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나의 관심은 그녀들이다. 한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틀이 어떤 영향을 주는지, 자아 정체성이 왜 중요한지를 생각하게 만든다.
작품의 시대적 배경인 1920년 대와 현재의 모습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잘은 모르지만 미국 드라마를 통해 본 모습은 그리 달라진 것 같지 않다. 그만큼 인종차별의 벽은 높고 두꺼운 듯 하다. 그러나 요즘 흑인 대선 후보의 등장과 지지도를 보면 변화를 실감한다. 흑인 대통령이 가능하다면 인종차별의 벽도 조금은 허물어지지 않을까 싶다.
인종차별은 비단 미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바로 우리 나라도 동남아시아 여성들과의 국제 결혼으로 수많은 혼혈이 존재한다. 그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어떠한가?
실제로 그들을 차별한 적은 없지만 마음 속으로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던 것 같다. 한국 사람이 외국인과 결혼한다는 것도 약간은 색안경을 끼고 봤다. 그러니 나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라고, 인종주의자를 비난할 입장은 아니다.
이제는 단일 민족, 한민족이라는 껍데기를 과감히 벗어내야 될 시기다.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차별의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 혼혈과 외국계 한국인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 볼 기회였다.
이 책은 한 손에 잡힐 정도로 가볍고 얇다. 그러나 쉽게 읽혀지질 않았다. 주인공 아이린의 고뇌가 내게 그대로 전해졌기 때문이다. 인종과 정체성에 대한 고뇌, 그 무게가 느껴지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