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는 범죄조직의 시나리오 작가다
린팅이 지음, 허유영 옮김 / 반타 / 2025년 1월
평점 :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이 소설은 '이야기의 힘은 강력하다!'라는 사실을 새삼 떠올리게 만드네요.
문득 아물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품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의 고통이, 조금이나마 위로 받기를... 직접 글 쓰기를 통해 치유하고, 타인의 글을 읽으면서 공감하고 마음의 짐을 덜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네요. 피도 눈물도 없는 나쁜 놈들 때문에 망가진 세상, 고통받는 사람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건 하나뿐이겠지요.
《나는 범죄조직의 시나리오 작가다》는 대만 출신의 린팅이 작가님의 장편소설이에요.
책 띠지에 "훔치고 싶은 인생이 있습니까? 당신의 운명을 바꿔드립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라는 문구와 함께 2022 부산 국제영화제 스토리 마켓 IP 선정작이라고 적혀 있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이야기였네요. 앞서 '고통'과 '위로'를 언급한 이유는 소설 속 주인공 허징천의 사연 때문이에요. 음주 운전자의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어머니와 연인을 잃은 고통을 견디기 위해 두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단편 소설 몇 편을 썼고, 이 소설을 힘들어하는 아버지에게 보였드렸더니 반 년만에 처음으로 미소짓는 모습을 본 뒤로,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인터넷 플랫폼에 연재하다가 미스터리한 범죄조직 다크펀의 연락을 받게 된 거예요. 다크펀은 일반적인 범죄조직과 달리 무고한 사람들에게 이유 없이 해를 끼친 적이 없고, 지하에서 아주 은밀하게 활동하기 때문에 그 존재는 신비한 도시 기담처럼 인터넷에 떠돌고 있어요. 다크펀의 감독이 징천에게 '시나리오 작가' 역할을 제안하면서 다크펀 하우스와 인연을 맺게 되네요.
"자네가 할 일은 사람들에게 인생 시나리오를 다시 써주는 것이야. 이게 바로 내가 자넬 영입한 이유지."
"아. 그런데 왜 저를?"
"우리처럼 상처받은 사람이기 때문이지. 또······." (35p)
다크펀은 의뢰인에게 연극처럼 새로운 인생 시나리오를 써주고 배역을 다시 선택할 기회를 주는데, 세 가지 조건이 있어요. "첫째, 의뢰인이 원하는 인생 시나리오의 참고 대상이 될 롤모델이 있어야 한다. 둘째, 롤모델의 동의를 받을 필요는 없지만 일정 부분 타인의 인생을 훔치는 셈이기 때문에 그 인생의 장단점을 모두 수용해야 한다. 셋째, 자신의 전 재산을 비용으로 지불해야 한다." (36p) 이곳에서 할 수 없는 일은 단 하나, 이미 사망한 사람을 되살리는 일뿐이에요. 인생 시나리오에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자유롭게 원하는 내용을 넣을 수 있고, 반드시 이뤄진다는 점이 미스터리한 지점이에요. 깜짝카메라처럼 잠깐 동안 한 사람을 속이는 연극은 할 수 있지만 어떻게 진짜 인생을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는 걸까요. 소설은 의뢰인들의 다양한 시나리오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인생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주고 있어요. 푸시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우울한 날들을 견디며 믿으라. / 기쁨의 날이 오리니 /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 현재는 슬픈 것 /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를 되새기며, 이 겨울 끝에는 봄이 기다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어요. 누군가 내게 인생을 바꾸고 싶냐고 묻는다면, 당당하게 지금의 인생을 잘 살겠노라고 답할 거예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