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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카, 짖지 않는가 ㅣ 미스터리 박스 2
후루카와 히데오 지음, 김성기 옮김 / 이미지박스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작가는 서두를 이렇게 적고 있다.
“보리스 옐친에게 바친다.
나는 당신의 비밀을 알고 있다.”
정말 대단한 작가다. 마지막 장을 덮는 기분이 묘하다. 인간들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가 개들에 의해서 다시 쓰여진 것 같다.
1943년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들썩이던 시기다. 전쟁을 위해 훈련된 군견들은 전쟁 소모품으로 철저히 이용되던 때다. 일본군이 한때 점령했던 미합중국의 영토 키스카 섬에는 네 마리의 군견이 버려진다. 훗카이도견인 키타, 저먼 셰퍼드견인 마사오와 마사루, 동일한 셰퍼드지만 미군 포로의 개 익스플로전이다. 네 마리의 개들로부터 거룩한 계보는 시작된다.
인간에 의해 철저히 이용되는 개들의 존재가 이 책에서만큼은 역전된 느낌이다.
시간적, 공간적 스케일이 굉장하다. 1943년에서 시작해서 1991년까지 파란만장한 20세기의 역사가 개들의 시각으로 그려진다. 종종 작가 혹은 절대자로 대변되는 존재와 개들의 대화가 나오기도 한다.
개여, 개여, 너희는 어디에 있는가.
(책 속에서 인상적으로 많이 나오는 대목이다.)
인간에 의해 길들여지고 버려진 개들은 치열하게 생존하는 길을 선택한다.
키스카 섬에서 시작된 네 마리의 군견은 세계 각지로 그 후손이 퍼져나간다. 인간에 의해서, 인간의 편의대로.
그러나 인간들이여, 자만하지 말라. 네가 길들인 것은 개가 아니라 네 자신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벨카는 누구인가? 아니, 어떤 존재인가?
인간의 역사는 개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배경으로 그려진다. 개들은 살고자 하는데 인간들은 서로 죽이려고 안달이 난 것 같다. 거기다가 개들까지 전쟁에 이용하고 있다. ‘죽음의 마을’에서 길러진 개들의 운명처럼 인간은 속이고 있다. 고귀한 목적을 떠들어대면서 결국은 무참하게 생명을 짓밟고 있다.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다.
책 속에 조연처럼 등장했다가 주연으로 부상한 일본 소녀는 역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왠지 인간으로서 부끄러워진다. 이름 모를 일본 소녀에서 스트렐카라는 이름으로 살아 남은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20세기의 역사는 진보적인 도약과 후퇴가 반복되면서 제자리 걸음, 아니 오히려 퇴보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주도한 소수에 의해서 다수의 생명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다는 점이 치명적인 실수다. 지나간 역사 속에 잊혀진 수많은 생명들은 모두 고귀했다. 그들을 무시해선 안 된다. 한 마리의 군견조차도.
끝까지 살아남은 벨카와 스트렐카는 인류의 비극이며 희망이다.
너희는 어디에 있는가.
벨카, 짖지 않는가!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다. 이제는 그 침묵을 깨고 당당히 네 모습을 찾아라.
20세기 역사의 비밀을 이제야 알게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