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레니엄 2 - 상 -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 밀레니엄 (아르테) 2
스티그 라르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아르테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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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1부를 읽은 독자라면 무척 기다렸을 것이다.

두 권의 책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을 만큼 흡입력 있는 소설이니까.

<휘발유통과 성냥을 꿈꾼 소녀>라는 제목만 봐도 짐작할 수 있는 리스베트 살란데르.

그녀는 이미 1부에서 뛰어난 두뇌로 사건 해결을 해낸 주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녀에 대해 아는 건 해커, 법적 무능력자라는 정도다. 드디어 그녀의 진실을 알 수 있는 것이 2부 내용이다.

리스베트는 가정폭력의 희생자이며 거대한 권력 앞에 약자였다. 힘없는 소녀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무엇이었을까? 그녀가 세상을 향해 냉소적인 가면을 쓴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2부의 분위기는 리스베트를 중심으로 소소한 일상 이야기라 가벼운 느낌이 든다. 그러나 점점 리스베트를 알아갈수록 심상치 않은 그녀의 과거가 드러난다.

한 사람의 현재는 과거의 결과물이다. 그래서 현재의 모습만으로는 그 사람의 전부를 안다고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 리스베트는 겉모습으로는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다양한 면을 지닌 것 같다. 작고 마른 체격에 소녀 같은 외모지만 눈빛만은 그녀가 결코 순진한 소녀가 아님을 보여준다. 사실 그녀는 스물여섯 살, 엄연한 성인이다. 순진하다는 건 세상에 보호를 받는 연약한 존재라는 증거다. 그녀는 이미 어릴 때부터 세상에 보호를 받기는커녕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유린당한 경우다. 세상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지극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다행히 그녀는 천재적인 두뇌와 예민한 감각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 왔다.

이 점이 바로 그녀가 밀레니엄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 강력한 이유라고 본다.

이제껏 사회에서 버림 받거나 외면당한 약자들은 희생자로서 철저히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미카엘 블롬크비스트를 비롯한 주변 인물들은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벽을 느꼈겠지만 그것이야말로 그녀에게는 가장 안전한 보호막이었을 것이다.

리스베트를 보면 제목 때문인지 성냥팔이 소녀가 연상된다.

추운 겨울,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지 못한 소녀가 팔다 남은 성냥에 불을 붙여 환상을 꿈꾸다 결국은 하늘나라에 간다는 슬픈 이야기 말이다. 만약 한 사람이라도 이 소녀에게 도움의 손길을 줬더라면 소녀는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가장 비극적인 건 소녀가 성냥을 다 팔지 못했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이다. 집은 소녀에게 비극의 근원지다. 세상에 태어나 사랑 받지 못한 소녀의 인생은 결말이 너무도 절망적이다. 소녀가 편안히 쉴 수 있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슬플 따름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와는 다르다. 슬프고 비극적인 상황만 같을 뿐이다. 리스베트는 순순히 불행한 운명을 받아들이며 삶을 포기하는 연약한 소녀가 아니다. 자기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부당한 세상에 맞서는 용기와 베짱이 있다.

부디 그녀를 계속 지켜볼 수 있기를 희망해 본다.

밀레니엄 1부에서는 미스터리한 사건을 풀어가는 긴박한 재미가 있었다면, 2부에서는 사건보다는 인물 중심의 숨겨진 진실을 파헤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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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더기 앤 새로고침 (책콩 청소년)
로버트 스윈델스 지음, 천미나 옮김 / 책과콩나무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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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에게 수식어가 붙는다면 내게는 당연히 ‘빨강머리 앤’이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고 사랑스러운 앤은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긍정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사우스콧 중학교에서는 친구를 놀리는 고약스런 별명으로 변질되었다.

