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
케빈 마이클 코널리 지음, 황경신 옮김 / 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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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과 다르다는 것이 비극일 경우는 세상이 그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가 아닐까?

태어날 때부터 두 다리가 없는 케빈은 가족 안에서 자신의 몸이 남들과 다르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점점 커갈수록 사람들의 시선, 가족들이 느끼는 감정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스케이드보드를 타고 세계 여행을 다니며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사진으로 찍는 일이었다.  이 책은 두 다리가 없는 케빈이 세상을 보는 시선과 그 세상이 케빈을 바라보는 시선을 담고 있다.  한 사람으로서 따뜻한 마음이 없는 것이 끔찍한 것이지, 두 다리가 없다는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닌데......

"나를 보고 놀라지 마시라"

우리나라는 신체에 큰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마음껏 외출하기 힘든 곳이다.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은 차치하고라도 어디 길거리나 버스 정류장, 지하철 역까지,  다니기 불편한 곳이 너무 많다.  그 때문인지 시내에서 휠체어를 탄 사람을 보기란 쉽지 않다.

오죽하면 광화문 광장에 중증장애를 가진 분이 거리 시위를 하겠는가. 가고 싶은 곳을 마음대로 갈 수 있는 이동권, 탈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시민으로서 당연한 권리다. 더 나아가 장애를 가져도 능력만 있다면 일할 수 있는 권리, 노동권을 보장해주는 일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다수의 사람들은 장애를 가진 소수의 사람들의 권리에는 무관심하다. 어쩌면 자신이 장애인에 대한 무관심 혹은 차가운 시선을 가졌다는 사실조차 인식 못하며 사는지도 모른다.

케빈이 찍은 사진 속에는 미국을 비롯한 영국, 프랑스, 일본,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체코, 루마니아 등 나라는 다르지만 케빈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공통된 시선이 느껴진다. 마치 그 사진을 보는 우리가 케빈이 된 것 같다. 환영받지 못한, 뭔가 주변과 동떨어진, 불편한 느낌이 전해진다. '이런 거였구나. 케빈은 이런 시선을 받으며 살아왔구나.'

누구든 이런 시선을 감당하긴 쉽지 않다. 더군다나 케빈은 여행을 하는 동안 자신에게 동전을 던지거나 지폐를 주는 사람들 때문에 분노했다. 그는 거지가 아니라 평범한(?) 여행자일 뿐인데 사람들은 동정하고 그에게 자선을 베풀었다. 원치 않는 동정이 얼마나 큰 상처를 주는지 그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아니, 나 역시 모른다. 휠체어를 탔거나 의족 혹은 의수를 한 사람들을 보면 시선을 어디다 둬야 할 지 몰라 당황하고 어떻게 도와줘야 할 지 망설이게 된다.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냥 평범하게, 다른 사람들처럼 대해주는 것인데. 또한 휠체어나 의족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위한 편의수단이 아니라 족쇄일 수 있음을 처음 알았다. 특히 의족이나 의수는 실제 손이나 발의 기능보다는 미각적인 기능이 크기 때문에 착용하는 사람의 편의와는 무관하다. 정상적인 모습으로 꾸며서 서로 불편한 상황을 피하려는 목적이 큰 것이다. 물론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케빈은 굉장히 불편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과감하게 의족을 버리고 스케이드보드를 타고 다님으로써 세계 여행까지 할 수 있었다. 문제는 다리가 없는 케빈이 자신의 몸을 스케이드보드에 올라탄 채 자유롭게 다니는 모습이 타인에게는 매우 당황스러운 광경이란 점이다.

만약 케빈이 자신이 사는 동네에서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면 주변의 불편한 시선쯤은 웃어넘길 수 있었을 것이다. 케빈의 부모님은 그가 처음 태어났을 당시에는 무척 혼란스러웠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고 넘치는 사랑을 주셨다. 아버지는 케빈을 위해 잘하지도 못하는 스키를 배우고 대회 출전을 시키기 위해 장거리 운전도 마다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케빈이 무엇을 하든 사랑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사랑하는 두 여동생 역시 케빈을 영원히 응원해줄 가족들이다.

