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내
마리 다리외세크 지음, 최정수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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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내, 라는 단어를 들으면 왜인지 몰라도 앙큼하다라는 수식어가 떠오른다. 그래서일까? 데뷔작 <암퇘지>로 프랑스 현대 문단에 커다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는 작가 마리 다리외세크의 자전적 소설 같은 느낌을 주는 <가시내>, 성에 눈을 뜨는 10대 소녀 혹은 여인을 다루는 이 작품의 제목을 정말 잘 지었다는 느낌이 든다. 녹음파일 형식으로 만들어놓은 일기를 여러 번 꺼내보며 썼다는 소설답게 프랑스의 작고 따분한 도시 클레브에서 사는 몽상가기질이 다분한 솔랑주의 일기는 상당히 뒤죽박죽이다. 사실 일기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내가 쓰는 일기를 다시 읽어볼 때면 가끔 무엇을 이야기 하고 싶은지 주제나 결론이라도 제대로 써노라고 스스로에게 조언을 해줄 정도니 말이다. 상상과 현실이 교차하고 앞뒤 문맥의 맥락이 툭툭 끊어지는 거친 흐름 속에서도 솔랑주가 성에 대해 갖게 되는 호기심 그리고 자신의 내면처럼 산만한 섹스에 대한 이야기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문득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언제던가? 친구가 어른들이 보는 영화를 구했다며, 집으로 부른 적이 있다. 그때는 요즘처럼 쉽게 성인들이 보는 동영상을 구할 수 없는 시대이기도 했다. 몇 명의 친구들과 그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 한 마리와 함께 작은 방에 모여 비디오테이프(이러면 나이가 너무 티가 나나..^^;)를 재생했었다. 심지어 제목도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 테이프라는 그 시절의 우리에겐 충격적인 영화였지만, 막상 보니 제목만 그런 영화였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게 다들 지루해서 어쩔 줄 몰라 하다 졸다 깨다를 반복하다 보니, 영화가 끝나있었다. 심지어 강아지도 숙면을 취하고 있어서, 다들 원래 그런 영화인가보다 하며 순간 불타올랐던 호기심이 확 사그러드는 것을 느꼈었다. 우리가 했던 작은 일탈(?)과 이 소설 속의 이야기는 비교가 안 되는 것이긴 하다. 거기다 몰래 숨어가며 자신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정녕 무엇인지도 모르며 성장해왔던 우리와는 다르게 솔랑주는 아주 솔직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그런 것이었다.

어떻게 보면 노골적으로까지 보이는 성에 대한 묘사가 청소년이라는 애매한 나이 대에 걸리면서 어쩌면 이 소설이 조금은 우리에게 불편하게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실 성에 대한 묘사라는 것은 애매한 구석이 있다. 그것을 통해 전하고 싶어하는 주제의식보다 표현방법 때문에 오명을 쓰기 쉽다. 사실 나 역시 책을 읽으면서 그렇게 편하지만은 않았었는데, 리뷰를 쓰려고 생각을 정리하다 보니 내 학창시절의 작은 일탈이 떠오르며, 받아들이기 조금은 불편할 지 몰라도 이미 존재하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그렇게 큰 문제가 될 것인가 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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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변빌라
전경린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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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페루의 사과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린이 가끔 하던 말장난이었다. 내가 어느 날 사라지면 페루로 떠난 줄 알아, 라고 말했다. 페루엔 왜? 라고 내가 물으면 사과 때문이지, 라고 대답했다. 사과는 왜? 라고 물으면, 모르니? 삶이란 부재의 사과를 깎는 일이다, 할 때의 그 사과이지. 삶이란 사과 껍질을 가급적 얇게, 끊어지지 않게 깎는 일이야. 그 사과는 페루에만 있는 거야? 라고 물으면 당연하지, 라고 말했다. 76p

전경린의 <해변 빌라>의 마지막 장을 읽을 때까지 내가 끝내 내려놓지 못했던 이야기이다. 200페이지 정도의 소설을 참 길게 길게 읽으면서도 계속 이 부분이 떠오른 것은 아마 난해함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주위에 이런 말을 던지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사실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오랜 시간 동안 읽을 수 밖에 없는 길지 않은 소설을 읽으면서 학창시절 과외선생님이 보여준 프랑스 영화의 난해함과 하나의 화면에 여러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이 존재하는 피카소의 그림도 떠올랐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학창시절의 나는 영화보다 영화관의 조명의 숫자를 세고 있었다면, 지금의 나는 가끔 이 소설이 만들어내는 파도가 목까지 차오르는 듯한 답답함에 창 밖을 바라보긴 했지만, 에필로그와 작가의 말까지 다 읽어냈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화자인 유지의 친척이었다 엄마였다가 한 명의 여성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린이라는 존재, 그리고 작은 고모인줄 알았던 이린이 엄마라는 것을 알고 해변빌라 509호로 짐을 싸 들고 온 유지. 이 두 명의 여성만으로도 버거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파도처럼 밀려와 작은 흔적을 남기고 의미 없이 사라져간다.

