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런어웨이 -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날
앨리스 먼로 지음, 황금진 옮김 / 곰 / 2013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도피할 수 밖에 없었던 여자의 가장 황홀했던 그 날 <런어웨이> 부제와 책 제목을 보는 순간 귓가에서 사이먼
앤 가펑클의 ‘sound of silence’가 흐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거의 조건반사 식으로 더스틴 호프만이 등장했던 영화 ‘졸업’의 한 장면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서 펼쳐졌다. 책 표지부터 너무나
감각적으로 다가왔던 앨리스 먼로의 단편집. 다행히 첫 단편이 <런어웨이>여서 내가 읽고 싶은 것을 찾아 책장을 더 넘길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금새 그 감각적인 설렘은 앨리스 먼로가 건조하게 그려내는 평범한 일상 속으로 매몰되어 갔다.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클라크를 따라 도망쳤던 칼라 역시 나와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극히 평범한 시간 속에서 아니 이제는 삶에 찌들어 가고 있는 그녀가 다시 한번 설렘을 꿈꾸며 또 한번의
일탈을 꿈꾸게 된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순간순간의 감정들을 담담하면서도 세밀하게 그려내는 앨리스
먼로는 나에게 평범하기만 한 일상 속의 특별한 편린을 전해주었다.
또한, 줄리엣이라는 여인의 삶 속에 점점이 찍혀있는 수많은 에피소드
중에서 세 개를 골라 단편으로 그려낸 듯한 연작 <우연>
<머지않아> <침묵>도
그러했다. 사랑을 따라 떠나갔던 소녀가 어느새 한 아이의 엄마가 되어 돌아오고 이제는 사랑을 찾아 떠나간
딸을 기다리는 이야기는 누군가에게 너무나 특별하고 반짝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들이 너무나 담담하고 평범한 일상처럼 흘러가는 느낌을 준다. 이 이야기를 다시 읽을 때는 드뷔스의 ‘La mer’를 배경으로
깔고 읽었는데 소설과 음악이 점점이 찍혀나가는 듯한 느낌이 참 좋았다.
제일 마음에 드는 단편은 <힘>이었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 처음 이 책이 <떠남>으로 출간되었을 때 <허물>, <반전>, <힘>이 빠졌었다고 하는데, 만약 그때 이 책을 만났다면 정말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제외되었던 세가지 단편이 다 좋았고, 특히 바둑판을
보는 듯한 <힘>은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바둑은 바둑판을 어느 방향으로 보느냐에 따라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힘>역시 누군가의 시점을 빌리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는 묘미가 있었다.
살아보니 삶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어쩔 때는 2ne1의 노래처럼 “내가 제일 잘 나가”가 나의 주제가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 사람이 사는 것은 다
비슷비슷하다. 오죽하면 동화책 속의 이야기가 아름다운 것은 “Happily
ever after”로 끝나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특별한 순간이 지나고 일상으로
돌아오면 특별한 순간의 마법은 깨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벌써 3권째 만나게 된 앨리스 먼로의 소설이 때로는 성인용 동화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