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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못 다한 이야기들
마르크 레비 지음, 강미란 옮김 / 열림원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마음속에 차마 못 다한 이야기들이 있나요?”
언젠가 라디오를 듣다가 울컥 눈물을 쏟은 적이 있다. 혼자라서 맘껏 울었던 것 같다. 슬퍼서도 아니고, 아파서도 아니었다. 단지 ‘어머니’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눈물샘을 건드리는 자동버튼처럼 어떤 준비도 없이 쏟아진 눈물이었다.
어린 시절, 내게 있어서 엄마는 “엄마!”라고 부르며 어리광부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다른 형제들에 비해 엄마와 함께 할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의 사랑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쟁취해야 할 과제였던 것 같다. 늘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힘들 때도 있었다. 사실 부모님은 나의 이런 속마음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부모님이 일부러 차별해서 대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뭔가 부모님과 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었다. ‘난 부모님이 진정으로 원하고 사랑하는 아이가 아니야.’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던 것 같다.
나중에 결혼해서 아이가 생긴 뒤에야 오래 묻어두었던 마음 속 이야기를 할 용기가 생겼다. 내 기억에는 흐릿하지만 어린 시절에 엄마가 무척 아프셨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엄마와 떨어져 지내야 했고 회복되신 후에도 엄마와의 시간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엄마 입장에서도 유독 많이 떨어져 지낸 나의 존재가 안쓰러우셨던 것 같다. 그런데 그 마음을 직접 표현하신 적은 없었다. 어쩌다보니 서로의 마음을 숨긴 채로 세월이 흘렀던 것 같다. 용기를 내어 먼저 속마음을 열었더니 의외로 엄마에게도 나름의 상처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엄마에 대한 나의 마음은 억지스러운 어리광이 더 많았던 게 아닌가 싶다. 엄마 역시 한 때는 연약한 아이였다는 걸, 엄마도 사랑받고 싶었다는 걸……. 예전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리고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엄마에게 속마음을 전할 수 있어서,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어서, 엄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차마 못 다한 이야기들>은 아버지와 딸에 관한 이야기다. 서로에 대한 오해와 갈등으로 17년 동안 대화조차 없었던 부녀지간이다. 결혼식을 앞두고 아버지에게 청첩장을 보낸 딸에게 전화가 온다. 아버지는 결혼식에 참석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돌아가셨으니까. 결국 딸은 자신의 결혼식 날에 아버지의 장례식을 치른다. 그 뒤에 딸의 집으로 배달 온 커다란 상자 속에는 상상도 못할 것이 들어있다. 여기까지 읽었을 때, 어느 정도 결말을 짐작했다. 하지만 진실한 이야기는 결말과 상관없이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마르크 레비, 그는 정말 놀라운 이야기꾼이다. 마치 피터팬처럼 우리를 네버랜드로 초대한다. 벽장 속에 깊숙이 숨겨놓았던 앨범을 펼치듯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른이 된 어린아이들의 비밀, <차마 못 다한 이야기들>은 우리 삶에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자신의 과거까지 묻으려 했던 딸 줄리아에게 일주일간의 여행은 인생의 전환점이 된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르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정말 늦으면 돌이킬 수 없을 때도 있다. 바로 지금, 사랑했기 때문에 미워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면 자신의 못 다한 이야기를 꼭 들려줘야 한다. 우리의 삶이 언제까지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힘들고 괴로운 순간이 있을지언정 우리의 행복을 뺏을 수는 없다. 포기하지 않는 한.
단 두 권의 책을 읽었지만 마르크 레비의 팬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