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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와라 신야, 여행의 순간들
후지와라 신야 글 사진, 김욱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여행기를 읽는 이유는 뭘까?
첫째, 지금 현재 여행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앞으로 여행을 할 계획이 있기 때문이다.
셋째, 그냥 여행 이야기가 좋아서다.
이 세 가지 이유는 내 경우다. 여행을 가고 싶지만 시간이 될 때는 돈이 없고, 돈이 될 때는 시간이 없었다. 세상에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고 하지 않던가. 지금 돌이켜보니, 여행을 동경하면서도 선뜻 배낭 메고 나서지 못한 것은 시간이나 돈 때문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건 두려움이었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서 벌어질 위험, 불편을 감내할 용기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안전한 쳇바퀴 안에 안주하면서 남들의 여행기를 통해 대리만족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은 좀 다르다. 이제까지 읽어 본 여행기처럼 뭔가 멋지다거나 부러운 기분이 들지 않는다. 마치 그 동안 품어왔던 여행에 관한 환상을 깨는 느낌이다. "너희들은 여행을 아름답게만 상상했지? 현실은 다르다고."라고 말하는 듯하다.
알고보니 이 책은 잡지에 연재되던 여행기였는데 정해진 콘셉트가 있었다고 한다.
짧은 문장으로 여행을 묘사할 것.
사실에 입각해서 최대한 단순하고 즉물적인 에피소드로 꾸밀 것.
그 결과, 이 책은 '여행'이 아닌, '여행자'에게 초점을 맞추게 된다. 어찌보면 이 책에서 어디를 여행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어딜 가든 낯선 장소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여행자가 중요한 것이다. 여행이란 자신을 둘러씬 현실의 고리를 끊고 새로운 현실과 맞닥뜨리려는 도전인 것 같다. 낯설지 않고서는 새로움이란 없다.
후지와라 신야는 원래 전문 여행가가 아닌 사진가라고 한다. 그 때문에 여행 속 시선은 카메라 앵글을 통해 표현된다. 우연하게 혹은 은밀하게 찍은 사진들 속에는 묘한 분위기가 읽혀진다. 평범한 우리들 여행이었다면 어김없이 장소 인증을 위한 사진들을 엄청 찍어댔을텐데, 그의 사진은 <여행의 순간들>이란 제목처럼 순간, 찰나를 붙잡고 있다. 마치 사진 속 풍경과 사람들이 무언가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잠시 멈춘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을 붙잡을 수 있다면 그건 사진이 아닐까.
여행을 하면서 무엇을 찍느냐는 건 여행자의 시선을 짐작하게 한다. 그리고 간략한 설명을 통해서 그 순간들을 상상하게 된다. 여행자의 시선은 오로지 여행자의 몫이므로 그의 여행 속 이야기가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다. 그 곳 사람들에게는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이 사진을 통해 특별해진다. 그 장소를 보여주기 위한 그들 입장에서 여행자는 일종의 침입자다. 평범한 일상을 깨고 들어온 불청객이며 이방인이다. 그의 시선을 따라 찍힌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다. 후지와라 신야는 원래 전문 여행가가 아닌 사진가라고 한다. 그 때문인지 유독 사진이 주는 느낌이 인상적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책 사이즈가 작아서 사진의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반으로 나뉜 사진은 찰나에 놓친 장면처럼 아쉽다. 누군가 여행을 하면서 겪은 경험이란 온전히 그 여행자의 몫이다. 여행자의 글과 사진은 남겨진 잔상이 아닐까? 후지와라 신야의 글은 매우 솔직하다. 그 점이 다소 거북할 때도 있지만 삶을 대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