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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들판을 걷다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4년 8월
평점 :
책을 읽으면서 당혹스러운 경험을 할 때가 있어요.
기억에 남는 작가와 책을 꼽으라면 ‘아니 에르노’의 ‘여자아이 기억’을 떠올렸었죠. 작가의 내밀한 경험담을 내내 뒤에서 따라다니면서 보는 듯한 적나라한 묘사 때문이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사건의 의미를 인지하게 되고 끊임없이 그날의 기억을 복기하면서 30년 동안이나 품고 있다가 풀어낸 글. 독자로서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고민했던 때가 있었어요. 너무 솔직해서 탈이었던 ‘아니 에르노’.
최근에 다른 의미에서 당혹감을 느끼게 하는 작가와 책이 생겼어요.
마치 커튼을 쳐놓은 것을 인식하지 못해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지나가다 우연히 젖혀졌는데,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는 것 같은. 현실 속에 감춰진 다른 비일상적인 광경을 보고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는 그런 느낌을 받았지요. 누군가와 마주 본 눈이 살짝 감긴 사이에 도망치려고 틈을 보는 아이가 된 그런 느낌.
‘클레어 키건’ 작가가 쓴 ‘맡겨진 소녀’가 그랬고,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그랬어요. 아니 일상 속에 감춰진 의미들이 그렇게 많으면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그것도 등장하는 인물들 태반은 인지하면서도 모르는 척 연기(?)를 하는 상황인데 제3자인 나도 알아버린 상황.
한마디로 말하자면 “불편하다”였어요.
<푸른 들판을 걷다>
표지와 제목을 보고 어쩌면 편안한 내용이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시작했어요. 그러다 곧 깨달았죠. 작가가 다른 누구도 아닌 ‘클레어 키건’인 것을.
등장하는 인물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 아님에도 ‘전사’가 궁금해지고, 예정된 안타까움에 책장을 덮은 후임에도 한숨이 새어 나왔어요. 분명 짧은데, 하나 하나 읽는데 걸리는 시간은 짧지가 않더군요.
아마도 읽을수록 눈에 들어오는 인물들이 생겨나겠죠. 지금 눈에 들어오는 인물들과 이야기를 적어보았어요.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고 마침내 벗어난 순간에 흘리는 눈물이 알려주네요. 끝내는 집으로 돌아올 것만 같은 누이동생(작별 선물),
반기지 않는 옛 연인의 결혼식에 참석해 수모를 당하고 기도를 통해서가 아닌 자연에서 하느님의 존재를 찾는 사제, 뭐든지 고칠 수 있다는데 정작 자신이 할 말만 하는 중국인 치료사. 그들의 불통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걸까요(푸른 들판에서),
말(馬) 때문에 그녀가 떠났다고 하지만 결국 본인이 그녀에게 한 말 때문임을 알고 있는 남자. 그가 본 여자는 다시 돌아온 것일까요. 꿈이 깨지 않기를 바라봅니다(검은 말),
아내의 비밀을 알면서도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남자와 결혼 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남자를 원망하면서도 떠나지 않는 여자, 그의 핏줄이 아닐거라 생각했던 그가 아끼는 딸. 그리고 집을 떠나고 싶어하는 큰 아들과 늘 어딘가 모자르다 여긴 둘째 아들. 아이러니하게도 남자가 갖고 있던 가장 큰 것이라 믿었던 집이 사라지자 다시 피어나는 가족간의 유대(삼림 관리인의 딸),
강가에서는 그렇게 수영을 잘 하더니 정작 바다에는 한 발자욱도 들어가지 않았던 할머니와의 대화. 그 의미를 깨닫게 된 청년의 독백. 그는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물가 가까이).
아마도 제목을 읽지 않았다면 부하를 괴롭히는 괴팍한 상사 이야기로만 생각했을, 상대를 깎아내리는 말과 적절치 못한 순간에 경험하는 결별이 어떻게 인간을 무너지게 하는가를 생각해 본 <굴복>(때로는 인물보다 이야기가 선명하게 남기도 합니다. 아마도 주인공은 평생 자신감 없는 삶을 살게 되겠죠.).
나무꾼이 선녀 옷을 버리기도 전에 속세로 내려온 천사 혹은 마녀와 옆집에 사는 염소를 키우는 남자가 만나 한 아이를 낳고 몇 년이 지나 자연스럽게 떠나는 모녀와 남자의 동화 같은 이야기(퀴큰 나무 숲의 밤).
적고 보니 개성 강한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 같습니다. 제가 써놓은 글에 동의하는 사람도, 같은 이야기를 읽은 것이 맞아?하고 의문을 표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요. 암요. 그래야죠. 우리가 소설을 읽는 이유는 각자 다른 해석에 있으니까요. 저마다의 주석이 쌓이면 이 책도 누군가 한 말처럼 우리시대의 고전이 될지도.