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변화시키는 유태인 부모의 대화법 - 부모의 창의적인 대화법이 자녀의 두뇌를 깨운다!
문미화 지음 / 가야북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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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습관이란 인간에게 있어 잠을 자는 것과 같다.  

어린 시절이나 청소년기에 시간의 흐름이 길다고 느껴지는 것은

그 시기에는 늘 새로운 것을 대하게 되므로 자극이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중년이 지나면 일 년이 너무 빨리 지나간다고 느끼게 되는데,

이는 그들에게 너무나도 많은 습관이 쌓이고 또 쌓였기 때문이다.   - 토마스 만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구절이다.

부모로서 올바른 자녀 교육을 하고자 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이 바로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부모의 일상적인 면을 보고 배워나간다. 그래서 좋든 싫든 부모의 많은 면을 닮아간다. 습관은 하루 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고 믿을 만한 부모의 언행을 통해 조금씩 아이들의 습관도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녀 교육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늘 반성하는 마음으로 읽게 된다.

문제 아이 뒤에는 문제 부모가 있다는 말처럼 아이가 잘 되려면 부모가 바뀌어야 되는데 그것이 쉽지 않다. 사람은 습관의 동물인지라 반성할 때는 고치겠다고 결심하고는 어느새 습관대로 행동하게 된다.

이 책은 유태인 교육법의 핵심인 대화법을 알려준다. 유태인들은 대화만큼 훌륭한 교육법은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부모가 자주 하는 말이 아이들을 움직이는 강력한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화는 소통의 수단이다. 부모와 자녀가 대화를 통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이 없다면 문제가 생기기 쉽다. 요즘 가정 불화나 청소년 비행이 늘어나는 것도 대화법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부모 입장에서는 일방적인 잔소리나 호통을 대화라고 착각할 수도 있다. 그러니 부모는 분명 아이와 대화를 한 것 같은데 도통 아이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이다.

유태인 부모의 지혜로운 교육법을 살펴보면 권위를 함부로 남용하지 않는다. 아이를 대할 때 독립적인 인격체로 인정한다. 당연히 대화도 부모가 주도하기 보다는 아이의 의견을 존중하며 들어주는 입장이다.

반면, 나의 경우를 돌아보니 한숨이 나온다.

책에서 <화가 날 때 절대 해서는 안 되는 7가지 말> (41p)을 보면 너무도 자주 쓰는 말이라 속이 뜨끔하다. 아이를 잘 키우겠다는 욕심을 부리면서 말로는 아이의 기를 죽이고 자존심을 뭉개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라.  엄마 바쁘니까 이따 이야기해.

빨리빨리 좀 해! 아이구 답답해.

내가 너 때문에 못 살아!  넌 누굴 닮아 이 모양이니?  커서 뭐가 될래?

잘한다!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거봐, 내가 뭐랬니?

넌 그것밖에 못하니?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공부나 해!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엄마를 귀찮게 해?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해서 말썽이야!

내가 누구 때문에 사는데!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이 말 중에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이 있다면 반드시 이 책의 대화법을 참고하길 바란다. 습관 중에 가장 오래된 습관이 있다면 언어 습관일 것이다. 긍정적인 생각은 머리 속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입을 통해 내뱉는 말 속에서 생겨나는 것 같다. 매일 사랑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 주는가?

부모가 먼저 잘못된 언어 습관을 고쳐야 제대로 된 대화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그 동안 쌓이고 쌓인 나의 습관들을 어떻게 고쳐야 될 지 고민스럽다. 그러나 우리 아이들을 위해 못 할 일이 또 무엇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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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두 번 떠난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민경욱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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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에 앉아 있으면 조심스레 사람들을 관찰하게 된다. 물론 나도 다른 사람의 관찰 대상이 되겠지만. 관찰이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다. 보여지는 모습 1%를 가지고 혼자만의 상상을 즐기는 심심풀이 정도다. 바라보던 대상이 전철을 내리면 관심은 사라진다.

요시다 슈이치가 쓴 이 책은 여자에 관한 열 한 가지의 이야기다. 마치 전철에서 마주보게 되는 수많은 여자들 중 열 한 명을 무작위로 골라 그들의 이야기를 쓴 것이 아닐까 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그만큼 그의 이야기는 평범하게 느껴진다. 다만 그 평범함 속에 지극히 현실적인 예리함을 지니고 있다.

