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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의 소년 1
이정명 지음 / 열림원 / 2013년 5월
평점 :
"길모야, 세상은 아름다운 곳이란다. 그걸 잊으면 안 돼!"
"선생님. 세상은 아름다워요. 왜냐면 세상은 수로 만들어졌으니까요."
"그리고 세상은 자기가 아름다운 걸 어떻게 알죠?"
"세상은 수많은 눈을 가지고 있어. 아주 작고 예쁜 눈들 말이야.
그 눈은 별들, 나뭇잎들, 소라들, 달팽이들, 고양이들, 잠자리들, 박쥐들의 눈이고 우리의 눈이야.
우리가 세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할 때 세상은 비로소 자신의 아름다움을 보는 거야."
- 수학 선생님과 길모의 마지막 대화 중에서 101p
안길모. 소년의 이름이다. 북한에서 태어난 소년은 수학천재이며, 자폐성향이 있다. 아버지는 원래 평양 의대의 유능한 외과의사였는데 최고 간부를 살리지 못했다는 이유로 의사면허를 빼앗기고 장의사가 되었다. 그래서 소년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죽음배달부다. 구두닦이가 구두를 광내듯, 죽음은 아버지의 손끝에서 우아하게 태어났다. 소년은 아버지를 도우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그건 용감해서가 아니라 감정을 다루는 능력이 없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와 소년은 교화소로 끌려간다. 벽장에 숨겨둔 성경책 때문에. 어머니는 함께 가지 않는다. 그럼 어디로 가신 걸까?
소년의 삶은 고된 노동과 배고픔의 연속이다. 교화소에서 죽음을 맞이한 아버지를 보며 소년은 울지 않는다. 슬픔이란 감정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나.
3-1-1=1
홀로 남겨진 소년이 알고 있는 것은 이것이 전부다.
숫자밖에 모르는 소년에게 교화소에서 만난 소녀는 뭔가 특별하다. 영애. 소녀의 이름이다. 소녀는 날이 선 말들로부터 도망쳐 소년의 특별한 언어의 영토로 들어온 유일한 사람이다. 영애의 아버지, 강씨 아저씨는 길모와 함께 교화소의 장부를 관리한다. 하지만 교화소장의 의심으로 강씨 아저씨는 죽고 영애는 교화소를 떠나게 된다. 영애를 보살펴달라는 강씨 아저씨의 마지막 부탁이 있었지만 길모는 함께 가지 못한다. 그러다가 장부 뒤표지에 붙어 있는 보라색 우표를 발견한다. 그건 영애의 우표.
길모는 영애의 우표를 배달하기 위해 교화소를 몰래 탈출한다.
국경부근에 좀도둑 패거리에 붙잡혀 있던 길모는 자신을 감시하던 날치와 함께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수학천재, 길모라는 소년을 통해 바라본 북한의 모습은 너무도 처절하고 비참하다. 오히려 감정을 제거하니 더 적나라하게 느껴지는 것 같다. 세상을 수학처럼 이분법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선과 악, 기쁨과 슬픔, 옳고 그름...... 삶과 죽음. 그러나 우리의 삶이 끝난다고 해서 정말 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믿었던 길모의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행복했을까?
이 소설은 어떤 느낌보다는 자꾸만 질문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그는 어땠을까? 그녀는 어땠을까?
소년에게 수학은 존재의 의미처럼 느껴진다. 수학선생님과 나눈 대화처럼 소년은 수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아무리 괴로운 상황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영애의 얼굴은 눈동자에서 앞니 끝, 앞니 끝에서 턱 끝에 이르는 1 : 1.618 의 황금비가 있다. 코 중심선에서 눈 가장자리의 거리와 눈의 가로 길이도 황금비다. 그래서 그녀는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소년은 행복하다. 소년에게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는 말은 영애를 사랑한다는 말과 같다.
소년은 누구에게는 바보처럼, 누군가에겐 천재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아름다움을 사랑한 소년으로 보인다.
영애를 따라 길모와 친구 날치는 두만강을 건너 연길에서 상하이까지 가게 된다. 그리고 살기 위해 각자 몫의 일을 한다.
그러나 세상이 바라보는 안길모는 다르다. 살인 현장에서 뉴욕 경찰에게 붙잡힌 아시아계 남성이며 그의 가방 속에는 위조여권 아홉 장과 의문의 수첩을 가진 악질 테러리스트일 뿐이다. 만약 소년이 살아온 긴 여정의 이야기를 알지 못했다면 나는 그를 무엇으로 생각했을까?
"수학적으로 우연이란 없어.
일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이지.
넌 지구상의 한 점을 떠난 끈의 끝이고
나는 다른 쪽 끝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만나게 되어 있거든." (280p)
순수하게 소녀를 향해 달려가는 소년과는 달리, 소녀는 더 이상 소년이 알고 있던 영애가 아니다. 영애는 변했지만 소년은 변함없이 소녀를 찾아 나선다. 영애는 자본주의자가 되어 더 자유롭고 더 부자가 되고 싶어한다. 소년과 소녀는 마치 우리의 이상과 현실 같다. 서로 맞물려 함께 가면 좋겠지만 현실 앞에 이상은 늘 뒤쳐질 수밖에 없는 것 같다. 1권을 덮으며 안타까웠던 것은 이미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살인 현장에 붙잡혀 CIA 요원의 심문을 받고 있는 안길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