그러나 케빈은 편하고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낯선 시선을 감내했다. 왜 그랬을까?

 

"누가 나를 들어 올려주지 않으면, 무슨 수로 계산대에 손을 뻗을 수 있지?

 누가 나를 옮겨주지 않으면, 무슨 수로 25센티미터 높이의 눈이 쌓인 주차장을 지나갈 수 있지?"

그 모든 난감한 일들, 수년 동안 부모님의 마음 속에 가득 차 있던 문제들이 내 마음 속으로 자리를 옮기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모든 대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최소한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은 찾아가고 있었다.

다리 없는 사람에게 적응하지 못하는 이 세계에, 나는 무슨 수로 적응할 것인가?

                                                                                - 26p~ 27p-

 

낯설고 무심한 사람들 속에서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낸다는 건, 세상을 향한 외침이며 1인 시위였다.

"나를 보시라, 다리가 없어도 세계 여행을 할 수 있다.

나를 가로막는 것은 다리가 없다는 장애가 아니라 다리 없는 사람을 적응 못하는 세상의 수많은 시선이라고."

분명 이 책을 읽기 전까지의 나는, 그러한 시선으로 바라봤을 것이다. 하지만 케빈이 들려주는 이야기와 사진을 보면서 더블 테이크(double take)를 알게 됐다. 더블 테이크란 문득 갑자기 다시 돌아보는 것, 글자 그대로  또한 상징적인 의미에서,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사람 또는 사건의 의미에 대해 문득 다시 돌아보는 것을 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견과 차별 없는 순수한 시선이다. 케빈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더블 테이크의 기회를 준 것이다.

이미 케빈은 자신이 세계 여행을 하며 찍은 사진으로 <롤링 전시회>까지 열었고 이 책에 실린 사진도 그 중에서 발췌한 것이다. 그를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보면 놀랍다고 말할 것이다.  세상을 향한 그의 용기와 도전에 대해 놀라움을 꼭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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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톨레마이오스의 문 바티미어스 3
조나단 스트라우드 지음, 남문희 옮김 / 황금부엉이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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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혹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적 결말'이란 정말 예상을 못해서가 아니라 예상하기 싫은 결말이란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바티미어스 3부작 <프톨레마이오스의 문>의 결말은 충격보다는 실망이었다. 내가 원하는 판타지는 이런 식으로 끝나면 안 된다. 유치한 독자라고 말해도 어쩔 수 없다. 나타니엘과 키티는 분명 매력적인 주인공들이다. 하지만 3부에서 보여준 그들의 활약은 뭔가 부족한 듯, 안타깝다. 나타니엘, 아니 존 맨드레이크는 더 이상 초롱초롱 눈망울이 빛나던 소년 마법사가 아니다.  성공에 눈 먼 한심한 인간, 그건 이미 2부에서 시작된 변화였고 그것을 멈출 사람은 키티뿐이었다. 그래서 마지막 3부에서는 엄청난 기대를 했던 것 같다. 

이 책에서 마법은 우리의 상상을 자극하는 판타지가 아니라 권력의 상징이다. 그래서 판타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느낌으로 변해버린다.  어린 소년이 마법을 배우면서 정식 마법사가 되는 과정은 꽤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 소년이 정치, 권력의 핵심 인물로 변해가는 건 영 재미없다. 그는 순수함과 열정을 잃어버린 어른이 된 것이다.  마법사에게 불려나온 요괴, 지니들은 노예처럼 혹사당하고 평민들 역시 노예처럼 인권이 짓밟힌 채 살아간다.  권력에 대항하던 레지스탕스는 숨어버렸고 평민들 사이에 분노는 커져만 간다. 현명한 지도자로서 존경받던 수상 데브로는 게으르고 탐욕스런 독재자로 변한지 오래다. 왜 마법이 권력의 상징으로 묘사되었는지 알 것 같다. 마법은 마치 열어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 같다. 세상을 혼돈 속에 빠뜨리며 마법사들은 점점 타락한다. 마법을 이용해 권력을 손에 쥔 마법사들에게 권력은 악마의 유혹처럼 그들의 영혼을 갉아먹는다.