여자가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는 일은 다반사지만 그것이 자신의 경우라면 특별한 사건이 될 것이다. 각 단편의 무슨 여자들은 모두 이별을 경험한다.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하기엔 조금 시시할 수도 있지만 삶이란 원래 그런 거니까. 삶의 사건들이 특별하다기 보다는 그 안에서 느끼는 감정들이 특별한 것이다.

여자는 두 번 떠난다.

그냥 떠난다고 하면 될 것을, 왜 두 번이라고 했을까?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했는지는 모르겠다. 어떤 상황이든 곁에 있던 남자를 떠난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떠난다는 것이 여자에게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사랑이란 몸과 마음을 다해 상대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이별은 그 반대일 것이다. 이미 멀어진 남자 곁을 떠나고, 그 남자를 사랑했던 자신의 마음을 떠나야 비로서 이별이 된다.

주인공 남자들은 하나 같이 여자들 마음을 모르는 것 같다. 그러니 여자들은 떠날 수 밖에 없다. 이별의 이유는 다르겠지만 여하튼 그 남자들은 여자를 몰랐다. 그런데 작가는 너무나 섬세하게 여자의 마음을 표현해내고 있다.

<울지 않는 여자>를 보면 그녀는 정말 눈물이 많다. 작은 일에도 펑펑 울던 그녀가 둘 사이에 심각한 상황에서는 울지 않는다. 남자는 바보같이 묻는다. 오늘은 안 울어?라고.

너무나 울고 싶을 때는 눈으로 우는 게 아니라 가슴으로 운다는 걸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더 바보는 그녀다.  그만둘 수가 없었나 봐.라고 말한다. 솔직히 자기 얘길 못하는 그녀는 다른 사람 얘길 하고 있다. 보글보글 끓는 냄비를 들여다보는 남자와 여자, 그녀는 냄비 뚜껑을 거칠게 닫는다. 그걸로 끝이다. 과연 남자는 보글보글 끓는 냄비 같은 그녀의 속마음을 제대로 알아차릴 수나 있을까?

여자도 여자를 모른다.

아마도 여자라서 혹은 남자라서 그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길거리에서 혹은 전철에서 스쳐가는 사람들을 보며 단순히 겉만 봐 왔다면 이 책을 통해 속마음을 본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의 마음을 볼 줄 알아야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을 떠나 보낸 사람들에게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려면, 이 책을 통해 마음을 읽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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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그리고 시작
김명조 지음 / 문학수첩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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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으로 갈라선지 반 세기가 지났다. 한 때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분단의 아픔을 떠올렸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대한민국이 바라보는 북한은 맞서야 될 적()이며 국가안보를 위해 경계를 늦출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한민족이라는 끈끈한 민족애를 말하기에는 대립의 골이 너무나 깊은 것 같다. 물론 정부의 대북 정책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북한과 관련된 내용들은 대부분 금기시된 것도 사실이다. 또한 탈북자에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그 영향일 것이다.

<끝과 시작>은 대한민국의 양심적인 검사가 사건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은밀한 진실을 보여준다. 그것은 함부로 발설할 수 없는 북한과 대북 정책의 희생자에 관한 이야기다.

실제 사건은 극동 국장 살인사건으로 피해자가 정보부의 국장급 신분이란 점에서 비공개 수사가 진행된다. 살해 혐의를 받은 사람은 피해자의 처로서 이미 범행을 자백했고 공범자는 자살한 상태다. 범인의 자백을 통해 일단락되려던 이 사건이 갑자기 혼란에 빠진 것은 고문과 성폭행에 의한 자백이라는 피의자의 발언 때문이다.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으면 무죄인 것이 법이다. 검사로서 끝까지 범인 추적에 나선 그는 우연히 의문의 지문을 발견한다. 12년 전 주민등록이 말소된 사망자의 지문인 것이다. 지문의 흔적을 통해 서서히 밝혀지는 진실은 비극 그 자체다.

실제 사건 속에 숨겨진 더 엄청난 진실이 말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그러나 살아 있으면서도 침묵할 수 밖에 없다면 안타까운 일이다. 분단된 조국이 한 개인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심각하게 생각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무심할 때는 몰랐는데 막상 그 실상을 보게 되니 마음이 아프다.

십 몇 년을 한 지붕 아래 살면서 서로 미워한 부부 이야기나 한민족이 남과 북으로 갈라선 현실이나 다를 것이 없다. 아무리 부부면 뭐하고, 한민족이면 뭐하나?

