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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밤새 한 권의 책과 함께 했다. 책이 주는 즐거움을 제대로 아는 정혜윤 작가의 두 번째 책이다. 이번에는 그녀가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 11명과 그들의 책 이야기다.
그렇다면 나는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할 수 있을까?
문득 어린 시절, 마당에 있던 수도 펌프가 생각난다. 한 두 바가지 정도 물을 부은 뒤에 열심히 펌프질을 하면 콸콸거리며 쏟아져 나오던 물을 보는 느낌이랄까?
책을 좋아하는 사람과 수다 떨기를 즐긴다는 그녀는 정말 책에 관한 한 화수분과 같은 입담을 지닌 것 같다. 처음 그녀의 책을 만나는 독자라면 다소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다. 그녀의 몫은 책에 대해서 한 두 바가지 정도의 물을 붓는 일이 될 것이다. 독자 입장에서 읽어 본 책이라면 함께 물을 붓고 펌프질을 하겠지만 아니라면 멀찍이 지켜보는 수 밖에. 어쩌면 구경하는 일이 더 재미있을 수도 있으니까.
사람에 관한 인터뷰가 참 독특한 방식으로 쓰여졌단 생각이 든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그들 삶에서 소중했던 한 권의 책을 이야기하다 보면 저절로 그 삶이 보인다. 마치 그 사람이 책 속의 일부인 듯 느껴진다. 그건 그들 모두가 진정한 독서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한 권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인생에서 우연히 혹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책이 무엇인지 이야기하다 보면 신기하게도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것이다.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라고 묻는다면 결코 듣지 못했을 답변을, ‘당신의 인생에는 어떠한 책들이 있었나요?’라는 물음 덕분에 듣게 된다. 우리 인생에 책이 없었다면 상상만으로도 삭막하다. 아니, 목마르다.
책에 관한 폭포수 같은 이야기들 속에서 시원한 기분이다.
<그 혹은 그녀의 책들>이 궁금하다면 맨 뒤편에 부록으로 정리되어 있다. 만약 뜬금없이 이들 책에 대해 말했다면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네들과 달리 나는 독서가가 아니므로 읽어보지 않은 책이 더 많다. 그러나 그네들의 삶 속에서 더욱 빛나는 한 권의 책을 보니 왠지 만나보고 싶다.
특히 은희경 작가가 선택한 세 권의 책이 그렇다. 쿤데라의 <느림>과 친기즈 아이트마토프의 <백 년보다 긴 하루>,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우리 시대는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고 있으며 그래서 너무 쉽게 자신을 망각한다. 한데 나는 이 주장을 뒤집어 오히려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시대는 망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으며 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속도의 악마에 탐닉하는 것” - 쿤데라의 <느림>
“저자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깨달음이 시작되는 것이 독서다.” – 장 그르니에
“……어느 정도 허상의 세계에서 벗어나 어린 시절의 독서가 정말로 자산이 되는 건 그게 현실과 맞붙으면서였죠.” –은희경
어린 시절에 독서에 탐닉했던 적이 없던 내게, 오히려 지금이 참다운 독서를 할 때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선 깨달음의 경지는 반드시 독서가만의 특권은 아닐 것이다. 또한 ‘살기 위해서’ 책을 읽는 사람이 되었다는 공지영 작가의 말처럼 책이 주는 의미는 각자의 인생만큼 다양할 것이다.
결국 이 책을 위한 마무리는 이것이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책이 있어 인생이 즐거운 사람이라면 당연히 만족할 만한 책이라고.
“한 권의 책이 무한한 책이 되는 방법은 무엇인가? 취팽은 그 문제를 풀었다. 우리 역시 취팽의 무한히 확장되는 한 권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게 있다. 책은 홀로 떨어져 있는 사물이 아니라 각 페이지가 개별적인 인간들과 맺는 무수히 많은 관계라는 것…….” (310p)
“보르헤스는 각각의 책은 각각의 독서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고 말했다. 즉 누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의미가 무한하다고 했다. 한 권의 책의 운명은 쓰인 시간에 결판나지 않고 오히려 앞으로 다가올 어떤 의미 부여를 기다리는 형식이라 했다.” (31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