3부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것은 우리의 영원한 지니 바티미어스다. 존 맨드레이크에게 3년 간 얽매여 있다보니 본질의 힘이 바닥나고 레벨이 낮은 요괴한테 무시당하는 처지가 된다. 얼마나 힘이 빠졌으면 특유의 재치와 유머까지 고갈되었을까. 존과의 관계는 험악해지고 힘은 약해졌으니 정말 처량하다. 그나마 키티가 바티미어스를 소환하면서 희망은 보이기 시작한다. 1부와 2부에서 바티미어스는 자주 이집트 소년으로 변신했었다. 그 이집트 소년은 바로 프톨레마이오스다. 바티미어스가 유일하게 신뢰했던 인간이며 친구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인간 세상과 요괴들이 존재하는 저 세상의 완벽한 균형과 소통을 원했다. 그것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유토피아가 아니었을까.

드디어 세월에 묻혀 잊혀졌던 프톨레마이오스의 문이 열린다. 키티는 처음부터 끝까지 정의를 위해 싸우며 타락한 마법 세상을 구하는 영웅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비록 원하던 결말은 아니었지만 멋진 결말이다. 바티미어스와 함께 영원히 기억될 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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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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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리 : 소매치기

 

이 책은 나쁜 놈에 관한 이야기다. 남의 것을 훔치는 소매치기와 남의 삶을 훔치며 즐기는 남자가 등장한다. 우리는 그들을 지켜본다. 아니 어쩌면 우리들은 나쁜 놈이 어떻게 사는지를 훔쳐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악(惡)에 대한 호기심을 넘어 일종의 동경이 있는 것은 아닐까?  바르고 착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면 나쁘고 악한 것은 선택이다. 당신은 얼만큼 나쁜가?  글쎄, 나쁜 것도 등급이 있을까?  만약 등급지어 나눌 수 있다면 이 책에는 세 가지 부류의 나쁜 놈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시카와 - 흔하게 나쁜 놈

"사실 참 아름다워. 그건 인생의, 이 세상의 아름다움 중의 하나야.하지만 우리는 그 아름다움을 이용해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하지. 사람들이 불꽃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 있을 때, 우리만은 그 아름다움을 보는 대신 그들의 주머니를 보고 있어. 그게 좀 뭐랄까...... 지겨웠어." (38P)

전형적인 소매치기다. 우리가 짐작할 수 있는 나쁜 놈의 특징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그에게 있어서 소매치기란 단순한 직업인 것이다. 그래서 가끔은 그 일이 지겹고 싫어진다. 먹고 살기 위해 나쁜 일을 하는 사람은 흔하다.   

 

기자키 - 가장 악랄하게 나쁜 놈

"이런 인생에 가장 올바른 삶의 방식은 고통과 기쁨을 잘 구분해서 쓰는 거야. 모든 것은 이 세계에서 부여하는 자극에 지나지 않아...... 네가 만약 악에 물들고 싶다면 결코 선을 잊어서는 안 돼......죽음의 공포를 의식적으로 즐기란 말이야. 그걸 할 수 있을 때, 너는 너를 초월할 수 있어. 이 세계를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어......신이나 운명이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착한 인간이나 어린애가 불합리하게 죽어가는 이 세계에서!" (165p)

정말 이런 인간이 있을까?  범죄 영화에서 등장하는 사이코패스 같다. 그냥 나쁜 정도가 아니라 사악한 놈이다. 소매치기야 그저 남이 가진 돈이나 물건을 훔치지만 이 녀석은 남의 불행을 즐긴다. 마치 자신이 신이 된 것처럼 행동한다. 치밀하게 아주 서서히 누군가를 파멸로 이끄는 과정을 잔인하게 즐긴다. 상상이라도 내게 특별한 능력이 주어진다면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똑같이 고통을 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어떤 끔찍한 일을 저질렀는지 알 테니까. 그럼 나 역시 악한 사람이 되는 걸까?