그러나 그들의 자녀 혹은 후손들은 어떠한가? 부모가 싸워서 등을 돌렸다고 해서 어느 한 쪽만 편을 들 수는 없다. 갈라선 부모보다 더 괴로운 것은 자녀들이다. 어느 편을 들든 효도와 불효를 동시에 하기 때문이다. 이제 그 부모가 떠나고 남겨진 자녀들은 여전히 나뉘어 싸우는 중이다. 언제쯤 평화가 찾아올까?

<끝과 시작>은 비극이다.

양심적인 검사가 할 수 있는 일은 뭘까? 분명히 사건의 전말을 밝혀냈고 누가 범인인지 알게 됐으니 법의 심판을 따르면 되는 것일까? 아니다. 진실은 법의 잣대로 잴 수가 없다. 조국을 위해 침묵했던 그 사람처럼 검사도 어쩔 수 없이 침묵을 지킨다.

사건은 끝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나라가 지닌 분단이란 현실은 수많은 비극을 낳았다. 여전히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개인이 국가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 국가가 올바른 길로 이끌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변하는 대북 정책이 아니라 근본적인 평화 의지를 지녔으면 좋겠다.

육군 대령 황인성, 고인의 명복을 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어쩐지 실존 인물처럼 느껴진다. 그의 애국심이 존경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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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존 (반양장) 오멜라스 클래식
올라프 스태플든 지음, 김창규 옮김 / 오멜라스(웅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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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질적인 존재에 대해서 우리는 비호감을 표시한다. 단순히 다르기 때문이 아니라 미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는 존 웨인라이트(일명 이상한 존)의 일대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존재는 '지적인 천재 그 이상'이란 점에 동의한다. 그가 일반인과 다른 것은 지적인 능력만이 아니다. 아예 인류라는 호모 사피엔스를 벗어나기 때문이다. 돌연변이라고 해야 하나?

존은 호모 수페리어(우월한 사람 혹은 초인)이다. 어떤 이들에겐 괴물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

존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는 겉보기에는 존의 아버지 친구로서 보호자 역할을 하지만 실제로는 존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는 차차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들려주는 존에 대한 설명이 내게는 부정적인 첫인상을 심어줬다. 영화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박사를 떠오르게 만드는 섬뜩한 광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기이한 출생 과정(11개월만에 강제분만을 통해 태어났으며 외형은 7개월 태아수준임)과 성장 과정이 흥미로웠던 것은 사실이다. 그저 단순한 호기심과 흥미를 지닌 채, 마치 공포영화를 보는 심정으로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 것이다. 그만큼 존은 사악한 천재같았다.

왜 '같았다'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을 하느냐 하면 사악함의 기준이 무엇인지 잠시 혼란스럽기 때문이다. 이상한 존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최면에 걸린 것 같다. 존에게 설득당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존이 추구하는 신인류, 신세계가 진정한 이상향일까?

인간 중에 진짜 인간임을 자처하는 존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결국은 헤어날 수 없는 딜레마에 빠진 것 같다. 아무리 뛰어난 존도 비뚤어진 세상을 바로잡기에는 역부족이다. 존이 한심한 인간들을 비웃으며 인간 세상을 벗어나려고 해도 결국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이 그렇다. 너무나 고매한 정신을 소유한 호모 수페리어들을 파괴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힘은 무엇일까?

바로 섬뜩한 광기?  그러나 존의 무리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광기에 사로잡힌 인간들에게 대항하는 방법을 말이다.

존과 그의 무리들이 지닌 외형적인 특성은 마치 UFO에서 튀어나온 외계인과 흡사하다. 평균보다 큰 머리와 눈을 지녔고 거미같이 사지가 긴 모습이 다양한 인종을 뛰어넘어 공통된 특징이다. 엄마 자궁 속에서 11개월 머물고 신체 발육은 정상에 비해 더딘 것도, 생명을 지닌 태아 시기부터 전부 기억한다는 것도 동일하다.

주인공의 이런 특징 때문일까?

작품 해설을 보니 이 소설을 과학 소설로 분류하고 있다. 좀 의외였다.

이 책이 발표된 시기는 1935년이다. 국내에 소개된 것도 완역이 아닌 줄거리를 각색한 아동판 SF문고 <이상한 존>이라고 한다.

이제서야 73년 만에 제대로 완역된 <이상한 존>을 만난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존의 존재가 이 책이 갖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원래 올라프 스태플든은 SF 장르와 무관한 철학자이자 작가였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SF 장르의 선두에 있다는 것은 작품의 영향력이 시대를 초월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작가의 상상력은 미래의 오늘까지 뻗쳐있다.

