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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박경희 지음 / 서랍의날씨 / 2014년 8월
평점 :
아부지 돌아가시고 혼자 살게 된 엄니 걱정에 동거를 시작한 딸.
이 책은 두 여자가 함께 사는 이야기다. 하지만 욕쟁이 엄니 덕분에 모녀의 일상은 걸쭉한 사투리와 욕으로 넘쳐난다. 툭하면 드런 년, 나쁜 년, 똥 쌀 년, 똥을 지릴 년 등등 딸내미를 위한 엄마만의 특급 욕 퍼레이드가 펼쳐지니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평생 엄마에게 욕 한 번 들어본 적 없이 곱게(?) 자라온 사람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엄니의 모습이다. 하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엄니의 마음을 왜 모르겠는가.
아무리 욕쟁이 엄니지만 딸 모르게 살짝 내뱉는 한 마디에 진심으로 짠하게 사랑이 전해져온다.
"너 읎었으믄 지금 이렇게 웃기나 했을까 모르겄다. 아비 몫까지 하느라 욕보는디, 아가, 고맙다." (52p)
욕도 계속 들으니까 처음처럼 불쾌한 기분은 점점 사라지고 나름의 따끈따끈한 정이 느껴지는 것 같다. 이 책이 온통 욕뿐이라고 해도 이 한 마디로 모든 걸 정리해주는 것 같다. 자식은 엄니의 사랑을 반에 반도 모른다니께.
아부지를 떠나보낸 자리가 너무 컸나보다. 엄니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아부지의 빈 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우기 힘든 것 같다. 아부지의 잔소리를 꼭 빼닮은 딸내미. 결혼 안 한 딸이 늘 걱정인 엄니지만 그래도 곁에 있으니 좋은 것이다. 엄니가 늘 결혼 얘기를 하는 것은 자식 걱정하는 엄니의 마음인데 그걸 모르겠나. 독신주의도 아니고 짝꿍 생기면 언제든 간다고 큰소리치는 딸이지만 엄니 두고 갈 수 있을까 싶다.
세상의 모든 엄마와 딸 사이가 같을 수는 없겠지만 이들 모녀를 보니 참 징글징글한 정이 넘쳐난다. 서로 좋으면 좋다, 이쁘면 이쁘다고 말하면 좋은데 엄니의 표현은 늘 거칠다. 곱디고운 사랑을 어떻게 표현할 줄 몰라서 늘 욕뿐이지만 그 욕마저 사랑인 것을. 속 후련하게 욕하는 엄니야말로 가장 컨디션 양호할 때라는 걸.
부디 건강하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우리 엄니는 아니지만 딸에게 엄니는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존재니까. 그 마음 알 것 같다.
"내가 너를 데려다 논 지가 온제여. 십 년이 넘었어. 근디 니년은 오째 내 맴을 몰라주는 겨. 잉? 그라믄 안 되잖어. 이년 저년은 다 지 몫을 하는디, 너는 돌팍 밑에 숨은 고기맹키로 꼼짝을 안 하는 겨? 일 년을 쉬었으믄 올해는 꼼지락거리며 올라와야 쓸 것 아녀. 이번에도 안 올라오믄 밖에 내다가 버릴 테니께 알아서 혀.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누구랑 얘기해?"
"왜? 혼자 구시렁거리니까 미친년 같냐? 나는 지금 군자란 년하고 얘기 중이시다."
"군자란이 년인지 놈인지 어떻게 알어?"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
"무슨 얘기 하는 중인데?"
"이년이 꽃을 피울 생각을 하지 않길래 욕하는 중이었지. 작년에는 그냥 봐주고 넘어갔더만, 올해도 꼼짝을 안 하잖어. 그래서 욕을 한 바가지 해주는 중이랑게. 아주 드런 년이여."
"우하하하, 욕하면 말 들어?"
"듣지. 이것들은 온몸으로 다 듣는다니께. 내가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기쁜지, 슬픈지 다 알어. 접때 니 아비 저승 갔을 때 꽃밭에 있던 꽃이며 나무가 반은 죽었잖어. 이년들도 내 맴처럼 슬펐던겨. 그래서 난 이것들이 좋아. 새끼들도 모르는 걸 이것들은 알거든. 내가 말을 안 해도 느낌으로 안 다니께. 그것 보믄 참말로 신기혀. 아침에 눈 뜨면 반갑게 인사하고, 얘기하고, 노래도 부르고, 그러다 보믄 어느새 꽃봉오리가 눈에 띄기 시작하는 겨."
"나보다 낫네."
"그걸 인자 알었냐. 근디 너랑 군자란이랑 닮은 게 있는디."
"꽃이 나랑 닮았지? 왜 아니겠어."
"요강 깨지는 소리 그만허고. 지 구실을 못하는 게 닮았어. 너는 여자구실 못하잖어. 군자란도 지 구실 못허고."
"내가 뭘 못해?"
"결혼을 안 했잖여. 결혼해서 새끼를 낳아 봐야 시상을 알지, 니가 뭘 알겄어. 하여튼 올해만 넘겨 봐. 군자란이든 너든 죄다 내다가 버릴 테니께."
"꽃 얘기 하다가 내 얘기로 끝나는 건 무슨 조화여."
"준비 단단히 혀. 빈말 아니니께." (78p-8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