 

주인공 '나' = 니시무라 - 어설프게 나쁜 놈

타인의 물건에 내 손가락이 닿는 순간의 긴장과 그 뒤에 찾아오는 따끈하고도 확실한 온도에. 그것은 다양한 가치를 부정하고 다양한 속박을 학대하는 행위였다. 필요한 것을 훔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훔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훔친 뒤에 버렸다. 들어가서는 안 되는 영역으로 뻗쳐진 내 손가락, 위화감 따위는 죄다 지워버리는 내 손가락 끝의 살갗에 내달리는 쾌락을-. (206p)

소매치기라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인간이다. 물론 소매치기한 돈으로 생계 유지를 하니까 당연히 나쁜 놈이다. 하지만 뭔가 어설프게 나쁘다.  그냥 나쁜 놈이라고 치부하기엔 마음이 여리다. 가엾은 소년을 자꾸 도와준다. 점점 마음을 준다. 결국 그들 때문에 약점을 잡히고 덫에 걸린다. 그래서 슬프다. 어설프게 나쁜 것은 슬프다.

 

손에 쏙 들어오는 작은 책 한 권이 내 마음을 훔쳤다. 나는 나쁜 세 놈의 삶을 훔쳐봤다.

하지만 너무 기대하지는 마시라, 결국 나쁜 얘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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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몽
황석영 지음 / 창비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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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인가 인터파크에서 연재되는 <강남몽>을 우연히 읽게 됐다. 인터넷 연재소설은 처음이라서 신기한 마음에 매일 출석하며 읽었는데 어찌하다보니 중간에 맥이 끊기고 말았다. 한국 사람은 情으로 산다더니 두어 달 情든 소설인지라 출간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다. 도대체 박선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제목에 들어간 夢(몽)이 처음에는 낯설더니 마지막 장을 읽고나서야 고개가 끄떡여진다.  한국의 현대사를 단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랴. 파란만장한 등장인물들의 삶이 결국에는 다 부질없는 꿈이었더라는......그러나 단순히 그렇게 결말을 맺기에는 뭔가 허전함이 남는다.  '한강의 기적', '강남 형성사', '광복 반세기', '격변의 정치사' 등등 우리의 현대사는 그야말로 신기루 같다. 어떻게 이런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그냥 한낱 꿈이라면 좋았을 것을.......

뜨겁고도 슬픈 꿈, 우리의 삶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아마도 이 책을 인터파크 연재 소설로 만난 이들은 처음에 등장한 박선녀에게 남다른 관심을 가졌을 것 같다. 이름부터 남다른 그녀에게서 뭔가 특별한 인생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매일 연재되는 소설의 매력은 식물을 키우듯 천천히 조금씩 그 성장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일 것 같다. 그래서 전체적인 흐름보다 특정 인물이나 사건에 연연하게 되는 것 같다.

그런데 막상 한 권의 책으로 끊김없이 읽다보니 전혀 다른 느낌이다. 누굴 딱히 주인공이라고 눈여겨 볼 필요없이 광복 이후의 시대상이 한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한 개인의 삶은 미약하게 느껴질 정도다. 제아무리 잘난 놈, 가진 놈, 힘센 놈도 역사를 거스르거나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법이다.

1995년 6월 29일, 삼품백화점 붕괴 사건이 있던 날, 나는 어느 두메산골 마을에 있었다. 대학 써클에서 농촌봉사활동 중이라 전혀 텔레비전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우연히 이장님 댁에서 식사하던 중 이 소식을 접했다. 모두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도대체 어떻게 백화점이 무너질 수 있지?  겨우 며칠 서울을 떠나있었는데 마치 한 순간에 몇 십 년이 지난 것처럼  세상이 변해버린 느낌이었다. 화려한 강남의 한복판, 눈부신 경제 개발의 성과물이 무너져버린 것이다. 성수대교가 무너진지 불과 8개월 밖에 되지 않은 때라 충격이 더 컸던 것 같다. 아무도 막지 못한 재앙의 원인은 인재로 밝혀졌고 무리한 개발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그냥 그 뿐이었다. 세월과 함께 서서히 잊혀졌다.