우리의 주인공 마사는 부모님의 종교적 신념 때문에 집에서 만든 초라한 옷을 입는다. 다른 친구들과 다른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누더기 앤’이라 불리면서 온갖 수모를 당한다. 물론 옷만 다른 것이 아니다. 평범한 10대가 누릴 수 있는 콜라나 피자, 인터넷도 마사에게는 금지된 것들이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가족의 비밀이 있다. 마사네 지하실에는 혐오가 살고 있다. 결국 또래 친구들과 어울릴 수 없는 모든 조건을 갖춘 것이다.

또 한 명의 주인공 스콧은 전학 온 지 얼마 안 된 친구다. 낯선 학교에 적응하려고 친구들을 따라 마사를 ‘누더기 앤’이라 놀렸지만 곧 그만둔다. 따돌림 당하는 마사에게 자꾸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래서 마사 편을 들었다가 스콧도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한다.

그래서 마사와 스콧은 친구가 된다. 스콧의 용기를 칭찬하고 싶다. 학교 따돌림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은 스콧처럼 현명하고 용기 있는 친구들이 많아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성숙함이 필요하다.

그것은 결국 어른들의 몫이기도 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유별난 부모님 때문에 마사에게는 금지된 것들이 너무나 많다. 그저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학교를 다녔다면 친구들에게 따돌림 당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사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없다. 부모님은 일방적으로 마사의 삶을 조정한다. 모든 것이 종교적인 이유라는 것이 더 괘씸하게 느껴진다.

예전에 뉴스를 통해 이런 비슷한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부모의 맹목적인 종교적 신념 때문에 질병으로 고통 받는 아이에게 기도만 해주고 병원 치료를 거부한다. 또는 아이의 나쁜 버릇을 고친다고 종교적인 의미의 체벌을 가하여 중상을 입히거나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르게 한다.

종교를 선택하고 믿는 것은 자유지만 그에 따른 행동은 명백히 범죄 행위라 할 수 있다. 부모는 마땅히 사랑하고 보살펴야 할 자녀를 권위와 폭력으로 무참히 짓밟았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한 채 지내던 마사는 유일한 친구 스콧 덕분에 용기를 낸다. 마사는 정말 앤처럼 씩씩하고 밝은 아이다. 그것이 마사가 가진 매력인지도 모른다. 스콧이 전학 오기 전까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리고 참 다행이다. 마사가 ‘누더기 앤’이 아니라 ‘당당한 앤’이라서.

사실 학교 따돌림이나 가정 내 폭력은 당사자인 아이가 극복하기에는 버거운 문제다. 자칫 하면 비극적인 결말을 야기할 수도 있다. 그런 심각하고 무거운 주제를, 마사와 스콧의 시선을 통해 자연스럽게 풀어나간 점이 멋지다.

무엇보다도 내가 무척 사랑하는 앤, 그 이름을 떠올릴 만한 결말을 맺어서 기쁘다. 상황은 너무도 누더기처럼 엉망이지만 역시 앤은 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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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조진국 지음 / 해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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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고?

유치해도 괜히 따져 묻고 싶다. 사랑한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라고 말이다. 그리고 괜히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가슴 떨리는 사랑이 현재형이 아닌 과거형인 사람이 부리는 억지 같아서. (이것은 어디까지나 제목만 봤을 때의 소감이다.)

처음엔 그랬다. 말랑말랑한 사랑의 감성이 너무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나보다.

달콤한 알사탕을 녹여 먹듯, 조금씩 그 맛이 전해져 온다. 사랑이라는 맛, 그러나 사탕처럼 달지만은 않은 그 맛을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거다.

사탕과 사랑의 공통점은 언젠가는 사라진다는 것, 그러나 그 맛을 완전히 잊지는 못한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사탕을 먹고 사랑을 한다.

이 책은 슬며시 내게 사랑이라는 사탕을 건네준다. 자, 이 맛이 기억나니?

첫 장을 넘기는 순간, 시집인 줄 알았다. 차례에 적힌 제목들이 한 편의 시처럼 그윽한 느낌이다.

 

< 차 례 >

1. 겨울 끝에는 봄이 오듯이, 내 끝에는 항상 네가 있다.

