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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 더 스킨
미헬 파버르 지음, 안종설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언더 더 스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채 책을 펼쳐 들었다면 과연 나는 이설리의 정체를 간파했을까?
"이설리는 벌써 몇 년째 이런 일상을 되풀이하고 있었다.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낡아빠진 붉은색 도요타 코롤라 승용차를 몰고 A9 간선도로로 나가 순찰을 시작하는 것이다.
성과가 좋아서 자신감이 한껏 치솟을 때조차 앞으로 두 번 다시 지난번에 마지막으로 태운 히치하이커만큼 만족스러운 대상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앞서곤 했다.
솔직히 말해서 이설리의 이 같은 도전에는 약간의 중독성도 없지 않았다. 바로 옆자리에 함께 집으로 가게 될 것이 분명한 멋진 남자를 태우고도, 머릿속으로는 이미 다음 남자를 그리곤 했다. 옆에 앉은 남자의 튼튼한 어깨와 티셔츠 속에서 오르내리는 가슴을 훔쳐보며 그의 알몸이 얼마나 근사할지 상상하는 동안에도, 행여 그보다 더 멋진 후보자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한쪽 눈으로는 계속 도로변을 주시하는 그녀였다." (15p)
도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히치하이커를 태우는 일을 반복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생길 것이다. 하지만 이미 책 소개와 광고를 통해 알게 된다.
<< 스칼렛 요한슨 주연의 동명영화 원작소설 >>
"인간 신분으로 지구에 떨어진 외계 존재의 묵시록적 로드 무비장르적 상상력의 새로운 차원을 보여주는 초현실주의적 SF 걸작"
그런 점에서 요즘 책들은 펼쳐 보기 전에 너무 많은 것들을 알려준다.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마치 김빠진 콜라를 마시는 느낌이랄까.
그렇다. 이설리는 외계인이다. 인간 여자의 모습으로 위장하여 지구인 남자를 사냥하는 것이다. 왜 사냥하냐고 묻는다면 인간이 동물을 사냥하는 이유와 동일하다.
좀 의외인 점은 이설리의 삶이다. 외계인이면서 지구인과 다를 바 없이 힘든 몸을 이끌고 매일매일 자신의 업무에 매달린다. 일이 끝나면 먹고 잠자고 씻고 다시 일을 나가는 반복된 삶이다. 그녀가 살던 외계행성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구로 파견된 것은 굉장히 절망적인 선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슨 형벌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게 아니라면 순전히 생계를 위해서 밑바닥 인생을 사는 비참한 인간의 모습이랄까.
특별한 능력을 가진 멋진 외계인을 상상했다면 이설리의 모습이나 임무가 너무나 실망스러울 수 있다. 체격 좋은 근육질 남성만을 노리고 차에 태워 농장으로 운반하는 임무를 위해서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육감적인 가슴을 노출하면서 운전하는 것뿐이다. 어쩌면 단순 노동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설리에게는 무척이나 괴롭고 힘든 일인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이설리는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건지 궁금했다. 외계인이라는 정체만 아니라면 인간과 다른 것이 무엇인지 헷갈릴 정도다.
무엇보다 황당하면서도 놀라운 존재는 농장 주인의 아들 암리스 베스다. 마치 흔해빠진 멜로 드라마의 남자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돈많은 아버지 덕분에 고생이 뭔지도 모르고 곱게 자란 도련님이라서 생계를 위해 일하는 농장 외계인들과는 생각 자체가 다르다. 동물의 인권보호와 채식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전형적인 이상주의자 같다. 근본적인 해결책도 없으면서 혼자 착한 척 하는 느낌이다.
지구를 배경으로 인간의 형상을 한 외계인이 저지르는 인간사냥이 묘하게도 인간의 모습과 겹쳐진다. 우리 식탁에 오르는 맛있는 고기를 보면서 동물의 죽음을 슬퍼하는 사람이 있을까? 반대로 소, 돼지, 닭이 살아있는 모습을 보면서 군침을 흘리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도살과정은 생략된 채 깨끗하게 포장된 고기를 구입하기 때문에 아무런 죄의식이나 혐오감 없이 요리해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소, 돼지, 닭이 자기들의 생각을 말할 수 있다면 인간이 과연 동물을 잡아 먹을 수 있을까? 인간은 동물보다 우월한 존재일까? 문득 이 책을 덮고나니 고기를 먹는 일이 굉장히 잔인하고 파렴치한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이러한 생각만으로 육식을 끊기에는 이미 입맛이 길들여졌다는 사실이다.
under the skin 알면 알수록 섬뜩한 현실이다. 머나먼 우주 외계인의 이야기가 우리의 어두운 내면을 들춰낼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