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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
앨리스 먼로 지음, 서정은 옮김 / 뿔(웅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파리대왕>이였던가? <사랑하는 사람>이였던가? 이 작가가 노벨상을 받았다는 소식에만 의존하여 처음 책을 구입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왜 어느 작품을 딱 정해주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갖기도 했었는데, 시간이 흐르다 보니 노벨 문학상은 한 순간의 반짝임이 아니라 오랜 시간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밝혀주는 등대 같은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년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 전에 읽은 <직업의 광채>에도 그녀의 단편소설이 실려있어 기억은 할 수 있었지만 솔직히 ‘그 정도였던가?’ 라는 생각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 후, <잘 있지 말아요>를 통해 이번에 읽은 책에도 실려 있는 <곰이 산을 넘어오다>를 살짝 맛보게 되었다. 그때는 정말 그 내용에 푹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이번에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을 읽으면서도 가장 끝에 실려 있는 <곰이 산을 넘어오다>로 제일 먼저 달려갔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앨리스 먼로의 섬세한 문장력에 빠져 어느새 마지막 장을 넘기고 있었다. 사실 내가 단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유는 이야기의 분량이 내 성에 차지 않고, 열려있는 결말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그 다음 이야기가 궁금하단 말이다’ 하며 책장을 덮을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총 9편의 단편이 실려있기에 자연스럽게 첫 장으로 넘어갔다. 극적인 장치나 갈등상황이 존재하지 않는 그냥 우리의 삶의 일부 같은 이야기들이 사실적이고 감성적으로 그려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위안>이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니나와 루이스는 우리 부부의 이야기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어쩔 땐 정말 별일 아닌 것에도 자신의 원칙을 고집하며 전혀 한발의 양보조차 없이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 싶은 우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오버랩 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니나의 “사람들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나요?”라는 말은 내가 수없이 했던 말이기도 하다. 뭐랄까,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마치 나의 일상을 그려놓은 것 같은 장면을 만날 수 밖에 없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위안>은 조금은 충격적인 장면으로 시작한다. 루게릭병에 걸린 루이스의 자살. 남편의 선택을 존중하고 있었던 니나는 그의 자살보다 그가 자신에게 아무런 메모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루이스는 자신의 부인에게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남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장을 바랬던 그의 차가워진 재를 날려보내는 니나가 느끼는 감각들 속에 루이스가 남긴 모든 것이 있지 않았을까
최초의 저릿한 충격과 여전히 움직이는 자신의 몸에 대한 경이, 차가운 냉기는 계속해서 파고 들지만 완고한 물 위로 삶의 조용한 표면 위로 자신을 들어 올리는 그 생존의 감각과도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