2. 사랑은 운명이 아니라 운명적인 선택이다.

3. 너한테만은 기다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4. 버려진 것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5. 젊음은 ‘가벼운’ 것이 아니라 ‘아픈’ 것이다.

6. 숫자는 달콤한 사랑의 언어다.

7. 빛의 반대말은 어둠이 아니라 투명함이다.

8. 너의 눈물까지 감싸 안는 사람이고 싶다.

9. 나이가 들수록 상처를 회복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10. 눈을 감으면 외로운 사람들만 모이는 작은 섬이 보인다.

11. 슬픔을 나누려는 사람보다 슬픔을 주는 사람에게 끌린다.

12. 뒷모습을 허락하는 것은 전부를 주는 것이다.

13. 사랑에 빠지면 아이도 어른이 된다.

14. 소리에는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는 이야기가 있다.

15. 두 번째 이별은 첫 이별보다 아프다.

16. 추억은 고양이처럼 깊고 오랜 흔적을 남긴다.

17. 더 사랑해서 더 외로운 사랑이 있다.

18. 울어도 변하는 게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쓸쓸함’이다.

19. 어느 날 추억은 담담해지고, 마음은 단단해질 것이다.

20. 우리는 항상 누군가를 더 사랑하게 된다.

 

여기에 한 줄을 더 추가하고 싶다.

21. 차례를 읽으면서 공감할 수 없다면 이 책은 그저 시시한 연애 소설이 될 것이다.

 

주인공 조희정의 사랑 이야기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사랑이면서 사랑하는 순간은 누구나 특별해지는 법이니까.

사랑은 마법 같다. 그래서 사랑을 말하는 언어 또한 마법 같은 힘을 지니는 것 같다.

이 책을 펼쳐든 장소는 버스 안, 시간은 햇살이 유난히 쏟아지는 오후였다. 문득 내 뺨에 와 닿은 햇살이 사랑하는 사람의 따스한 손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눈부셔서 고개를 돌렸을 그 햇살이 그 순간만큼은 피하고 싶지 않았다.



“빛이 닿으면 무엇이든 반짝인다. 운하의 탁한 물결도, 푸석한 나뭇잎도, 멋없이 뻗어 있는 현대식 건물도, 말라버린 눈물 자국까지도. 그래서 사람들에게 와서 닿을 때 빛은 그냥 빛이 아니다. 저마다 다시 시작하고픈 사랑, 손에 잡히지 않는 꿈의 실현, 부서진 관계의 회복이라는 이름들로 바뀌어 반짝인다.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되면, 한 사람은 다른 한 사람에게 빛이 된다.......“ (78p)

 

사랑의 언어만으로도 이 책은 내게 빛이 되어 다가왔다. 아침 햇살이 잠을 깨우듯 잠들었던 감성이 깨어나고, 오후 햇살 같은 따사로움으로 추억에 잠겼다.

빛이 닿으면 반짝인다는 자연 현상조차 사랑이란 말로 바꾸면 너무나 아름답고 신비하게 변한다. 혹여 그 사랑이 아프다는 걸 알아채도 여전히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걸.

사랑했거나 사랑하거나 사랑할 이들을 위하여

작가는 우리에게 사랑을 들려준다.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널) 사랑하지만,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날) 사랑하지만, (나는 널)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은 원래 불공평한 것 같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처럼.

이 책은 에세이와 스토리텔링을 결합시킨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한다. 어쩐지, 단순한 나는 에세이와 소설 중 어떤 장르인지 잠시 고민했다. 물론 사랑을 말하는데 장르 구분이 뭐가 중요한가 싶어 그만 두길 잘했다.