어쩌면 사람이라는 존재가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유지의 생물선생님이었던 그리고 그 이상의 의미로 다가오는 이사경은 우리 몸의 세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세포들은 수없이 죽으며 동시에 재생해내고 있어 우리는 불안정한 존재일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사경의 어머니인 노부인의 말처럼 아무리 목표를 갖고 반듯하게 걸으려고 해도 지구의 움직임에 따라 미묘하게 어긋날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이기도 하다. 우리가 의미를 부여하는 모든 것들이 그래서 의미를 알 수 없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는 유지의 남자친구였던 오휘의 시선으로 유지를 바라볼 수 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것 같다. 처음에 언급했듯이 내 주위에 존재하지 않는 아니 솔직히 존재하지 않았으면 하는 난해하고 애매한 존재인 유지이기에, “지금은 내가 평범한 삶을 살아서, 너와 나눌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라며 밀어내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새 유지의 삶은 내 옆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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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ak Like TED - 누구나 TED처럼 영어 프레젠테이션 할 수 있다
정석교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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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미드를 갖고 영어공부를 많이 했다면, 요즘은 ‘TED’를 많이 활용하게 된다. TED란 기술, 오락, 디자인 같은 분야의 세계 최고 명사들이 참여하는 첨단기술 관련 강연회를 말하는데, 정해진 시간 내에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설명을 해주어서 부담 없이 들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거나 그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켜나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날 수 있다. 특히나 스마트폰이 있다면 어플을 통해서 언제 어디서나 자신이 관심이 있는 주제나 강연자의 이야기를 만나 볼 수 있는 것도 장점이고, 20분 내외의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는 잘 짜인 프레젠테이션을 만나볼 수 있기도 하다.

사실 나는 프레젠테이션에 늘 부담을 갖고 있기 때문에, TED강연을 볼 때마다 내심 부럽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강연은 따라 해보려고 노력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번에 <Speak Like TED>에 대한 기대도 컸다. 이 책을 쓴 정석교는 전에 <스티브 잡스의 공감영어>를 통해 한번 접해 본적이 있는데, 그 책에 비해서는 좀 더 유용하고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말들을 잘 정리해놓은 듯한 인상을 준다.  100페이지 분량이 작고 얇은 책이지만, 발음과 억양이 익숙해지도록 듣고, 내용을 이해하며 들리지 않던 단어까지 듣게 되는 이해, 그리고 소리 내어 따라 읽으면서 처음에는 천천히 그리고 귀에서 들리는 대로 입으로 따라 읽을 수 있는 3단계를 모두 다 해내기 위해서는 도리어 적절한 분량이다. 시작은 이렇게, 쉽고 간단하게 설명할 때는 이렇게, 보여줄 때는 이렇게, 마무리는 이렇게 총 4단계로 구분해놓아서 필요한 순간에 찾아볼 수 있도록 배려된 점도 마음에 들었다.

계속 진행할 때, 다음으로 넘어가자고 말할 수도 있지만, ‘Let's leave it at that(그 문제는 이쯤에서 접어둡시다)’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늘 쓰는 말들, 예를 들자면 문제제기에 사용되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을 단순 반복하는 것보다 비슷한 뉘앙스의 말들로 다양하게 표현하는 것도 청중을 지루하게 하지 않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부분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한 문장을 입에 버터를 칠한 듯읽을 수 있도록 30~50번씩 읽으라고 하는데, 그러면 자연스럽게 입에 문장이 붙을 것이다. 매 장마다 MP3를 따로 받아야 하는 것이 조금 귀찮기는 했는데, 카페(http://cafe.naver.com/sj0gam)에 방문하면 한꺼번에 받을 수 있다니 더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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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속도 - 사유하는 건축학자, 여행과 인생을 생각하다
리칭즈 글.사진, 강은영 옮김 / 아날로그(글담)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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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어느새 여행의 속도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 거 같다. 나는 늘 내가 보고 싶은 곳, 내가 가야 할 곳, 내가 쉬어야 할 곳에 대해서만 생각했고, 그 곳에 좀 더 빠르게, 그리고 좀 더 편안하게 가는 것에만 집중했다. 처음 친구와 유럽여행을 갔을 때도 그것 때문에 꽤 다투기도 했었다. 유명 관광지라고 하나? 그런 것을 하나라도 더 보고 싶어 하는 나와 그냥 쉬며 걸으며 그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만나고 싶어하는 친구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언젠가부터 내가 했던 여행을 되돌아보면 늘 그 나라에 점을 툭툭 찍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여행의 속도>에서 걸으면 자연스럽게 사고가 시작된다라는 말이 참 마음에 와 닿았다. 이 책의 저자인 리칭즈 역시 새로운 것, 이상한 것, 특이한 것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한다. 건축학자이기도 하니 그의 말대로 운전해 도시의 각종 건축물과 예술작품을 찾아 다니는 여행이 얼마나 이상적으로 느껴졌겠는가? 하지만 속도가 빨라질수록 내가 그 나라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은 점점 더 무의미해진다. 그래서 다양한 속도의 여행을 즐기게 된 그의 여행이 부럽기도 했고, 또 사진으로나마 이렇게 간접적으로 만나볼 수 있어서 정말 기뻤다.

