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일곱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
김미월 외 지음 / 열림원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젊은 여성작가 7인이 ‘비’를 주제로 독특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혀 다른 느낌의 이야기인데도 ‘비’와 연결되어 묘하게 닮아있다.
내게 있어서 ‘비’는 그리 유쾌하지 않은 주제다.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대상이랄까. 창 밖에 쏟아지는 비는 얼마든지 참을 수 있지만 그 비를 맞으며 걸어야 되는 상황은 너무도 싫다. 우산을 써도 비를 완전히 피할 수는 없다. 내 몸 어딘가에는 빗방울의 축축하고 서늘한 기운이 스며들고 만다. 그 느낌이 내게는 왠지 불청객의 침입처럼 달갑지 않은 것이다.
<일곱 가지 색깔로 내리는 비>라는 제목으로 일곱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그러나 내게는 그녀들의 소설을 색깔로 구분하고 싶지 않다. ‘일곱 가지 색깔’이란 단어는 너무도 뻔한 무지개를 떠올리게 만든다. 분명 그녀들의 소설은 각각의 개성이 느껴지지만 그 개성을 색깔이란 이미지로 표현하고 싶지는 않다. ‘비’를 굳이 색깔로 나타내려는 것이 억지스럽다.
“비의 육체는 추억이다.
비는 추억의 힘으로 떨어진다.”
책 첫 장에 적힌 글이다.
아련한 추억은 흑백사진과 같다. 추억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이란 세월이 주는 그것과 같다.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순간들도 어느새 지나가고, 우리는 여전히 살아 있다.
<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 - 장은진>
“......나 또한 그들처럼 삶의 방법을 찾아낸 걸까. 문득 삶이란 마음먹기에 따라 가벼울 수도 상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장의 티슈처럼 말이다.”(48p)
진실한 사랑 없이 3년의 결혼 생활을 마감한 나는 무기력증에 빠진다. 지붕에 올라가 백수처럼 지내던 중에 우연히 아파트에서 떨어지는 티슈를 모으게 된다. 누군가의 간절함을 담은 티슈가 유일한 관심거리였던 나는 드디어 티슈의 주인공을 찾게 된다.
높은 아파트 어딘가에서 너울거리며 떨어지는 티슈처럼 우리는 세상을 향해 자신을 던지며 사는지도 모르겠다.
<대기자들 - 김숨>
썩은 사랑니를 뽑기 위해 치과를 찾은 나는, 여러 명의 대기자들 중에서 네 번째다. 창 밖에는 비가 오고 있다. 비가 온다는 명확한 사실처럼 내가 네 번째라는 건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지루한 대기시간과 나의 순번.
서른일곱 살의 주인공을 보며 답답하고 지루한 삶의 단면을 보는 듯하다.
<여름 팬터마임 - 김미월>
주인공 ‘진’은 고3 여학생 시절에 짝사랑했던 남학생이 문학 소년이었기에, 난생처음 대규모 백일장에 나간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결과로 인해 이후의 삶이 변한다. 얼핏 보면 평범한 그녀지만 과거의 한 사건이 그녀의 삶 자체를 무기력하게 만든 것 같아 안타깝다.
“나는 너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어. 하지만 너의 시와 무관하게 너를 좋아해. 너는 너지. 너의 시는 아니니까.”(102p)
어떤 과거가 우리 삶을 옴짝달싹 못하게 붙잡아도 ‘나는 나’라는 것, 그 자체로 소중하다는 걸 기억해야겠다.
<엘로 - 윤이형>
마법사가 등장하는 판타지 소설이다. 가장 마음에 든다. ‘비’가 주는 우울한 이미지마저도 마법의 힘으로 훌훌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 엘로는 마음속에 있는 불운의 덩어리를 뜻한다. 하지만 마법사 마르한이 만난 이방인 소녀의 이름도 엘로다. 소녀가 살던 나라에서는 엘로는 즐거움, 신나는 일, 기쁨이란 뜻이다. 자신이 가진 마법의 힘을 찾기 위해 떠난 여행에서 소녀를 만나면서 그는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키즈스타플레이타운 - 김이설>
어린이들을 위한 대규모 실내놀이터를 운영하는 부부에게는 은밀한 비밀이 있다. 남편은 소아를 탐하는 성적 도착증 환자다. 그녀는 남편의 치부를 감추려 애쓰지만 결국 자신의 아픈 과거를 떠올리며 괴로워한다. 비만 오면 증세가 심해지는 남편, 며칠째 내리는 비 그리고 그날 밤......예기치 않은 태풍처럼 모든 게 어이없이 끝나고 만다. 인간이 싫어지는, 소름끼치는 이야기다.
<낙하하다 - 황정은>
난해하다. 떨어지는 것은 상승하는 것일까?
<멸종의 기원 - 한유주>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긴 날씨표시상자와 나. 죽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살다보면 언젠가는 죽는 것인데 행복하지 않다면 불행한 것일까?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으면 죽은 것일까? 할아버지가 주신 책 두 권에는 어떤 내용이 적혀 있을까?
겨우 열두 살 소년이 할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하고, 부모님의 이혼을 겪으면서 많이도 아팠을 것이다. 행복과 불행도 구분 못할 만큼 무덤덤하게 살아간다는 게 슬프다.
“......우리가 가족이었을 때, 그러니까, 가족이라는 단어가 미량의 행복을 보장하고 있었을 때......” (238p)
가족이란 울타리에서 쫓겨난 그에게 할아버지는 죽음을 앞두고 이렇게 썼다.
- 불행.
- 불행하거라.
멸종의 기원은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