이미 이 책을 읽는 동안 사랑이 주는 감미롭고도 씁쓸한 맛을 기억해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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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무림고수를 찾아서 - 궁극의 무예로써 몸과 마음을 평정한 한국 최고 고수 16인 이야기
박수균 지음, 박상문 사진, 최복규 해설 / 판미동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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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고수라는 말은 마치 판타지 세계의 주인공 같다. 하늘을 휙 가르며 날아다니고 다양한 권법으로 악당을 단숨에 무찌르는 영화 속 주인공의 모습이 언뜻 떠오른다.

그렇다. 이 책에 대한 관심은 순전히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무림고수가 존재할까, 있다면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원래 이 책은 저자가 체육부 기자로 근무하던 문화일보에 2003년 5월부터 1년 동안 시리즈로 연재하던 내용을 모아서 만든 것이라 한다. 실제로 다양한 무술의 고수들을 인터뷰한 내용이라 이 분야에 문외한인 사람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세상에 이런 무술도 있었나 싶을 정도로 처음 듣는 무술도 있다. 하지만 역시 고수들은 뭔가 통하는 면이 있는 것 같다. 단순히 몸을 단련시키는 운동 차원을 훨씬 뛰어넘는 정신세계가 존재하는 것 같다. 솔직히 이러한 무술을 체험한 적이 없으니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지만 무예에 대한 심오함을 조금 맛 본 것이라 해야겠다.

일단 친숙한 무술로는 태권도, 태껸(국가무형문화재 이름은 ‘택견’인데 표준어는 ‘태껸’이라고 함), 합기도, 우슈, 태극권, 가라테 정도다. 여기서 친숙하다는 의미는 대충 아는 정도지 그 이상은 아니다.

그 외에는 무척 낯설다. 십팔기, 당랑권, 선관무, 팔괘장, 형의권, 아이키도, 대동류 유술, 거합도. 생소한 무술이기는 하지만 각 분야의 고수를 직접 만나 보면 무술만이 아닌 인생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어떻게 무술을 시작했고 지금의 모습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꽤 재미있다. 그러나 역시 무술에 대한 기초지식이 부족해서인지 구체적인 무술에 대한 설명은 잘 모르겠다. 사실 어떤 무술이든 직접 해 보지 않는 이상, 이론만으로 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이 중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무술은 태극권이다. 태극권 시연을 본 적이 있는데 동작이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고 아름다웠다. 무척 배워 보고 싶은데 이런저런 핑계로 아직도 마음뿐이다. 나이든 분도 배울 수 있는 무술이란 점에서 몸치인 내게는 제일 적합한 운동인 것 같다. 소개된 무술 중, 쉬운 무술은 하나도 없지만 읽는 사람마다 관심이 가는 무술이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고수의 경지를 꿈꿀 수는 없지만 각자가 원하는 무술로 심신을 단련한다면 최고의 건강법이 될 거란 생각이 든다.

진정한 고수란 무엇일까?

무림고수가 되기까지 피땀 흘리며 스스로를 단련한 사람들만이 알 것이다. 몸과 마음은 하나이며, 무예를 통해 도(道)와 덕(德)을 닦는다. 인생에 정답은 없다지만 고수들을 보면 저절로 존경스러운 마음이 생긴다.

바르고 겸손하며 무술의 예(禮)를 아는 진정한 고수야말로 평범한 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알려줄 진정한 스승일 것이다.

이 책은 한국의 무림고수 16인을 소개하는 흥미로운 내용인 동시에 우리 삶의 진정한 고수를 생각하게 만든다. 또한 낯설었던 무술의 세계가 고수들의 만남을 통해 한결 친근하게 다가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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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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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충격적인 책이다. 작가의 명성을 몰랐다고 해도 거침없는 문체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거추장스러운 표현들은 모두 거둬낸 듯한 느낌이다.

세상에 ‘내가 만약 눈이 먼다면’이라는 상상은 얼마든지 해봤지만 한 도시 전체가 눈이 먼다는 건 상상도 못해봤다. 눈이 먼다는 건 개인을 대상으로 한 불행한 사건이지, 도시 전체를 위협할 만한 재앙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는 전지전능한 신처럼 한 남자를 아무런 이유도 설명하지 않은 채, 눈이 멀게 만든다. 첫 번째 눈 먼 남자는 운전 도중에 우윳빛 세상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 남자를 시작으로 도시는 백색 공포에 빠져든다. 흔히 눈이 멀었다고 하면 온통 암흑처럼 보이는 걸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정반대다.

