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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체
박범신 지음 / 푸른숲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촐라체가 무슨 말인지조차 몰랐다. 신조어인줄 알았다.
알고 보니 촐라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가는 길에 볼 수 있는 산봉 이름이다. 속설에 따르면 ‘호수에 비친 검은 산’이라는 뜻을 지녔다고 한다.
나만 몰랐나? 그도 그럴 것이 에베레스트 등정을 하는 산악인들을 보면 도대체 왜 그 고생을 하는지 이해되질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딴 세상 사람들 같아서 아예 무관심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이름도 기이한 ‘촐라체’ 북벽을 6박 7일 동안 등반하는 이야기다. 어쩌면 내게는 이 책 자체가 촐라체였는지도 모른다. 힘겹게 빙벽을 오르는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촐라체>를 놓을 수가 없었다.
작가는 <촐라체>가 ‘산악 소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일까?
주인공 박상민과 하영교는 아버지가 다른 형제 사이다. 두 사람의 등반 과정을 기록하는 사람은 그들 당사자가 아닌 베이스캠프지기를 맡은 정선생이다.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정선생을 통해 들려주는 그들의 이야기는 산을 배경으로 했을 뿐 처절한 삶의 투쟁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전문 산악인이 아닌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촐라체를 오르려는 이유는 한 가지다. 오로지 살고 싶어서다. 삶이 못 견디게 그리워서다.
또한 그들을 바라보며 글을 쓴 정선생에게 촐라체는 그가 작가임을 상기시켜준다. 상민과 영교가 촐라체를 통해 치열한 삶의 욕망을 경험했듯이 정선생은 글쓰기라는 자신의 촐라체를 발견한 것이다.
이들 세 사람에게 인생은 녹록하지 않았다. 현실이 촐라체보다 더 위협적일 때도 있었다. 그것을 견디지 못했다면 스스로 목숨 줄을 놓았을 것이다. 상민과 영교가 ‘죽음의 지대’인 촐라체 북벽을 오른 것은 살기 위한 마지막 선택이며 도전이었는지 모른다. 그들이 안자일렌 파트너가 된 것은 운명과도 같다. (*안자일렌: 여럿이 등반할 때 추락의 위험을 최소한으로 줄이기 위해 로프로 서로를 묶어 연결하는 것.) 서로가 한 핏줄임을 부정하고 싶어도 그들을 연결한 로프처럼 끊을 수 없다. 장엄하면서도 냉정한 촐라체 북벽 같은 세상에 맞서 살아남기 위해선 둘이 함께 그곳을 넘어가야 한다.
촐라체는 정상을 향하여 가는 것이 아니다. 섬뜩하리만치 무섭게 느껴지는 그곳을, 극복하기 위해 가는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견디는 수 밖에 없다.
우리에게 촐라체는 에베레스트 어디쯤에 존재하는 먼 산이 아닌 현실이다. 살아있다면 끝까지 치열하게 살아야지 되돌아갈 곳은 없다. 상민과 영교처럼 살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살면 된다. 그러면 늘 마시는 물이 고맙고, 편히 누울 침대가 고맙지 않을까?
촐라체 정상에 오른 영교의 소감이 인상적이다. 현실의 촐라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목숨을 걸고 촐라체로 가는 것은 그것이 삶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촐라체를 위해서가 아니다.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서다. 삶이 내게 묻는다. 넌 누구냐?
목숨을 걸고 촐라체에 왔는데, 촐라체가 없다. 평생 나를 찾아 떠돌았는데 죽을 때 내가 없다는 걸 확인한 느낌이 아마도 이럴 것이다.
임종 직전, 아버지도 그럼 이런 ‘싸가지’ 없는 촐라체 정상에 왔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넌…… 누구냐…… 라고 아버지가 말하고 있다. (118p)
건장한 스물 한 살의 청년 영교는 철없고 약한 내 모습을 닮았다. 나도 언젠가 그처럼 깨달음의 웃음을 지을 수 있을까? 나는 아직 제대로 촐라체를 넘지 못한 모양이다.
웃음이 나오는 것은 그러므로 내가 오래 품었던 질문이 너무 하찮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고, 내가 독하게 간직했던 원망의 실체가 물속의 설탕처럼 풀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오직 내게만 감옥 같던 그 따위 질문을 여태껏 품고 살아온 것이 어처구니없어 웃음이 나온다. (257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