건축가의 시선으로 소개해주는 독특한 건축물들, 망원경을 땅에 박아놓은 듯한 광고회사나 고양이 전차가 있는 타마역, 은하철도999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히미코, 스페인의 메트로폴 파라솔, 캘리포니아의 팝 건축양식 등 눈길을 사로잡는 독특한 건물들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지만 말이다. 더 이상 기차가 전진하지 않는 종착역에 있는 갈매기 카페와 아키타 현립 미술관에 있는 2층 커피숍 그리고 소형 건축박람회장 같은 파리의 공동묘지가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어쩌면 그 건물들은 경계성을 강조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갈 수 있는 곳, 그리고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곳, 두 세계의 경계를 떠올리게 한다고 할까?

특히나 공동묘지는 그 도시의 환경을 잘 반영해주는 축소판이라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파리의 공동묘지는 옥외미술관 같은 풍경을 보여주지만, 뉴욕 맨해튼은 초고층 빌딩 같은 인상을 준다. 그리고 일본의 공동묘지는 또 일본스럽다는 느낌을 주었다. 우리의 공동묘지는 어떠한가? 공동묘지는 아니지만, 외할아버지가 쉬고 있는 공간이 떠오른다. 올라가려면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선산이지만, 탁 트인 전망과 숲으로 둘러싸인 그 곳이 우리 조상들의 공동묘지와 비슷한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의 공동묘지는 군대의 그 것처럼, 우리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는 아파트의 그 것처럼 변해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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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의 발견 - 작고 나직한 기억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안도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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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에 작업실을 만든 안도현이 잔디밭에 돋아나는 잡초를 뽑아내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잡초의 이름을 아는 것은 좋았지만, 그것을 뽑는 일은 노역이었다고 말했는데, 옆집 아저씨가 공구리를 치면 된다는 조언을 해주셨다고 한다. 10년이 지난 후, 그는 잔디도 풀도 어울려 나는 것이 자연이라고 말하게 된다. 문득, ‘공구리라는 것이 표준어에도 적용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표준어가 존재하는 것은 좋지만, 그래서 오랜 시간 동안 지역사람들이 함께 사용해오던 말들까지 사라지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한다. 우리는 부추라고 하는 것을 영남에서는 정구지라고 한다는데, 그의 기억 속에 엄마의 손맛은 분명 부추전이 아니라 정구지찌짐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러하다. 어머니께서 강원도와 경기도 경계에서 성장하셨기 때문인지, 그런 말들을 나도 모르게 사용할 때가 있다. 옥수수를 엄마가 늘 말하던 대로 옥시기라고 하니, 친구들이 웃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 외할아버지가 직접 키우셔서 가마솥에 바로 쪄주시던 그 맛난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옥시기였다.

시 쓰다가

날선 흰 종이에 손 벤 날

뒤져봐도

아까징끼 보이지 않던 날

안도현은 이 시를 발표했다가, 배운 사람이 일본말의 잔재를 사용한다는 항의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말한다. 엄마가 발라 준 것은 머큐로크롬이 아니라 아가찡끼였다고, 그리고 나에게는 빨간약이기도 하다. 약국 가서 머큐로크롬 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라는 의심마저 든다. 어린 시절 할머니가 일본어의 잔재가 많이 남아있는 단어를 사용하자면, 그게 아니라니까 하며 잘난 척을 하던 내가 떠오른다. 어쩌면 할머니에게는 그것이 당신의 삶이고 추억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예전에는 사투리를 내가 잘 못 알아듣겠다는 이유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기억도 난다. 세계잼버리를 열기 전에 한국잼버리를 한 적이 있는데, 그때 지방에서 온 친구들이 사투리로 말을 하면 이유 없이 웃었던 나의 무례한 모습도 떠오른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문득 도리어 표준어라는 것이 공구리가 아닐까 하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안도현의 발견>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안도현은 시인이란 잊혀진 것들 미처 찾지 못한 것들을 발견하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를 통해 나 역시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을 발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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