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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중지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9년 2월
평점 :
죽음을 주제로 글을 쓰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어둡고 절망적인 내용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 이 책 표지만 보더라도 죽음의 상징처럼 느껴지는 검은색으로 되어있다. 하지만 작가가 누구인가?
바로 주제 사라마구다. 꽤 친한 척 말하지만 사실 내가 만나 본 그의 작품은 <눈먼 자들의 도시> 이후 <죽음의 중지>가 두 번째다. 그러나 첫 인상이 워낙 강렬하고 독특했기 때문에 이번 역시 기대했고 결과는 만족스럽다. 죽음을 주인공으로 이토록 유쾌한 글을 썼다는 점이 놀랍다. 이제까지 내가 본 죽음 중 가장 멋지다. 여기서 말하는 죽음은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다. 죽음을 거행하는 자, 죽음의 여신이라 일컬어지는 미지의 존재를 뜻한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다.
“다음 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이 문장으로 시작하여 이 문장으로 끝난다. 어떤 사물이나 존재에 대한 가치나 중요성을 설명하기 위해 흔히 사용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뒤집어 상상해 보는 것이다. 우리의 주인공은 죽음이다. 현재 살아 숨 쉬고 있는 사람들에게 죽음의 의미는 막연할 수밖에 없다. 아무도 경험담을 말해줄 수 없기 때문에 실체를 알 수 없고 두려움은 클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죽음이 사라진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다. 죽음의 중지, 죽음이 자신의 임무를 중단할 때 우리의 삶은 어떻게 변할까?
상황설정은 황당하지만 이야기는 꽤 현실적으로 진행된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가족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 축복으로 여겨진다. 그들은 선택받은 불멸의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임종을 앞둔 수많은 사람들이 그 상태로 살아 있으니 병원은 그런 사람들로 가득차고 이들을 돌봐야 하는 가족들은 힘겹다. 죽지 않을 뿐이지 아픈 사람들은 여전히 아프고 심각한 부상이나 상처를 입은 사람들은 괴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나중에는 의료보험이나 연금 문제까지 심각한 사회 문제가 생겨난다. 죽어야 될 사람들이 죽지 않으니 보험회사도 장례 관련사업자들도 혼란에 빠진다. 특히 종교계야말로 죽음이 없는 세상에서는 할 말을 잃는다.
이 때 죽음이라는 주인공이 멋지게 등장한다. 아니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방송사에 편지를 보내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귀환한다. 이 부분에서 크게 웃었다. 죽음도 유명 연예인처럼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었던 걸까? 돌연 은퇴 선언을 했다가 슬그머니 컴백하겠다고 방송사에 알렸으니 말이다. 죽음이 은퇴했던 기간은 겨우 일곱 달이지만 사회적 파장은 엄청났다. 당연한 결과다.
“자, 어때? 나를 잔인하다고 했던 인간들아, 그 동안 내가 사라지니까 행복했니? 내가 왜 이 세상에 필요한지 이제는 깨달았겠지? 대신 앞으로는 갑작스런 죽음으로 억울한 일은 없을 거야. 오늘부터 죽게 될 사람들에게는 미리 일주일 전에 편지를 보낼 테니까.”
대충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갑작스런 죽음, 예기치 못한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불만을 접수한 것이다. 죽음이 이렇게 친절하다니, 왜 죽음을 여자로 묘사했는지 알 것 같다. 섬세하고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인 죽음이 친근하게 느껴질 정도다. 물론 절대 친해지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작가 특유의 상상력과 매력적인 문체로 새롭게 태어난(?) 죽음을 만나보니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다소 사라진 것 같다. 죽음을 약간은 엉뚱하지만 객관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기회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아이들이 읽는 동화가 떠올랐다.
<개암 껍질 속에 갇힌 죽음> - 글 에릭 매던/ 그림 폴 헤스/ 옮김 부희령
이 동화 역시 죽음이 사라진다면 세상이 어떻게 될 지를 그려낸 이야기다. 잭이라는 소년은 아픈 엄마와 단 둘이 살아간다. 어느 날 바닷가에서 노인의 모습을 한 저승사자를 만난다. 엄마를 데려가려고 온 것이다. 잭은 저승사자와 싸워 빈 개암 껍질 속에 가둔다.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에서는 채소도 달걀도 먹을 수 없게 된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죽을 수 없으니까.
결국 잭은 엄마에게 저승사자를 만난 일을 이야기하고 개암 껍질을 찾아 저승사자를 풀어준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다.
죽음 없이는 삶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죽음의 중지>는 바로 어른들을 위한 동화같다. 오히려 아이들 동화보다 죽음이 더 매혹적으로 묘사된 것 같다. 죽음 앞에서는 모두가 어린아이의 심정일 것이다. 죽음을 통해 삶을 돌아보게 하는 철학동화 한 편을 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