강남몽은 우리에게 잊혀졌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일제 시대를 거쳐 광복 이후, 나라를 찾았으나 바로 세우지 못한 역사적 오점이 어떻게 현재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담담하게 보여준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역사는 흐르고 우리의 삶도 흘러가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무너진 성수대교, 삼풍백화점은 단순한 사건이 아닌 역사적 경고가 아니었을까? 수많은 희생자들을 애도하면서 우리는 정신을 차려야 한다. 그저 끔찍한 악몽처럼 떨쳐버려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는 신기루 같은 경제 성장이 아닌 굳건한 정신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할 시기인 것 같다. 무엇보다 올바른 역사관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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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 2 : 세계와 나
MBC 'W' 제작팀 지음 / 삼성출판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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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국제 시사프로그램 [W], 두 번째 책이 나왔다.

세계와 나 - 이제는 세계 지구촌 속의 나를 생각하는 시대인 것 같다.  비록 텔레비전 혹은 책을 통해 만나게 되는 지구촌 소식이지만 의미있는 정보를 접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

프랑스 자전거 혁명, 벨리브 프로젝트 등을 제외하고는 다소 심각한 내용들이 많다. 그만큼 현재 지구촌은 위기에 직면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안타까운 일들이 많은 것 같다. 지구 온난화로 인해 점점 수몰될 위기에 처한 몰디브나 식량 위기를 맞은 이집트, 필리핀을 보면서 우리나라 역시 안전지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특히 지구 환경문제에 대해서는 최근 멕시코만 기름유출 사건이 떠올라 끔찍하다.  그저 손놓고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니 답답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월드컵 열기로 이런 심각한 뉴스는 잠시 외면당하는 느낌이지만 엄연히 현재 지구촌이 겪고 있는 문제다.  <W>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도 나만이 아닌 세계를 향해 열린 눈을 갖자는 것이다. 두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몰랐을 세계 곳곳의 이야기들을 통해 배우고 느낄 수 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 같다.  언론 탄압이 심각한 스리랑카에서 당당히 진실을 위해 싸우겠다는 언론인들, 코미디를 통해서 언론 탄압과 부정부패를 통렬히 풍자하는 이탈리아 코미디언 베페 그릴로를 보면서 새삼 용기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정의를 위해 주저하지 않고 행동하는 이들이 있기에 세상은 희망이 있는 것 같다.

종교적 갈등으로 그들만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인도, 40년 넘게 내전에 휩싸인 콜롬비아에서 무장 게릴라에게 납치된 아들을 위해 11년을 기다린 가족의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이다. 내전의 아픔 속에서 납치 피해자들의 석방을 부르짖는 쇠사슬 아버지 몬카요가 없었더라면 아들의 석방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신의 아들은 11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지만 다른 수천 명에 달하는 납치 피해자들을 위해 앞으로도 계속 쇠사슬 순례를 한다는 그가 존경스럽다.

브라질 AIDS 감염자 카줄 바호흐는 질병과의 싸움보다 사람들의 편견과 싸우는 일이 더 힘들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AIDS 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으려는 카줄의 노력과 적극적인 치료 정책을 하는 브라질 정부 덕분에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게 되었다. 반면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현재 5000여 명의 AIDS 감염자 중 그들의 사망 원인 20%가 자살이란 것은 꽤 충격적이다. AIDS 감염도 무섭지만 사람들의 무관심과 오해가 더욱 무섭다. 

양성평등을 위해 도전하는 볼리비아 여성 레슬러 촐리타의 노력은 눈물겹다. 그녀가 처음 레슬링을 한 것은 가난과 배고픔을 피하기 위해, 무엇보다 남편의 폭력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여자도 싸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멋진 도전이 되었다.

의료 사각지대, 미국에 관한 이야기는 무척 놀랍고 충격적이었다. 선진국인 미국에서 30초당 한 명씩 비싼 의료비로 파산하고 치료를 위해 국경을 넘어야 하는 환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황당할 뿐이다. 시장과 기업의 논리때문에 울어야 하는 환자들을 생각하니 미국에 대한 환상이 여지없이 깨진다.

[W]는 불편하고 괴롭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진실을 보여준다. 그래야만 변화되고 발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는 모두가 세계 지구촌을 위해 노력해야 할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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