존의 일대기를 봤지만 존이 과연 어떤 인간인지 제대로 안다고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존을 통해 인류의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다수의 호모 사피엔스로서 희망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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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후르츠 캔디
이근미 지음 / 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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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즐겨 보던 만화 캔디가 생각난다. 그 때는 주인공 캔디가 너무 좋아서 이름도 정말 멋진 줄 알았다. 캔디, 사탕이잖아. 심심할 때 달콤한 맛으로 즐거움을 주는 사탕을 사람 이름으로 쓰다니 귀엽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껌보다는 낫지 싶다.

<어쩌면 후르츠 캔디>라는 개성 있는 제목 덕분에 잠시 들장미 소녀 캔디를 떠올리며 추억에 잠겨봤다. 만화 주인공 캔디에 익숙한 세대라면 캔디는 밝고 강인한 소녀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 조안나 역시 캔디 못지않은 성격이다. 다만 그녀를 지켜줄 안소니 혹은 테리우스가 곁에 없을 뿐이다. 적절히 현실적인 상황과 우스운 오해들 뒤섞인 에피소드가 주말연속극을 본 듯한 느낌도 든다.

조안나는 학벌이나 외모로 내세울 것 없지만 당당히 젊은 패기로 메이저 광고대행사 자이언트 기획에 취직한다. 우연히 회장님의 친척과 이름이 같아서 로얄 패밀리로 대우받는 묘한 상황이 펼쳐진다. 과연 조안나에게는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사탕을 입에 물면 달콤한 맛에 입 안이 저릴 때가 있다. 이런 자극적인 달콤한 맛에 익숙해질 즈음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다. 분명 함께 즐거움을 나눈 것 같은데 사탕은 사라지고 허전함이 남는다. 인생은 어쩌면 후르츠 캔디가 아닐까?

캔디의 달콤함을 즐기는 순간이 있으면 사라진 순간의 허탈함도 받아들여야 하는.

조안나가 후르츠 캔디를 즐겨 먹는 것은 단순한 기호일 수도 있지만 그녀의 현실을 마치 CF처럼 표현한 것 같다. 광고회사 직원답게 모든 것이 CF 카피로 연상되는 걸 보면 그녀의 삶은 어쩌면 후르츠 캔디라는 카피가 딱 어울린다.

기발하고 산뜻한 몇 줄의 광고 카피를 볼 때의 느낌이랄까?

대기업의 신입사원이 된 조안나의 회사 생활이 그렇다. 답답하고 힘든 상황도 왠지 금새 사라질 것 같은 희망이 보인다. 열정을 지닌 사람처럼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신입사원, 사회에 첫 발을 내디딘 조안나의 순수한 열정이 사랑스럽다. 대부분 시간이 지날수록 세상 때가 묻고 반짝이던 열정은 그 빛을 잃어가니까.

조안나라는 톡톡 튀는 주인공이 없었다면 이야기는 평범한 신입사원의 에세이가 될 뻔했다. 직장인의 스트레스 중 대부분은 일보다는 인간 관계인 것 같다. 동료와의 경쟁, 상사와의 불화는 회사 생활을 힘들게 한다. 특별한 배경을 지닌 로얄 패밀리라면 모를까, 대부분 사회 초년시절의 스토리는 비슷할 것이다. 현실에서 실력보다 앞서는 것이 외모고, 그 모든 것을 능가하는 것이 배경인데 조안나의 경우는 실력으로 버틴 것이다.

학교라는 울타리는 뻔한 내용만을 말한다. 사탕을 입에 물면 달다는 것만 가르치고 그 다음은 안 가르쳐준다. 인생의 성공, 행복, 즐거움을 사탕에 비유하자면 사람은 더 많은 사탕을 얻고자 노력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은 노력할 필요 없이 이미 많은 사탕을 갖고 있다. 못 가졌다고 좌절하거나 더 많이 가진 자를 시기하지 말자.

사탕은 더 많이 가졌다고 그 맛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한 개를 먹더라도 내 힘으로 얻은 사탕이 제 맛이지 않을까?

조안나가 즐겨 먹는 후르츠 캔디는 그녀만의 열정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는 외로움에 대한 처방약쯤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아작아작 맛나게 씹어먹는 캔디 맛처럼 인생의 달콤함을 위하여 멋지게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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