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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긋는 소녀 - 샤프 오브젝트
길리언 플린 지음, 문은실 옮김 / 푸른숲 / 2014년 8월
평점 :
자신의 몸을 칼로 긋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갑자기 따끔한 느낌이 들어서 살펴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베인 상처를 발견할 때가 있다. 아주아주 작은 상처일 뿐인데 뭔가에 내 몸이 베였다는 게 굉장히 기분 나쁘다. 하물며 칼로 그어진 상처라면 상상하기조차 싫을 것 같다. 그런데 일부러 자신의 몸을 칼로 긋는다는 건 몹시 위험하고 비정상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시카고에서 네 번째 가는 신문 <데일리 포스트>의 기자 카밀 프리커. 그녀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커리 국장은 카밀에게 윈드 갭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취재하라고 보낸다. 윈드 갭은 카밀의 고향이다. 현재도 엄마와 새아버지 그리고 이부동생 엠마가 살고 있는 곳이다. 하지만 그녀는 윈드 갭에 정말 오고 싶지가 않다. 엄마 아도라와의 만남이 껄끄럽고 불편한 이유가 뭘까. 자신을 믿고 취재를 맡긴 커리 국장때문에 떠밀리듯 윈드 갭에 온다.
살인사건의 피해자 2명은 십대 소녀들이다. 내털리와 앤. 둘다 목졸려 죽었으며 성추행이나 다른 폭행의 흔적은 전혀 없고, 단지 이를 뽑아갔다는 점이 특이하다.
카밀은 살인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만나고 형사 리처드를 알게 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이부동생 엠마에 대해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나이는 열세 살이지만 거의 성인여성 못지 않은 몸매를 지닌 조숙한 소녀 엠마와 그녀의 금발 친구들.
이 소설은 읽는 내내 뭔가 불길한 기분이 들었는데 결말을 보고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주인공 카밀은 커터(cutter, 자신의 몸을 칼같이 날카로운 물건으로 긋고 베는 사람들)였다. 자신의 몸에 문신을 새기듯이 칼로 단어를 새긴다. 열세 살의 어느 여름날, 처음으로 새긴 글자는 '사악한'이다. 그 뒤로 몸 구석구석에 칼로 새겨진 단어들이 박혀 있다. 손목에는 '해로운', 왼쪽 엉덩이에는 '페티코트', 어깨 위에 '팬티', 오른쪽 발목 안쪽에 '체리', 엄지발가락 밑바닥에 '꿰매다', 왼쪽 젖가슴 바로 아래에 '아기', 몸에 새길 공간이 부족할 정도다. 심지어 발가락 사이에 '나쁜'과 '울다'를 새겨 넣을 정도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새긴 단어는 처음 그 짓을 시작한지 16년 후의 것이다. '사라지다' 그 단어를자신의 목덜미에 새기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것이다. 커터들을 위한 특수 병원에서 12주 동안 머물다가 퇴원한 지 고작 6개월 된 상태다. 서른 살의 카밀은 마치 세 살 어린아이처럼 연약하고 예민하다. 그런 그녀가 연쇄살인사건을 취재하기 위해 자신의 고향에 간 것이다.
자신과는 어색하고 불편한 엄마 아도라가 이부동생 엠마에게는 헌신적인 모습을 보면서 마치 내가 카밀이 된 것처럼 과도하게 감정몰입이 되었던 것 같다. 카밀과 아도라, 엠마 그리고 죽은 여동생 메리언까지 엄마와 딸, 자매 간의 관계가 묘하게 얽혀 있다. 그리고 피해자 소녀들까지 어찌보면 전부 소녀들의 이야기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받지 못해서 불쌍하고, 어린 나이에 죽어서 불쌍한 소녀들.
세상에는 별 미치광이가 다 존재한다. 그런데 종종 그들에게도 가족이 있다는 걸 잊게 된다. 그들을 낳아준 부모와 같이 자란 형제자매들. 사랑스러운 아기의 얼굴을 보면서 미치광이를 떠올리긴 힘들다.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정상적으로 태어난 아기가 미치광이 부모 손에 키워진다는 가설이다.
뮌하우젠 증후군이나 MBP처럼 사람들의 관심을 얻기 위해 누군가를 아프게 만드는 미치광이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건 해외뉴스를 통해 접했을 것이다. 몸을 긋는 소녀의 이야기가 현실에서 벌어진다는 것이 소름끼치게 무섭다. 소설은 더이상 허구가 아닌 현실의 한 조각이 된 것이다. 읽는 내내 누가 범인인지를 찾기 보다는 오히려 제발 그 사람이 아니기를 바랐던 것 같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단어들 중 하나가 몹시 더럽혀진 느낌이 든다. 아름다워야 할 그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평생 비극처럼 따라다닐 수도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소름이 돋았던 것 같다. 비록 소설이지만 카밀이 좀더 자신을 사랑하고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이제는 자신의 몸이 아닌 마음에 '사랑'을 새길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