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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사랑한다는 건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랑에 관한 소설을 읽을 때는 나름의 기대가 있다. 현실보다는 달콤하고 짜릿한 대리만족이랄까.
그런데 이 소설은 다르다. 지극히 현실적이며 집요하다.
한 남자는 사랑하던 여자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지를 받는다.
“너를 파악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어.” 로 시작되는 편지 속에는 그 남자가 얼마나 이기적이며 사랑에 대해 무지한지를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다. 결국 그 남자는 여자의 마음을 전혀 몰라줬기 때문에 차인 것이다. 몇 주 뒤에 그 남자는 서점에서 우연히 책 더미에 부딪혀서 두툼한 책 한 권을 바닥에 떨어뜨린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전기, 책 표지에는 “공감하다”라는 문구가 그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책은 한 남자가 실연을 당한 뒤에 쓴 반성문이자, 그 여자에 관한 전기(傳記)이다. 살아있는 사람을 상대로, 그것도 이미 헤어진 연인의 전기(傳記)를 쓴다는 게 이해가 안 된다. 차라리 그녀와의 아름다운 추억이나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 글이었다면 납득했겠지만 전기(傳記)라니!
사실 반성문은 아닌 것 같다. 자신의 잘못을 깨닫기 보다는 변명에 급급하니까. 여자는 남자가 자기를 존중하지도 않고 무관심하다고 탓했기 때문에 남자는 자신이 아는 그녀의 모든 것을 떠들고 있는 것이다. 참, 그녀의 이름은 이사벨이다. 혹시나 사랑과 이별에 관한 풋풋한 이야기를 상상했던 독자들에게는 당황스럽겠지만 이 책은 <이사벨의 사생활>에 관한 보고서 같다. 그녀의 솔직한 고백들을 참고로 작성된 전기(傳記)를 보면 가계도, 부모님과 가족 이야기, 어린 시절부터 현재까지 사귀었던 남자들, 키스와 같은 성경험, 시시콜콜한 둘만의 대화, 사소한 습관까지 매우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마치 여자의 이별통보에 대한 복수란 생각이 든다. 소설이니 다행이지 책 중간에 실린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만약 헤어진 남자가 나의 사생활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공개한다면 소송감이다. 세상에 믿을 사람 없다더니 사랑할 때는 ‘님’이요, 헤어지면 ‘남’이 아닌 ‘웬수’란 걸 보여주는 증거다.
그녀와의 첫 만남은 평범하지만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만약 그녀가 다시 말을 걸지 않았다면 뻔한 철부지 숙녀로 단정 짓고 끝났을 인연이다. 그런데 예상치 못했던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편견을 인정하면서 사랑은 시작된다.
…….어쨌든 이렇게 인상이 변했다는 사실은 [우호적이든 비우호적이든] 편견이 나의 사람을 파악하는 법에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지 깨닫게 해주었다.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그들을 보는 우리의 관점이 달라지는 자기중심적인 면을 깨닫게 된 것이다........ (50p)
이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면 잊지 말았어야했다. 하지만 이 남자는 구제불능이다. 이기주의자가 사랑에 빠진다고 박애주의자로 바뀌진 않는다. 그녀야말로 남자를 제대로 볼 줄 몰랐기 때문에 호되게 당한 것이다. 스물다섯 살의 그녀, 안타깝다.
그녀의 말처럼 이 남자는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강박되어 있어서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너를 사랑한다는 건’ = 강박, 집착?
원래의 책 제목은 Kiss & Tell 이다. 유명인과 맺었던 밀월 관계를 언론 인터뷰나 출판을 통해 대중에게 폭로하는 행위를 말한다. 책 첫 장에 적힌 이 내용을 봤을 때는 미처 생각을 못했다. 이 남자가 너무나 장황하게 ‘전기(傳記)’ 얘기를 떠들어서다. 마치 그녀를 떠올리며 전기(傳記)를 쓰는 것이 이 남자가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는 방식이라고 잠시 착각했다. 물론 그녀의 적나라한 비밀과 연애사까지 밝힐 때, 비뚤어진 남자의 본심을 파악했지만.
그는 여자의 이별통보를 배신이라고 판단했고 그에 맞서 복수극을 펼친 것이다.
“......나한테는 나도 이해 못하는 게 많아. 솔직히 말하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고, 왜 너한테는 모든 게 그렇게 분명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마치 사람들의 삶이 그 말도 안 되는 전기 안에 요약 정리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야........” (330p)
사랑한다는 건 그 사람을 완전히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부분까지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닐까? 그래서 사랑은 누구나 쉽게 말할 수는 있어도 제대로 사랑하기는 어려운가보다. 이별이 아름답지 못한 건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