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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얼리스트 - 연재물을 쓰는 작가
데이비드 고든 지음, 하현길 옮김 / 검은숲 / 2013년 6월
평점 :
절판
시리얼리스트. 연재물을 쓰는 작가.
사형을 코앞에 둔 연쇄살인범이 포르노작가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포르노를 써달라고. 대신 그 보답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약속을 한다.
"......선생이 삼류 글쟁이인 게 다 이유가 있다고. 젠장, 살아간다는 게 어떤 것인지 좀 자세히 묘사하는 걸 배우란 말이야.
진정한 작가가 되고 싶어? 내가 현실이야. 날 묘사해보라고.
문학을 하고 싶어? 내 자신이 문학이지. 선생은 내게 감사해야 할걸?" (380p)
시작부터 뭔가 흥미롭다.
포르노작가의 이름은 해리 블로흐. 사실 그는 포르노만 쓰는 작가는 아니다. 어머니 이름을 필명으로 뱀파이어가 등장하는 판타지소설도 쓰고 있다. 나름 마니아를 형성하고 있지만 절대로 자신을 드러낼 수 없을 만큼 작품에 대한 자신감은 없다. 오히려 부끄러울 지경이다.
그런 해리에게 연쇄살인범의 제안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를 써서 베스트셀러작가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살면서 교도소에 갈 일이 몇 번이 있을까. 자신의 죄를 지어서 가든지 혹은 면회를 가든지. 해리가 연쇄살인범 대리언을 만나러 가기까지 긴장을 묘사한 부분은 십분 이해가 된다. 평범한 일반인에게 연쇄살인범은 인간이 아닌 악마로 상상이 되니까 마주보고 이야기한다는 자체가 좀 두렵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포르노작가 해리 역시 반전인물이다. 왠지 포르노소설을 쓰는 사람은 타락했을 것만 같고, 변태스런 사람일 거라고 상상할 테지만 그는 우습게도 한 여자만 사랑하다가 최근에 헤어진 상태다.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이 싸구려소설을 쓰고 있지만 작가로서의 순수한 꿈을 버린 것은 아니다. 일상생활이나 겉모습만 봐서는 정말 글만 쓸 것같은 평범한 소심남이 해리 블로흐다. 오죽하면 과외를 하면서 인연이 된 여학생 클레어보다 어리숙해서 클레어가 해리의 업무를 도와줄 정도다. 클레어는 아직 어린 여학생이지만 해리의 매니저 노릇을 톡톡히 해내는 야무진 소녀다. 만약 이 소설에서 클레어가 없었다면 해리는?
아무리 해리가 주인공이라지만 영 미덥지 않다.
흔히 미스터리 스릴러물이라면 주인공이 좀더 매력적이고 똑똑한데, 이 소설은 여러모로 예상을 뒤엎는다.
해리가 대리언을 위한 책을 쓴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대리언에게 살해당한 피해여성의 가족들이 강력하게 항의하기 시작한다. 그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해리는 대리언을 만나기로 결심한다. 교도소를 찾아간 해리는 그 곳에서 대리언의 변호사 플로스키, 그리고 변호사의 비서 테렌스를 만나게 된다. 약간 괴팍스럽고 성깔 있어보이는 플로스키와는 달리 젊고 매력적인 테렌스는 마침 해리가 쓴 뱀파이어소설을 읽고 있다. 그것도 테렌스가 좋아하는 작가라면서. 하필이면 마음에 드는 여성은 이런 장소, 이런 상황에서 만나는 것인지. 소심남 해리에게 테렌스는 미션임파서블.
대리언이 해리에게 요구한 것은 각지에서 온 팬레터 중에서 자신을 숭배하는 여성들을 인터뷰하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포르노를 쓰라는 것. 그때문에 해리는 여러 명의 여성들을 만나게 된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겠지만 연쇄살인범을 숭배하고 그를 자신의 연인으로 생각하는 여성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악마숭배인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이해하기 힘들지만 중요한 건 어떤 상상과 생각도 그들의 자유란 사실이다. 세상을 믿지 못하고 진실한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파괴하려는 본능이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 볼 뿐이다. 따지고보면 연쇄살인범도 태어날 때는 여리고 작은 아기가 아니었나. 대리언이 들려주는 어린 시절은 창녀인 엄마의 방치와 어른들의 학대가 있었다. 누군가 좀더 빨리 대리언을 수렁에서 구해줬다면 어땠을까. 연쇄살인범이라는 괴물이 되지 않았을까. 아무도 장담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개인의 불행이 사회적 비극으로 나타날 때까지는 아무도 그를 잡지 못한다는 현실 앞에 침묵해야 할까.
자, 여기서부터 해리에게 위기가 닥친다. 대리언의 팬인 여성들은 노골적으로 해리를 유혹한다. 다행히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무사히 인터뷰를 마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해리가 여성들을 만나고 난 뒤에 그 여성들이 차례대로 끔찍하게 살해된 것이다. 도대체 누굴까? 살해현장은 마치 대리언의 범죄와 판박이처럼 똑같다. 하지만 대리언은 감옥에 수감 중이고, 해리는 피해자를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라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된다. 대리언의 심부름을 하다가 꼼짝없이 살인자 누명을 쓰게 된 해리는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까? 해답은 대리언의 주변인물을 주의깊게 관찰하면 알 수 있다.
연쇄살인범과 포르노작가.
그들은 사회적으로 환영받지 못한다. 오히려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며 꺼려하는 기피 대상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연쇄살인범의 이야기나 포르노소설은 궁금해 할까? 단순한 호기심? 금지된 것들에 대한 숨겨진 욕망? 어쩌면 모든 범죄는 삐뚤어진 욕망의 결과일 것이다.
데이비드 고든. <시리얼리스트>의 작가야말로 해리의 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독자들에겐 그저 자극적인 이야깃거리로 여겨지겠지만 정말 데이비드 고든이 바라는 건 작가로서 인정받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시리얼리스트>가 데뷔작이라고 하니,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읽어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