첫 번째 눈 먼 남자가 찾아간 병원의 안과 의사는 그의 증상을 보고 놀란다. 모든 기능이 정상인데도 눈이 보이질 않고 오로지 우유처럼 하얗게만 보이는 실명 상태기 때문이다. 발병 전 병리적 증상 없이 곧바로 전염되는 강력한 전염병으로 의사 본인도 눈이 먼다. 어이없는 일이다. 눈이 먼 안과 의사라니, 눈이 이토록 위대한 능력이었던가?

첫 번째로 눈 먼 남자와 관련되어 눈 먼 사람들은 정부에 의해서 맨 처음 정신병원에 격리된다. 그 중에서 안과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은 상태에서 남편을 따라간다. 언젠가는 눈이 멀 것을 예상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안과 의사의 아내는 마지막까지 눈이 보인다. 모두가 눈이 먼 도시에 유일하게 눈을 뜬 그녀의 존재가 의미심장하다.

눈 먼 자들 속에 있는 눈 뜬 자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실제 눈이 먼 상황이 어떻게 인간을 한 순간에 절망과 혼란 속에 빠뜨리는지를, 우리는 의사의 아내를 통해 바라보게 된다. 눈이 있어도 제대로 보지 못 하는 눈 먼 자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다. 너희들의 진정한 모습은 정신병원에 갇혀 짐승처럼 살고 있는 눈 먼 자들과 다를 게 없다고 말이다. 인간이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모든 틀이 눈이 멀었다는 사실만으로 허물어진다. 눈 먼 자들의 도시는 세상을 제대로 지켜낼 능력을 잃은 것이다. 그들은 깨닫는다. 멀쩡한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그들이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말이다. 어차피 아무 것도 볼 수 없다는 사실이 인간의 존엄성마저 포기하게 만들고, 결국 폭력이 강력한 권위를 지닌다. 눈 먼 세상은 이성이 사라진 맹목적인 본능만 남는다.

잠시 의사의 아내를 탓했다. 왜 모든 상황을 바라보면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는가?

그러나 곧 그녀 역시 눈 먼 세상의 약자이며 피해자임을 알았다. 세상을 제대로 볼 줄 아는 눈이 있다고 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무기력한 자신을 원망하며 견디기 힘들뿐이다. 그녀는 차라리 자신도 눈이 멀기를 원할 만큼 절망감을 느꼈다. 눈 먼 다수의 사람들처럼 순응하며 살 수 없다는 건 더 큰 고통이다. 그녀가 느끼는 절망과 분노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무도 눈 먼 자들의 세상을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처럼, 우리는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를 경악하게 만든 눈 먼 자들의 도시가 지금의 현실과 무엇이 다른가?

세상을 하얗게 만든 백색의 공포는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보다 눈 먼 자들의 추악한 본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두려움이 아닐까? 눈 먼 자들을 바라보는 그녀는 우리의 양심이며, 윤리요, 인간성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인간의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인지는 그것을 완전히 잃었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상실이 주는 처절한 교훈을 배운 느낌이다.



“......다 빼앗겨버렸어. 우리가 이루어낼 수 있는 유일한 기적은 계속 살아가는 거예요, 여자가 말을 이었다, 매일매일 연약한 존재처럼 보존해 가는 거예요, 삶은 눈이 멀어 어디로 갈지 모르는 존재처럼 연약하니까, 어쩌면 진짜 그런 건지도 몰라요, 삶은 우리에게 지능을 준 뒤에 자신을 우리 손에 맡겨버렸어요, 그런데 지금 이것이 우리가 그 삶으로 이루어놓은 것이에요.” (418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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